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7일 / 부활절 후 4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들녘의 푸른빛이 생기를 자랑하며,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때에,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저희 심령 속에 가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쑤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1. 당혹해하는 바울
현재 바울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의 왜곡된 인식이나 변질된 의식은, 그것을 바로 잡으려면 꼭 진통이, 따른다. 쟁론이 벌어질 수 있고, 그래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방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곰팡이가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건강한 몸이 되려면, 참 복음의 기초 위에 바로 서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런 고백들 속에서 앞에서 말한 바울의 당혹감과 고민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용납할 수 없는 것을 묵인하고 가만히 두었다가는, 교회는 얼마든지 괴물로 악마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용납하면서, 용납할 것은 용납하지 않는 것, 그 작은 인식과 의식의 왜곡으로부터 교회는 항상 위협을 당해왔다.
리차드 루벤슈타인이라는 유태인이 있는데, 그가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자 논쟁을 불러왔던 ‘아리우스 논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다. 그가 유태인이면서 이러한 연구를 하게 된 이유를 그는, 그의 성장배경에서 찾고 있다. 어릴 적 그가 살던 동네는 기독교 마을이었다. 친구들도 기독교인들이었는데, 그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때리고 괴롭혔다. 유태인들이 예수를 죽였으니, 유태인을 미워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정말 당연한 것인가?
이것은 세계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세계사를 보자.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을 보면, 반유태인 정서와 게르만민족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결탁해서 생겨난 것이 무엇인가? 나치이다. 히틀러는 세계사에 더할 나위 없이 흉악한 짓을 자행했다. 600만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것은 분명히 악마짓이었다. 그런데 아시는가? 대다수 국민들이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유태인들을 차별하고 심지어 말살하는 것은 주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국민들은 호응을 했고, 이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은 곧 좌파로 몰려서 핍박을 당하거나, 순교를 당했다.
‘곰팡이가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숨어있던 죄성이 드러나 작아보여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광기에 휩싸였다. 또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준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서 잘못된 줄도 모른다. 망언, 망발은 광기에 기름을 붓고, 너무나 당연하고 그럴싸한 것으로 위장된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매도당한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람들은 대중적인 말과 행동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사55:8),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고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한다. 세속적인 생각이나 기류에 우리의 믿음과 판단을 가져다 붙일 수 없다.
바울 역시 이런 것들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다른 복음은 없나니(7)”, 그리고 8절, 9절에서 두 번 씩이나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당혹감과 심각한 고민 속에 메시지는 단호하다. 주님은 우리가 진리를 알기 원하신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되기를 바라신다.
2.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
1)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 복음의 뒤섞임
그렇다면 다른 복음이란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무엇일까?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 허술하게 믿다가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것’, ‘예수와 관련된 것’, 그것만을 믿고 절대시 한다. 그게 우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호와를 믿는다 하면서 바알을 따랐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복음’은 예수님과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쉽게 미혹되거나 빠질 리가 없다.
예를 들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할까?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까? 쉬운가?
입장을 바꿔볼까? 여러분은 정죄받길 원하는가? 사랑받고 용서받길 원하는가?
세월호 유족들을 좌파로 매도하고 정죄해야 할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위로자가 되어야 할까? 이정도도 판단하기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요즘 핫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 동성애자들은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고 구원받을 수 없으니, 차별이 마땅한가? 차별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마땅한가? 아니 하나님 외에 그가 구원받을 수 ‘있다, 없다’를 감히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이 만만치 않기에 위험하고 추악한 인사로 간주하고 차별이나 학대의 돌을 들어야 하는가? 우리에게 좀 더 주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있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배타적이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하신다.
몇 가지 경우에 대해 이런 말씀드린 이유는 이렇다. 그 정답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신앙 속에, 신앙공동체 속에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혼재해 있는가, 그리고 갈등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나 당연하고 확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혹시는 편견과 아집은 아닐까, 반성적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나와 내 가족에게 그 일이 일어나도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가? 세세하게 들어가자면, 우리 일상생활과 삶과 관련한 더 많은 논란과 변론들이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뜻에 맞게,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은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동업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흡연과 음주가무를 즐기는 사람은 성도라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등등 복잡한 수많은 문제와 갈등 속에서 기독교인다운 생각은 무엇인지 물음이 주어진다.
2) 바울의 고뇌와 메시지
그런데 불행은 교회가, 성도가 다른 복음에 미혹될 때이다. 바울도 이런 어려움과 고민에 빠졌다. 바울에게 집중해보자.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그것을 너무나 잘 지키는, 여지없이 바리새인이다.(빌3:5-6) 로마의 시민권이 있다고 하고, 당대 최고의 율법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해본 적이 있을까?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바리새파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것 때문에, 교회 내부적으로는 그를 경계하고 기피한 적이 있었다. 그의 신상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 이런 대우를 당하거나 취급을 당할 때,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물론 초창기의 일이다. 나중에는 외부적으로 유대인들로부터 표적이 되었다. 그가 바리새파 사람이고 유대인이며 할례를 받았으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이방인과 접촉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상한 일이다. 만약 교회 밖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진다면 어떨까? 교회 안에, 할례를 받지 않았고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저평가되고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교회 밖에서나 일어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라는 명분과 이유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멀었다.
특히나 할례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할례 받지 않았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유대인이나 할례 받은 자들을 위해서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그리스도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그 사랑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에 거짓형제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스러운 것’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데, ‘세속적으로 성스럽다 하는 것’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교회를 세속화하는 경우가 있다. 의도적으로 그런지, 무지해서 그런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 포함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들의 옛 사고방식이나 생각에 따른 것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당연한 것이며, 대접을 받거나 취급을 받고 싶으면 할례를 받으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바울의 제자였던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고 했다. 의도됐건, 그렇지 않건, 어떤 결과를 낳을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괜히 이상해지게 만든다. 아무 문제도 아닌 것, 문제 될 것도 아닌 것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예수의 사랑을 머리고 만다.
여러분, 주의하시라. 교회 안에서는 폭넓은 아량과 이해와 용서와 관용과 양보, 배려 등이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이나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고 정죄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것일 뿐이다.
바울은 디도에 대한 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다른 복음을 고집했던 사람들은, 사람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그 위에 서려고 하는 의도로 풀이했다.
여러분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 그 차이는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려는 것이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음을 믿고, 주님을 따르려는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이기심에 이용하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복음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닮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남을 지배하고 정죄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복음이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섬김을 받으려 들게 만드는 것은 다른 복음이다. 그러나 섬기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헌신을 강요하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다. 스스로 헌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복음이다.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남을 정죄하게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뉘우치며 회개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자기 권리만을 내세우게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하나 그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자제하고 참을 줄 아는 것,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3. 다른 복음
다른 복음에 빠지고 나니까 교회에 일어난 일들을 보라. 바울이 4장 8절 이하에서 그 염려를 말한다. 보라.
우선은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게 됐다(4:8). 사람을 떠받들고, 아부하고, 미화하고, 영웅시하고 심지어 신격화 한다.
두 번째는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간다(9). 이것은 본질도 아니고 근거도 없는 세상적인 말들,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지어낸 말들에 놀아났다는 것이다.
세 번째, 결국 복을 잃어 버렸다(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세상적인 방법대로 해놓고 복될 줄 알았겠지만, 그러리라 생각했지만, 결국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없다는 말이다.
20절은 바울이 갈라디아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보여준다. 다른 복음을 따르고 세상의 천박한 말들에 노예가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실하고 참교회의 모습을 상실했기에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4. 그리스도의 복음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인가?
(그림 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소망이 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주님은 죄인을 미워하지 않으셨다. 배척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다. 식사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누리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양 99마리를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목자처럼, 죄인들을 찾으러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아닌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게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예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 때문에, 우리가 죽음에서도 생명의 소망을 발견한다. 중한 질병에서도 고침을 받고 회복된다. 실패와 절망에서도 위로와 힘을 얻고 일어서서 승리한다. 궁핍 속에서 부요함을 주신다. 저주에서 벗어나 복을 받는다. 약함이 강함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절규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싫어서, 그것을 회피하고자, 불온한 세력이나 지탄받을 대상으로 매도할 때, 동조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다른 복음에 빠져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누군가, 어떤 대상과 편을 가르고 미워하고 증오하도록 만들 때,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인기 중, 방영됐던 ‘태양의 후예’가 끝났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후예임을 잊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하게 믿으며, 성실하게 이행하기를 축원한다.
‘태양의 후예’에서 보여줬던 주인공들의 사랑, 용기, 불사조 같은 운명보다, 더 큰 사랑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한 용기와, 죽음의 권세마저 이길 수 있는 부활의 권세를 입입어 성도로, 믿음의 사람으로 복되게 살아가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