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7. 주일예배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맹추위가 찾아오지만 곧 풀리기를 반복하며 지나가는 겨울과 찾아오는 봄 사이에,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5:11-12)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

 

  1. 에피소드

여러분,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데도 낙심된 일이 많다. 고난이 계속되고 어려운 일이 많으며, 절망이 늘 앞에 있다. 그러나 신앙은 안되고 안되고 안되는 것 같아 보여도, 결국에는 되는 역사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가는 안 되는 것처럼 보이고 미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가 있다.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다. 십자가의 능력은 무엇인가? 그 때, 인내하고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능력이다. 부활의 능력은 무엇인가?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헛되지 않으며 어느새 열매를 맺고 결실을 이루며 승리하는 역사다.

장차 심은 대로 거두게 되고, 뿌린 대로 결실할 것을 믿으면서, 오늘도 성실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각오와 다짐이 있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1.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쳤다.

 

“은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주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선포하는 순간, 그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2. 룻다라는 곳에서는 ‘애니아’라 하는 중풍병자를 고쳤다. 8년 동안 병치레를 하면서,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 말이 떨어지자, 곧 일어났다.

 

#3. 오늘 성경본문에서는 ‘다비다’(번역_도르가)라 하는 여제자가 살아났다. 그는 죽었던 자이다. 시체는 다락방에 놓여있었고(이것은 베드로가 올 때까지 장례가 미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는 그를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가 눈을 뜨고 살아났다.

 

 

  • 영광을 취하고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주님은 이와 같은 능력과 역사를 우리도 경험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당하는 십자가 고난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일으킨 기적들에 주목하고 관심을 갖는다. 그를 주의 특별한 능력을 가진 종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주의 능력을 가진 종이 있을까, 찾는다. 맹신자라든지 광신자, 혹은 기적이 절박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기도 한다. 그 마음을 노리는 사람들은, 사도의 능력이 자기들에게 양도 계승되었다고, 갈급한 이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려 든다.

그런데 여러분, 그 관심만 가지다 보니, 간과하는 것이 있다. 기적에는 관심을 가지고 기대하고 바라는데,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다.

 

 

  1. 예수를 닮으려고 했던 노력들

그것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닮으려 했던가, 하는 것이다. 저는 오늘 말씀의 증언 속에서 기적이나 이적으로 통하는 어떤 신비한 능력보다도, 예수님을 닮으려고, 성도들이 간절한 사모함을 가졌던, 그 ‘열심’이 더 특별하게 보인다.

 

아시는가? 사도행전은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확장되는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 근간에는 주님을 너무나도 닮으려고 갈급했던 신앙인들의 열정과 순수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베드로, 스데반, 바울,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찾아와 계시고, 살아계시다.

흔히 사랑을 하면, 그 사람처럼 되려고 한다는 말이 있다. 닮으려고 하지 않아도 어느새 닮으려고 한다. 물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을 욕하면서 닮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도 마찬가지인데,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할 때, 여러 입들을 통해서 거기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다. 성령의 증언도 그랬다. 그러나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가?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그렇다면 피해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베드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 성령체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베드로 역시 오순절 성령을 체험했다. 그 순간 그의 심령이 사로잡힌 모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이시다. 단순한 광기와 열광이 아니다. 그 심령에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달리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없는 영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광기에 불과하다. 예배가 끝나고 찬양이 끝나면, 식어지고 허무해지는 그런 영이 아니다.

 

* 현상은 같을 수 있으나 본질은 다르다. 물론 현상은 다를 수 있으나 본질은 같은 경우도 있다.

 

–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첫 설교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첫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는 어떤 모습으로 설교를 했을까? 단언컨대 자신의 모습인 것 같지만, 예수의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말씀을 전하시던 능력있는 모습이었다. 자기주장이나 자기사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솔로몬의 행각에서도, 공회원들 앞에서 변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 저를 사로잡고 있는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유창함을 기준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온유하고 자비하시며 인자함이 넘치는 모습으로 찾아가셔서 복음을 증거하시는 그 주님의 진실함 말이다. 그 좋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온통 저를 사로잡고 있다. 예수님을 떠올리며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예수님을 떠올리며 말씀을 전하는 저의 모습, 그 현상은 다를 수 있지만, 본질은 같은 것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 이밖에도 많다. 예수님의 모습처럼 베드로도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와 중풍병자를 고쳤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초청을 받았을 때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셨는데, 베드로 역시 그랬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여인과의 접촉으로 비판을 받으셨는데, 베드로 역시 그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담력을 누르지는 못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베드로도 똑같이 당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권력자들의 위협 앞에서, 더 이상 예전처럼 겁쟁이나 비겁자가 아니었다. 주눅들지 않았다.

 

– 그리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다. 부활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베드로가 여제자였던 죽은 다비다를 살렸다.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살려주셨는가? 성경은 오로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울지 말라. 주님은 눈물을 닦아주셨다. 도르가의 죽음을 대하는 베드로의 마음이나 태도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불쌍하고 안타깝고, 그게 전부다.

 

 

  1. 그 과정에서 능력이 나타난다.

만약에 베드로를 통해서 나타난 기적에만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초점을 맞춘다면, 여러분,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공염불에 불과할 수 있다. 그래서 공생애 중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계시다.

 

능력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예수님을 닮으려는 과정과 노력 중에 나타났다. 사모함 중에 나타났다. 한 사람의 노력만이 아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실한 아들이 되는 모습과 그 안에서 능력을 보여주셨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100% 닮으려는 믿음과 결단 속에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 능력을 경험케 하시지 않으시겠는가? 100% 닮을 수 없어도, 그 노력과 열심 중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역사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네 안에 거하리라.”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11)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 선행과 구제

다비다라는 인물을 보자. 36절, 그는 평소 선행과 구제를 심히 많이 하는 인물이었다. 어떤 선행들이었을까? 39절, 죽은 도르가 곁에서 울고 있던 사람들이 속옷과 겉옷을 내보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평소 도르가가 그의 재능과 은사로 사람들을 도왔다는 것이다. 특히 어려운 사람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 과부들, 그들은 사회적 약자였고 복지정책이 필요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도르가 지어준 옷에 따뜻한 겨울을 나기도 했고, 무더운 여름 시원하기도 했다. 도르가가 지어준 옷의 의미는 무엇인가? 옷은 단순히 옷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는 도르가의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평소 선행과 구제, 그것은 단순한 착한 일이 아니다. 그의 성품과 인격이 고귀하고 고매해서 벌인 도덕적인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예수님을 닮으려는 그의 노력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개인의 도덕적인 착함이나 선행에서 벌인 일에는 절대 이것이 일어날 수 없다. 복음이 증거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사건 말이다. 개인적인 감사와 기쁨과 치하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이것이 일어나고 있다.

41절 하반절과 42절은 도르가가 살아난 것이 욥바의 온 사람들에게 증거되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과 모습 속에, 기적도 일어나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도 나타났다. 그것이 경험되고 체험됐다. 인간의 선행과 도덕이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처럼 살자고 다짐하자는 이야기이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라 내가 행하리라”(요14:14)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1. 그리스도인을 찾는 사람들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을 급히 보내서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와달라고 간청한다. 슬픔과 괴로움에 빠진 이들이 찾는 사람은 누굴까?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들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너무나도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을 찾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불타올랐던 베드로에게 불쌍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뿐이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그 애절함조차 예수님을 닮았던 것일까?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가 눈을 떴고, 베드로를 보고 앉았다. 살아났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능력처럼,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자기십자가를 감당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좇으려고, 노력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부활의 능력이 우리 십자가의 길 위에 나타난다.

 

42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단순히 기적 같은 일 때문에 믿게 되었다고 여기지 말다. 보통 이럴 때, 마술적인 신비주의에 빠지고, 이교적인 담화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예수의 능력을 가졌다고 자기를 선전하고 자랑하기는 하지만 닮으려고 하지 않는 이들을 주의하라. 거짓과 사술에 기인할 때가 더 많다. 주님이 드러나지 않고, 사람이 우상화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를 믿더라.’ 단순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주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된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주님은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돕지 않으시겠는가?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증거된다. 교회의 각 지체인 우리가 바로 예수님께 연결돼서 닮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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