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선 곳에서_시편30:1-12

잠시 멈춰선 곳에서_시편30:1-12

 

 

 

2016년 4월 10일 주일설교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들녘의 푸른빛이 생기를 자랑하며,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때에,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저희 심령 속에 가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65:4)

 

 

1. 나를 멈추게 하는 것

봄에는 모두가 병아리 같다. 거리에 꽃들이 화사하더니, 푸른 이파리들이 나고 있다. 저마다 꽃구경을 하면서 스마트폰에 사진을 담느라, 연신 바쁘다. 처녀총각들도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봄 앞에서는, 그 반기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꼭 병아리 소풍 나온 듯 했다.

 

저는 반칠환의 시가 떠올랐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보도블록 틈에 핀 /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

 

그러면서 이렇게 매듭짓는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하는 / 힘으로 다시 걷는다. //

 

저절로 걸어가고 있는 듯해도, 잠시 멈추었다 걸으면 갈피를 알게 되고, 거기서부터 오는 힘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교회는, 지금 이 예배드림은 우리가 멈춰서기 가장 좋은 곳이요, 때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는 무엇을 멈추며, 어떤 힘을 얻어야 할지 시편의 고백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2. 잠시 멈춰선 곳에서

오늘 시편의 말씀에 붙은 표제를 보자.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낙성식은 어떤 새 건물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의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시편은 성전에 대한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지, 기대와 기능이 무엇인지, 노래로 부르고 고백해야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러준다.

 

시편은 크게 찬양시, 감사시, 탄원시로 나뉜다. 의미는 그 구분하는 말 그대로다. 오늘 시편의 장르는 무엇일까?

 

찬양시와 감사시에 속한다. 2-3절을 보면, 정신과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1절과 4절, 12절에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며 찬양하고 있다.

 

 

3. 안일한 자기 확신과 신념을 멈추는 자리

먼저 6-7절 말씀을 보자. 시인의 평상시를 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마음 편히 지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고통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는, 그것을 자기와는 무관한 일로 여기는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측면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신념이나 믿음은 흔들림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편할 때에는 굳건한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게, 의심의 여지없는 은총으로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그래!’, ‘나는 아니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더 이상 자기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가령 하나님의 존재나 도우심, 그에 대한 지식이나 섬김 말이다. 그리고 자기가 해결 못할 일들은 없을 것이며, 웬만한 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지점이, 우리를 안일하게도 만들어주지만, 자만하거나 나태하게도 만들어준다. 신앙적으로 게으르게도 만들고, 선줄로 여겨 넘어지게도 한다. 죄를 짓기도 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만들기도 한다. 불순종하게도 만들고 미혹되게도 만든다.

 

그런데 그가 놀란 것이 있다. 자기랑 상관없다고 여겼던 어려움, 시련, 고통이 그에게도 찾아왔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7)

 

어느 것도 장담하고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없건만,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누구나 사고나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며, 또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실패와 절망이 내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당하기는 싫은 것이다. 당하더라도 내 원대로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이 있기를 원한다.

 

시인은 어려움을 겪고서야 깨달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도 막상 고난을 당하고 나니, 큰 산처럼 다가왔다. 내가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지치게 하는 문제, 포기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가득하다. 질병으로 고통 받고, 사람 때문에, 일 때문에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사람은 그때, 길을 잃는다. 어찌해야할 바를 모른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것을 멈추길 원하신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길 바라신다. 주님 앞에 나아오는 이들은 그것을 멈추고 나아오는 것이다. 꼭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럴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마음은 겸손과 온유한 마음이요, 갈급한 마음이어야 한다.

 

 

4. 자신의 과신을 멈춘 자리, 기도자리

여러분 성경은 소망을 주께 두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시42) 오늘의 시편에서는 주님께 부르짖고 간구했다고 말한다(8).

 

9절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한다.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10절은 간구하고 있다.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자신의 과신을 멈추었다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여야 하는가? 기도자리이다.

 

성전은 이런 곳 아니겠는가? 건물이 크게 지어지고 화려해서 성전이 아니라, 자기의 과신을 멈추고 기도하는 자리이다.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교만했던 자신을 내려놓으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내게 스며들고 개입함을 체험하는 신비를 경험하는 자리이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말씀도 이것이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5. 그 멈춤의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① 응답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부르짖으니 들으시고, 간구하니 도우시는 분이시다. 성전에서 시인의 고백과 믿음이 그것이다.

 

2절-3절은 부르짖을 때 응답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이렇게 매칭을 시키고 보면 5절은 간구를 들으시고 도우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가 좋으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시며 인자하시다는 믿음을 충만히 가지라.

②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라.

11절을 보면, 선하신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슬픔이 변하여 춤을 추게 하시는 분이시다.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옷을 입히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 아닌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소리 듣는 것 말이다.

 

# 둘째 수지랑 잠자리에서의 대화

# 아빠랑 자자, 인형이랑 잘래 옥신각신 하는 상황.

나 : 인형이 좋아, 아빠가 좋아?

수지 : 인형

나 : 엥? 그럼 인형이 좋아, 아이스크림이 좋아?

수지 : 당연히 아이스크림이 좋지!

나 : 그럼 아이스크림은 아빠가 사줘? 인형이 사줘?

수지 : 아빠.

나 : 그렇지! 그럼 아빠랑 잘래? 인형이랑 잘래?

수지 : 인형.

 

하나님도 이런 마음 아니실까? 인형 내려놓고 아빠 품에 안기기를 바라시는 마음? 그래도 자녀의 즐거움과 기쁨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래서 억지로 뺐지 않지만, ‘우리 아빠 최고!’라는 고백이 유효하도록 만들고 싶은 마음.

 

시인은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찬양하고 있다. 성전은 그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의 힘을 얻는 곳이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 앞에 겁을 내거나 용기를 잃을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사도 중에 하나였던 바울은, 그 길이 비록 세상의 눈으로는 멸망으로 가는 것처럼 미련해 보일지라도, 구원하심을 입은 이들이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힘과 용기를 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는 우리를 돕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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