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4일 부활절 5주
온 우주만물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며 푸르게 하시는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생동하는 생명의 영과 능력을 불어넣어주시며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 안에서 우리의 육과 영이 소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여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더 큰 살림
1)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빠는 일하고, 엄마는 살림한다.’는 말이 나왔다. 수지가 ‘살림’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제가 수지에게 설명했다가, 애한테 그렇게 설명하면 안된다고,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설명해야 한다고 애엄마가 말했다. ‘가족들을 위해 음식도 만들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집안일 하는 게 살림이야.’ 아내가 설명했다. 저의 설명은 이것이었다. ‘가족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도록 가정에서 하는 일이 살림이야.’였다. 그 살림의 손길은 정말 소중하고 고마운 것이다.
2) 이스라엘에 가뭄이 극심했다. 엘리야가 피신해있던 시내가 마르고, 그에게 떡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던 까마귀들조차 어느 순간부터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하신다. 거기서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내막을 보면, 도무지 그럴만한 형편이 아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음식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 뿐이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음식을 만들어 내놓으라고 하자, 그는 이것으로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 한다고 말한다.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말에 따라,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궤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쌀통에 쌀이 떨어지지 않고 기름도 없어지지 않았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줄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살림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은혜와 복을 더하시길 축원하다.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라고 하셨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특별한 살림의 지혜와 은총을 더하시길 원하신다.
3)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왜 하필이면, 사르밧 과부일까? 그는 극심한 궁핍을 겪고 있다. 그래서 그 마지막 음식재료로 식사를 하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본문을 접하면서 궁핍해진 여인의 손길을 통해서 선지자를 살리고 가정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 그 마지막까지도 믿음으로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의 도전 앞에 서왔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오바댜라고 하는 인물 때문에 그렇다. 어찌보면 엘리야와 사르밧의 문제는 서로 다르고 별개이다. 살려고 하는 사람과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문제이다.
나라전체가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워하는데, 아합왕과 이세벨의 상 아래에서 빌붙어 먹는 선지자들이 850명이나 됐다(18:19).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였다. 사회적 부조리가 어떤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생계를 위한 이들의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을 하나님 뜻에 더욱 어긋나게 하고 범죄에 빠뜨렸다. 아합과 이세벨의 악행은 묵과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일단 자신들의 살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선지자들은 아합왕과 이세벨이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걸림이 된다고 하여 제거했다.
그 와중에 오바댜라고 하는 국무총리격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장 3절에서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다고 증언한다.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한 일은, 그 난세에 여호와의 선지자들 100명을 각각 50명씩 나누어서 어떤 동굴에 숨겨놓고, 음식을 먹였다. 돌봐주었다.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오바댜에게 보내지 않으시고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셨을까? 그래도 사르밧 보다는 오바댜가 더 났지 않은가?
4) 저는 이런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단순히 엘리야의 생명을 부지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이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힘을 주며, 용기와 담대한 믿음으로 살게 하는 더 큰 살림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르밧 과부를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둘 다 굶주리고 궁핍하지만, 죽으려는 사람에게, 살려는 사람을 보내서 둘 다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사르밧 과부는 더 이상 살 수 없어 죽으려던 사람이다. 이 절망과 망막함을 아시겠는가? 궁핍한 고통과 절망 속에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신 것이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13),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으리라.”(14)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전했다.
사르밧 과부를 본받으라. 자신의 마지막 것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그 순종과 헌신도 아름답지만, 더 크게 본받을 것이 무엇인가? 사르밧 과부의 입장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이요, 나그네처럼 인식될 수도 있지만,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여기는 보는 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에 용기와 힘을 냈다. 그 믿음과 용기를 본받으라. 그 은총의 기회를 은총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 모두에게 열리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5) 주중에 차를 고치러, 누군가의 소개를 받고 카센터에 갔다. 거기서 사장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컥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야기를 듣다가, 같이 말씀을 보고 기도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고 1이 된 큰 딸이 어느 날 자다가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신음을 했다. 곧바로 119를 불러 응급실에 갔다. 뇌혈관이 갑자기 2.5cm나 부풀어 있었고 뇌출혈이 일어났다. 원인은 모른다. 다행히 빨리 와서 사망은 면했지만,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했다. 그는 넋이 나가고 정신을 잃었다.
며칠 후에 그 교회 목사님이 다녀갔다. 어디 집회를 다녀오다가 소식을 듣고 한 밤중에 방문했다. 기적은 없을 거라 생각했고,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의 체험은 전무했다. 그런데 그 새벽에 아이가 점차 의식을 보이기 시작했다. 식물인간 상태를 면했다.
그래도 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살 수가 없었다. ‘아직 피어나보지도 못한 꽃인데…!’, ‘하나님, 하나님’ 울부짖다시피 했다. 아이가 잘 못 될 거라는 생각에 살 힘을 잃었다. 그는 이런 간증을 한다. 카센터에 손님들이 오는데, 거의 매일 꼭 한 분은 목사님들이었다. 신기하지 않은가? 목사님들은 기도를 해주었다. 기도를 받고 잠시 잠깐은 마음이 편했는데, 또 금방 두려움과 염려가 찾아들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또 다른 목사님을 다음날 보내주셔서, 위로와 용기를 얻게 했다.
그는 이러한 고백을 한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자신과 가정과 아이를 돌보셨다고 말이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의 병원비를 위해서라도, 아이 병간호는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일을 해야 했고, 정신이 다른 데 가있다보니까, 자동차를 고치면서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심지어 자기가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버티고 견디고 이겨나가다 보니까, 어느새, 시련과 환난이 지나갔다. 지금은 올해, 자녀가 대학에 갔고, 100%로 완치됐다고 자신 한다. 식물인간이 될 거라고 말했던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믿음이 없지만, “아이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하셨나봐요!”라고 말이다.
그런데 또다시 염려가 찾아온다. 앞으로 ‘무슨 일은 없겠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했으면서도, 믿음이 그것밖에 안되냐고 정죄할 수 있겠는가? 없다. 인간이 그마 만큼 연약하고 갈대와 같고 흔들리는 존재다.
6)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한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것을 깨닫게 한다. 지속적인 돌봄과 위로와 용기는 시련을 이기게 한다. 지속적인 믿음과 용기는 고난과 어려움에서 승리를 가져다준다. 우리 모두 그 지속성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 기적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지속적인 은총을 통해서 살 소망이 생기고, 살 소망은 지속적인 믿음을 통해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실현되는 것이다.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신 이유는 이것 아닐까? 지속적인 은총으로 인생의 절벽위에 선 이를 돌보고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살림의 섭리를 보이시기 위해서 말이다. 단순히 생계 때문이 아니라, 신경이 드러난 이빨이 시리고 아픈 것처럼, 뼈아픈 희망과 소망 중에 믿음으로 감싸고 힘과 용기로 북돋아 주기 위해서 말이다.
7) 저는 오늘 말씀 중에, 21절에 특별히 우리가 초점을 맞추었으면 한다. 당대의 시대상을 말하자면, 그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들출 수도 있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서 17절에,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너냐?”
그동안 아합은 손톱 밑의 가시처럼 여겼던 엘리야를 찾아내기 위해 수배령을 내렸고 샅샅이 뒤졌다. 엘리야를 자기 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고, 이 가뭄과 기근도 엘리야 때문이고, 엘리야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 탓, 남 핑계만 하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일 수 없다.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8)
아합왕이 새겨들어야 할 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백성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있다. 그 대목이 21절이다. 더 많은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이야기 하다가는 정작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놓칠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듣기를 원하시는 말씀으로 21절을 주목해보자. 다 같이 읽자.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지속적인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바라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로 한 법이다. 하나님을 따를지, 세상적인 것을 따를지 말이다. 하나님의 기쁨을 택할지, 나의 유익을 택할지 말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이중성이나 애매모호함에서 단호하게 하나님을 바라도록 결단하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무엇이었는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인 우유부단함 속에 빠져있었다.
8) 복 받길 원하는 사람은 믿음의 결단이 있는 사람이다. 여호수아도 약속의 땅에서 자자손손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결단을 촉구했다. “너희가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긱겠노라.”(수24:15) 야곱도 딸 디나 일로 다시 맞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그 삶 속에 자리했던 이방신상과 장신구들을 버리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아가고 지속적인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 영적인 우유부단함 속에서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지속적으로 걸어가기를 결단하라. 지속적인 은혜를 사모하라. 하나님은 그 섭리 속에,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인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하길 원하신다. 또한 예수를 본받고,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모습을 따르기로 결단하라.
9) 민들레국수집은 줄을 세우지 않는다고 한다. 노숙자를 위해서 국수를 말아준다. 노숙인들이 국수를 먹기 위해 줄을 선다. 누가 줄을 세운 것도 아닌데, 자기들끼리 줄을 서고 때로는 그 줄 때문에 서로 다투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는 결코 줄을 선 순서대로 밥을 제공하지 않는다. 무조건 가장 오래 굶었거나 가장 많이 배고픈 사람들 먼저 식사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항의하고 아우성이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잘 모르고 줄을 선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 맨 뒤에 사람부터다. 왜일까? 이렇게 말한다.
“노숙하는 분들이나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인 약자들은 모두 세상의 줄에서 가장 맨 끝에 있는 이들입니다. 줄 서기 경쟁에서 밀려 뒤로 쳐진 이들입니다. 경쟁에서 밀려 밥 한 그릇 마음껏 드실 수 없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곳에서, 또 다시 줄을 세워 경쟁에서 이긴 사람부터 식사하게 해드린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 따뜻하고 자상하게 배려해야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서영남,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24)
믿음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결단함으로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데서 다시 시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