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0일 / 주현절 후 첫째 주, 세례주일.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새해의 결심과 작심을 벌써부터 희미해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때에,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기로 다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부름 앞에 겸손한 자세로 응답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119:165,176)

 

∙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자 어떤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자.

그리고 주님의 섭리에 대해 믿음과 확신을 갖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용기를 내자.

주님은 순종하기를 바라신다. 그 순종을 통해서 주님의 나라와 영광이 나타나길 바라신다.

 

주님은 승천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될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행전은 이 약속의 온전한 성취이야기이다.

 

예루살렘과 유대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증거됐다. 처음에 12제자들을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120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했다. 마침내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져서 3천명이나 주님을 믿게 됐다. 그리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복종하게 된다. 정부당국자들의 위협과 엄포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들의, 주님께 붙들린 심령의 모습이었다. 영적인 지혜로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며, 오히려 믿는 자들은 남자의 수만 5천명이 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14절을 보면,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다.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5절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 에디오피아 장관이 우연히 성경을 읽다가 ‘선지자가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가질 때 빌립은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가르쳐줬다. 그러니까 14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무관한 별개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그리스도 예수였고, 그 자체가 복음이었다.

 

 

∙ 예수님이 증거될 것이다.

 

주님은 제가 기도하는 중에, 교회와 성도들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만 전하고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체험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이다.

 

요한복음에서 포도나무의 가지를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더 많은 열매,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교회에 남아있는 여러분은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복음을 확신하고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증거될 것이다. 가까이는 바로 나에게, 그리고 믿지 않는 가족에게, 더 나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유다에, 그리고 사마리아에 어떻게 증거된 줄 아는가? 예수가 유행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 때문일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증거되고 놀랍게 부흥성장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가 인기가 없고 예수님께서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들 생각한다. 그래서 복음을 증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도하기를 주저한다.

 

그렇다면 예루살렘도 마찬가지다. 유다도 마찬가지다. 사마리아도 덜하지 않다. 먼저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예수박해의 본고장이다. 예수님이 유행하거나 대접을 받고 환영을 받았던 곳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을 꺼리고 외면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이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함으로 전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증거된 동기를 보면 놀랍다. 먼저 사마리아는 원래는 이스라엘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떤 역사적인 이유로 그 지역에 대한 지역감정이 심한 곳이었다. 배척하는 장소였다.

 

예루살렘에 교회부흥의 역사와 은혜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낳았다. 자기 것을 내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서로 통용했다. 서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제일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순전한 공동체는 그렇지 않았다고 증거한다. 주님의 공동체가 제일 믿을만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우리 역시 그렇게 되기를 지향해야한다. 세상에서는 연약함을 드러내면 흉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 계기가 하나님의 자비(하나님의 형상)를 드러내는 기회가 돼서, 서로의 연약함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서로를 온전하게 매는 사랑의 띠가 되어주신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동기를 생각해보라.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을 통해, 내연이 외연으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확장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있었다. 바울은 예수도당을 색출하겠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참 신기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그 같은 사람도 변화시키셔서 이방 땅에 예수님이 증거되도록 하셨다. 사마리아에는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빌립에 의해서 복음이 증거되게 되었다. 고난은 복음이 증거되는 신비로운 기회요, 계기이다.

고난과 박해는 예수님을 인기 없게 만들고 복음을 시들게 만들 것 같지만, 아니다. 그 이름을 굳게 믿고 확신하는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역시도 이 시대에 그렇게 사용하길 원하신다.

 

다음 메시지 전개를 위해서 자세하게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약적으로라도 말해보자. 우리 삶의 자리에 어려움과 고난과 눈물이 늘 있다. 끊이지 않는다고 하소연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기회를 통해 복음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신다.

 

성경은 우리의 의지나 다짐 결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예비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에, 에디오피아 장관이 예수를 영접할 때, 바울에게 회심의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사건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미 주님은 벌써 전부터, 공생애 때,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셨다. 복음의 씨앗은 하나님의 일꾼을 만나 발아되기까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과 표적과 능력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무지한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부활의 주님은 그 역사를 이루신다.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표적과 능력과 이적을 보였고, 사도들도 예루살렘에서 동일한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6절에 보면 ‘행하는 표적’. 빌립의 능력이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도 여러 가지 표적과 이적을 보여주시고 역사하신다. 다만 마술과 같은 이적과 기적과 표적을 바라기 때문에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할 뿐이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오늘 본문에서 엿볼 수 있는 마술사 시몬의 거짓된 심령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 어려운 삶의 여건 속에서 기도하고 중보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주님께서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표적과 이적을 행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하심,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을 굳게 믿으라.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기도하라. 병마가 물러가고 상처받은 심령이 위로받고 회복되며, 괴롭게 하던 모든 것들이 어느새 봄눈 녹듯 사라지는 역사를 경험한다. 주님은 이와 같은 복음을 우리가 체험하길 바라신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표적과 이적을 일으키신다.

 

오늘 말씀에 우리가 진심으로 사모해야할 은총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기 전에, 이것을 배우자. 순종이다.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 자체가 순종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을 것이다, 혹은 예수님을 전하기 싫다,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사마리아의 상징이 그와 같다. 감정적으로, 심정적으로 이웃이 될 수 없고, 친구가 될 수 없고, 복음을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상관없는 사람들… 하지만 빌립이 복음을 전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순종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 그게 싫은지 좋은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증거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복음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만큼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을까? 주님께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하나님께서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를 얼마나 바라시고 원하실까? 주님을 사랑하는 이를 결코 주님께서 그냥 두지 않으신다. 그의 문제, 고난, 어려움을 그냥 두시겠는가? 주님께서 도우시고 능력을 주시고 채우시고 갚으신다. 여러분 복음을 체험하라.

 

∙ 성령 받으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가 이것을 체험하기를 원하신다. 무엇인가?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급파된 이유 보면 알 수 있다. 성령 받고 충만하기를 바라신다.

사도들 중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성령 받기’를 기도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을 체험하고 경험한 일이 없었다. 17절,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에 ‘성령을 받는지라.’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오해다. 기억하라. 특정한 사람의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기에 성령을 받은 것이다. 마술사였던 시몬은 그것을 오해했다. 시몬은 성령받는 일을 마술로 오해했고,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돈을 주고 살 수 있을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20).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를 원하신다. 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채워주시길 원하신다. 주님의 약속이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리라.’ 말이다. 하나님은 이시간 주님을 다시 영접하고 성령받기를 바라신다.

 

∙ 성령이 하시는 일

성령이 하시는 일은 어떤 것들일까? 쉽게 제자들, 사도들은 성령을 체험하면서 무엇을 경험했나?

1)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 베드로가 체험한 성령이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고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름이 덮이며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우리가 성령이 역사하고 임하는 지 어떻게 아는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고백되어지고 믿어진다면 이 시간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다. 그 때문에 느끼는 마음에 평강이 있다면, 여러분, 단언할 수 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다. 지금 이시간 주님은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음성을 듣고 마음에 확신이 있기를 원하신다.

 

성령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일이, 일회적인 사건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늘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러기에 항상 경험하고 믿음과 은혜를 채워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등불의 기름이 떨어진지도 모르고 졸고 있는 신부와 같게 되는 것이다.

 

2) 신앙인들의 갈등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옷을 입고 모양을 내보기는 하는데, 정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완전을 이룰 수 있을까, 주님처럼 살려고 하지만 늘 죄의 유혹 속에 범죄하고 불순종으로 낙심하기도 한다. 고민하기도 한다. 시험에 들기도 하고 영적인 갈등이나 방황을 겪기도 한다.

그런데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 닮게 하는 것 말이다. 성령을 경험하고 복음을 경험하면, 예수님 닮고 싶은 마음이 절로 불타오르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신비주의적인 마술이나 기적과 이적으로만 생각하려면 그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다. 마술사 시몬이 그랬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고 이적과 기적을 행했던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강요하는 종교단체들 대부분이 사이비나 이단이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복음을 체험하고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선물은 ‘변화’라고 하는 능력이다.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무협이야기와 같고, 마술적이고, 요술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을 체험하는 경험의 느낌은 유사할지도 모르지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고, 예수님을 믿다보니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에서 만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한 사건은 예수님 사랑하는 경건의 능력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지, 마술적인 능력이 아니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 가운데, 능력이 나타난 것이지, 성령의 능력은 마술적인 능력이 아니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 스데반, 바울을 보라. 예수님 닮으려고 했다. 그러기에 능력이 나타났다.

 

올 한 해, 예수 이름 부르면서, 성령을 체험하면서 복음을 경험할 것이다.

 

이 시간 주님께서 성령을 여러분에게 보내주시고 보내주시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목회자로서 여러분을 축복하며 기도하고 싶다. ‘예수’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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