2016년 5월 1일 / 부활절 6주, 어린이주일, 창립기념주일

수고하고 짐진 자들을 부르시고, 목마른 자들을 오라 부르신 사랑의 하나님, 뜻깊은 어린이 주일, 교회창립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마음 깊숙이 다가오는 꽃 소식을 안고, 분주히 벌 나비가 여행하는 5월의 첫 번째 주일에, 어린 아이들의 순진함으로 덧입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은혜와 첫사랑을 사모하며 주님께 나왔습니다. 머리 숙인 저희에게 잃었던 순수함을 되찾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

 

 

  1. 초청인사

1)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자, 우리교회 창립 6주년 기념주일이다.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2) 실록의 계절, 5월이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라일락 향기가 참 좋다. 우리에게 시류에 걸맞는 두 가지 메시지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푸르름과 아름다운 향기처럼 우리교회가 주님 안에서 푸르고 향기로운 교회가 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사람들의 지친 마음에 그 푸르고 시원함을 주는 일을 우리교회가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한다.

또 매년 우리교회의 창립주일은 어린이 주일이다. 우리교회는 성장단계로 봐서 어린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시는가? 어떤 면에서 어린이는 어른보다 능력 있다. 주님 안에서 말이다. 주님의 큰 사랑을 받고 복을 받는 대상이 어린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 물론 요즘의 어린이는 어른들보다 더 영악해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어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고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교회가 늘 어린이와 같이 순수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란다.

 

# 문정포도나무교회의 일곱 가지 핵심가치와 로고설명.

3) 우리교회 자체적으로는 오늘 총동원 전도주일로 삼았다.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 오늘 교회에 모이는 수만큼 우리의 성장목표치가 되게 하옵소서.’

‘엘리야 때, 손바닥만한 구름이 이는, 바다 저편에서 (구름이) 모이는 것을 보고 큰 비가 올 것을 예감했던 것처럼, 오늘 주님의 손바닥을 보게 하옵소서.’

 

올 해, 꾸준히 성장하고 부흥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란다.

 

 

  1. 십자가 예고와 어린이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세 번이나 인자가 고난 받으실 것을 예고하시는데, 그 중에 세 번째 예고가 들어있는 대목이다. 참 신기한 점이 있다. 그 세 번의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예고하실 때, 꼭 어린이와 연관된 소재가 들어있다.

 

첫 번째는, 8장에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항변했던 베드로는 ‘사탄아’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야단맞았다. 그리고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고치시는 내용이 9:14-29에 나온다.

 

두 번째는, 곧이어 예수님께서 또다시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예고하신다. 9:30-32에 있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서로 누가 크냐는 쟁론을 벌였다. 그때 주님께서 명쾌하게 말씀해주신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이런 어린이를 영접할 수 있는 자, 그런 섬김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신다.

 

세 번째는, 10:32-34에서 십자가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시는데, 13~16에는 어린이가 주님 앞에 오는 것을 막은 제자들이 혼나고, 주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면서 안수하시는 대목이다.

 

어떤 연관과 메시지가 있는 것일까?

 

 

  1. 인생의 유비

1) 광야: 우리 인생은 무엇인가? 무엇에 비유하면 좋을까? 성경은 광야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 인생이 광야를 걸었던 이스라엘과 같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인생이 광야와 같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좋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으며 담대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광야와 같은 인생을 무작정 걷게 될지라도 우리 주님 인도하시는 대로, 때로는 구름기둥 불기둥 같은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다보면, 분명 복된 날이 올 줄로 믿으라.

 

2) 십자가: 그런데 복음서들에서, 특별히 마가복음이 전하는 또 다른 비유가 있다.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가셨다. 어디가 더 좋은 곳인가? 물음 자체가 애매한데, 갈릴리는 어디이며, 예루살렘은 어디인가? 갈릴리는 촌이다. 변두리이다. 예루살렘은 도시이다. 중심부이다. 얼핏 출세의 길을 의미한다고 생각이 스쳤다면 오산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놓고 보자면,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환영을 받고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배척을 받고 냉대를 당했다. 갈릴리에서는 기적과 이적과 능력이 나타났지만 예루살렘에서는 바리새인들, 유대인들과 논쟁이 일어났다. 갈릴리에서는 환희와 영광이 있었지만 예루살렘에서는 십자가 고난과 수치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버리고 고난스러운 자리를 향해 나아가셨다. 즉 복음서가 전하는 인생에 대한 비유란 십자가의 길이다. 복된 성도의 삶은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인생에 비유된다. 복음은 우리가 그 길에로 초대됐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길 위에는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 문제없는 인생이 없고, 상처 없는 인생이 없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고통이고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십자가로서 인생을 걷느냐, 마느냐 결단이 남아있는 것이다. 성경은 자기 십자가를 담대히 지고 순종과 충성으로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주님을 따르다 보면, 어떤 것이 있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구원 얻은 성도의 기쁨과 자유, 십자가 뒤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절망과 파멸로 점철된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인생을 꽃피우는 일, 안되고 안 되는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우리 주님 때문에 잘 돼있는 일, 이런 일들 말이다. 주님은 그 길이 좁은 문 같아 보이지만 참된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1. 바울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뜯어말렸다. 예루살렘의 상황이 바울에게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성령이 여러 군데서 증거하고, 또 예언하는 사람들의 말이 거기에서 결박을 당하고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조심했으나, 대적자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중상모략과 모함으로 체포됐고, 환난을 맞았다. 그것으로 그의 일평생 사역은 허망하게 끝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유대교의 본진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통을 당하신 그 중심부에서, 바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복음이 증거됐다. 과거에 그는 예수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으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이 간증되고, 박해 속에서 복음은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다.

그가 전부터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역하기를 바라왔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길이 막혀서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로마로 압송되게 되었다. 그 결정이 났던 밤에 주님이 그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런 위로와 사명의 음성을 듣는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환난과 박해는 오히려 기회를 얻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십자가 인생에서 우리는 이런 체험들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더불어 증거하며, 속사람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된다.

 

고린도전서는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지혜를 찾기 위해 여러모로 애쓴다. 그러나 때로는 가장 지혜로운 것처럼 여겨지는 인간적인 생각과 계산이 가장 미련한 것이 되곤 한다.

십자가 인생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기억하라. 거기에는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와 지혜가 있다.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어쨌건 압송되어 로마로 갈 수 있었다.

 

십자가 신앙은 삶의 자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믿고 용기와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 십자가인생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감당치 못할 시험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기억하라. 십자가 뒤에는 부활 영광이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승리의 상급이 있다.

 

우리 인생의 비유가 광야의 삶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을 믿는 우리에게 요청되는 믿음의 자세는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의 능력을 든든히 믿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1.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들라.

오늘 주님은 또한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다.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저는 어린이와 같은 심성을 갖거나 회복하지 않으면, 결코 십자가 인생에 근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십자가는 외면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면서도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십자가가 얼마나 미련해 보이는가?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고 충성하기 위해서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첫마음이 없다면 참 어려워 보인다. 왠가하면, 사람은 원죄로 인해 자꾸만 계산하고 판단하고, 자기 확신과 신념에 빠지려 하기 때문이다.

 

자 이런 물음을 던져보자. 어린이와 같이 받들어야 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은지랑 수지가 가게에 다녀와서, 수지가 굉장히 좋아한다. 가게 아저씨가 수지에게 동전 몇개로 용돈을 주셨다고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은지에게 물었다. 은지 왈, 거스름돈을 수지에게 준 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거 가지고 좋아했다.

수지에게 백원짜리 하나 주면서, 어깨 좀 주물러달라고 했다. 좋단다. 발로 어깨를 꾹꾹 잘도 밟아준다. 은지에게 만약에 백원 주면서 어깨 좀 밟아달라고 하면 아마 불가능할 것 같다. 1만원쯤 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수지에게 100원짜리가 개념없는 보상일까? 그러지도 모른다. 그런데 1만원을 줘도 하기 싫으면 안한다. 만원이든 백원이든 그는 아직 물질에 때묻지 않았기에, 금액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을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른다. 아빠가 좋아하니까, 그렇게 해주는 거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이익관계 때문에, 저울질에서 유리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이웃이 좋아하니까, 섬겨주고 나눠주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십자가이다.

 

적어도 어린이와 같다는 것은 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질의 영역에 때 묻지 않는 것이다.

오늘 말씀 사이에 있는 내용을 보면,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의 방법을 물었다. 그는 모둔 계명을 다 지켰다. 주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이유없이, 조건 없이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으로 물러갔다고 전하고 있다.

물질의 영역에 때묻다보니, 십자가와 이기심 속에서 주저한다. 아니 십자가보다 자기욕심을 택한다.

 

십자가의 삶은 장엄한 것만이 아니다. 나누고 베풀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득이 있을 때는 관계를 맺다가 그렇지 않을 때는 관계를 끊는 삶 속에서는 도무지 섬김과 나눔의 삶을 발견할 수 없다.

우리 교회가 이와 같았으면 좋겠다. 이런 푸르고 신선함을 늘 유지하며 사람들에게, 이 지역에 소망있는 쉼터가 됐으면 좋겠다.

여러분, 십자가 신앙을 가지고 담대히 세상에 나아가 승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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