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4. 주현절 후 3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맹추위에 옷깃을 여미며 가슴을 꽁꽁싸매는 때에, 주님께로 향하는 열정으로 주님을 예배하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은혜가 힘과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1:7)
0. 맹추위 세상
15년 만에 찾아온 맹추위, 세상도 그렇다.
# 정리해고 # 어린 자녀 학대, 살해
그런데 이곳 교회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길 원한다.
세상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녹이고, 세상에 나아가서 온기 있게 만들 수 있기를 원한다.
- 예수님 당시의 시대상
오늘은 말씀을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신앙적인 응답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활동은 헤롯 안티파스 때였다. 그가 했던 주요 사업들이 떠올랐다. 디베랴라는 신도시 건설, 갈릴리 부근의 염장산업, 그리고 화폐주조이다(크로산).
디베랴 건설에는 어떤 청사진이 있었을까? 명분은 세계화추세에 맞는 신도시 건설이었다. 실용성과 경제와 복지를 갖춘 명품도시였다. 극장, 경기장, 목욕탕, 도로. 하지만 거기에는 ‘로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실 그 목적자체가 로마에 헌사하고 충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디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라고 지은 것도 그렇고, 로마가 인정하고 원하는 인사들에게는 특혜와 혜택을 주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야했다. 폐쇄적인 계급이 강화되고 차별이 심해져 갔다. 얼마나 반칙과 야비함과 거짓이 난무했을까?
토지를 빼앗기거나 헐값에 저당잡힌 이들의 몰락을 짐작하는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경우(높은 물가_창47:14, 가축_16, 노동력과 토지_19)처럼 높은 세금을 매개로 그렇게 했다.
어업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은, 일찌감치 토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토지경제에 기반을 둔 사람들과는 달리 도시건설과 계발의 열풍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염장산업은 한파나 마찬가지였다. 얼핏 보면 부가가치를 높이고 경쟁력을 갖춘 신산업처럼 보인다. 물고기는 유통기한이 짧았다. 그런데 염장산업은 그 유통기간을 훨씬 늘려주었고, 수출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염장산업에 하청을 받아, 납품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다. 국가주도의 통제 아래서 높은 세금을 내고, 뒷돈 없이는 그 사업을 승인받을 수 없었고, 염장처리를 거치지 않은 수확물들은 곧 버려지곤 했다. 그러면 그 전에 헐값에라도 매각해야하는 처지가 됐다.
화폐주조사업은 실물경제를 화폐금융경제로 급속적인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더 강화시켜주었다. 풍성한 소출을 얻고도 헐값에 매각되는 일들을 가능하게 한 것도 그래서이다. 화폐는 보이지 않는 우상이다. 물질우상에 사로잡히자, 생명이 경시되고, 천시와 냉대가 만연했다. 양심이 마비되고, 이성이 길을 잃었다.
- 안식일과 왜곡된 신앙
주님은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주셨다.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 즉각 반발했다. 그에 대해서 주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주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내막을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한 게 아니다.
큰 모순이 있었는데, 주님은 그것을 보셨다. 안식일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다른 것은 생략하고 있었다.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안식년, 희년. 안식일은 이것들과 삼박자를 이룰 때,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안식년이 되면 부채상환을 탕감해줘야 한다. 경작지를 쉬게 하고, 그 소산물들은 가난한 사람이나 짐승들이 먹게 해야 한다. 희년이 되면 노예가 되었거나 종이 되었던 사람들을 풀어주고,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이 빚어낸 사회모순을 처음으로 돌리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가 담긴 계명이었다.
이처럼 중차대한 명령에 대해서 바리새인들, 율법교사들, 유대인들은 어땠을까? 지킬 마음은 없으면서,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정한 기준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거룩함’이라는 편협한 개념만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기에 이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이 괜찮다고 하는 것은 안식일에 해도 된다. 할례, 자기 가축을 살리는 일들. 자기 이익과 손해와 관련된 것들이다.
율법이 말하는 진정한 ‘거룩함’은 무엇인가? 물건과 습관에 대한 구별만 ‘거룩함’(/불결, 부정)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를 들면, 내년이 안식년이어서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할 위험이 있어도, 그의 절박한 사정을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을 때, 물질에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이 율법이 말하는 거룩함이다. 재물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어야지, 예수님 눈에는, 물질적인 욕심과 이기심에 있으면서,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은 외식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 수지와 마음에 대해 논함 #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물질에 가서 달라붙지 않도록 주의하라.)
세상은 얼마나 무자비하고 욕심 많은가? 이기적이고 자의적이며 강퍅한가? 마음을 물질에 이기심으로 바쳤기 때문이다.
율법의 핵심이자 근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는데, 주님의 눈에는 마음이 물질 사랑,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있으면서, ‘거룩’을 운운하는 것은 외식하는 자의 거짓된 모습일 뿐이었다. 예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가 없는 세계를 안타까워하셨다. 예루살렘 도시를 보시면서 우셨던 주님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오늘 말씀에서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억눌린 자’는 어두운 시대를 힘겹게 살아야 했던 이들에 대한 표상이다. 이사야 때도 그랬고, 예수님 때도 그랬다.
이 시대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떠실까? 동일하다. 하나님의 눈물을 주님께서 가장 먼저 이해하시고 이 시대와 함께 울고 계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말씀하셨다.
사정이 이러한데, 주님의 응답은 무엇일까?
주님은 안식일 회당에서 이사야 61장 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읽으셨다. 오늘 18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여러분, 시대에 낙심하지 말고, 우리 구주 예수님을 굳게 믿으라.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님은 복음을 듣기를 바라신다(v.18). 마음이든, 물질이든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길 바라신다. ‘포로된 자’, ‘눈 먼 자’, ‘억눌린 자’든 마찬가지이다. 달리 포로 된자, 눈 먼 자, 억눌린 자가 아니다. 물질에 대해서, 우리의 실생활과 사회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주님은 마태-누가복음 산상수훈을 통해서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산상수훈’에서 줄기차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청자들은 몰락했거나 그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암울한 시대의 어려움을 만난 이들이다. 세상에는 변화 가능성이 크게 없어 보였다. 거기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 이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도 들의 핀 꽃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신다.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풍성히 채워주시고도 남는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라.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떠시겠느냐고 용기를 주셨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복음을 듣고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 확신을 가지라. 그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외풍, 내풍이 불어도 무너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도우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고 보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는 말씀도 직설화법으로 들려온다. 천국에 대한 경험은 무엇일까? 천국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다. 여러분 왜, 주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신 줄 아는가? “헤 바실레이아 톤 아우라논” ‘하늘의(대한) 통치(역사하심)’ 천국에 대한 경험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도우시는 것에 대한 체험’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 성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확신하길 바라신다.
# 미국인, 일본인, 한국인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야만족에 붙잡혔다. 불법침입으로 곤장 100대씩 맞게 됐다. 다행히 추장이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미국인, 일본인, 한국인은 각자 한가지씩 소원을 말하게 되는데…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한들, 얼마나 지혜로우랴? 그러나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가장 지혜롭고 그 섭리를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 세상이 아무리 무자비하고 냉혹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그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우리를 품으시길 원하신다. 그 절대 사랑을 믿고, 믿음의 길 위에서 든든히 부요함으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억눌린 자, 자유하길 원하신다. 신앙의 눈을 뜨고, 용기를 얻고 힘을 내길 바라신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영접하는 자에게, 그 은혜가 공급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사랑이 식었던 우리가 뜨거워지기를 원하신다.
- 세상에서 십자가를 만난다 할지라도
젝 넬슨 폴마이어 라는 분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로마의 십자가 처형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선 ‘르네 지라르’라는 학자의 견해가 있는데, 그것을 예수님에게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 주장은 이것이다. 한 사회에 불평이 생기고 불안해지면 희생양에게 모든 것을 전가시킨다. 그것이 희생제의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통합과 결속을 이끌어낸다. 어느 사회든지 의미적 ‘희생양’을 통해서 그렇게 해왔다. 예수님을 시대의 희생양으로 적용한다.
그런데 폴마이어는 르네지라르의 견해를 예수님께 적용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그 사회는 로마의 식민체제 아래서 결속을 다질만한 공동체 형성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계급이 강화되고 차별이 심했다.
그렇다면 로마의 전략으로 내세운 십자가는 무엇인가? 로마가 반란이나 봉기에 대해서 의지를 꺾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처벌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과는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화목하게 하려는, ‘화목을 위한 희생의 어린양’이라는 종교적 표현 말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적용은 적당치 않다는 것이다. 처형당한 십자가를 모두가 보도록 세워놓고 공포와 두려움을 주어 절대 다른 마음 품지 못하도록 하는 로마의 전략이다.
그 전략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숨어서 두려워 떨었다. 자신이 발각되지는 않을지, 그 화가 자기에게 미치지는 않을지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가? 그 제자들이 거리로 나가 예수님을 용기있게 외쳤다.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셔서, 두려움과 염려와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주셨다. 그리고 평안을 빌어주시자, 제자들에게 그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자신감과 용기가 솟구쳤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공포가 사라졌다.
우리가 그 성령을 받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염려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이 솟구칠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꼭 죽어야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절망, 낙망, 두려움, 불안… 모든 것이 죽음의 경험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경험은 무엇인가?
세상은 매정하고 무섭다. 우는 사자와 같이 집어 삼킬 자를 찾는다.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도록 만든다. 사기를 꺾고 신앙의 의지를 꺾는다. 신앙생활해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런데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 심령에도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신다.
로마의 십자가가 사라졌는가? 아니다. 그대로다. 그렇다고 제자들의 의지와 사기가 꺾였는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대는 어떤가? 세상이 변했는가? 변하는가? 위험과 위협이 사라졌는가? 그러나 어떤가? 괜찮다.
제자들은 주님이 하시던 일들을 멈추지 않고, 주님의 사도가 되기를 자청하여 일했다. 오히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영접한 삶을 살기를 사모했다. 그래서 능력도 일어났다.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만약에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고, 숨죽이고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세상도, 자신의 삶도, 처지와 여건과 형편도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에 은혜와 힘과 용기를 얻고 세상에 담대해 나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처럼 하고자 했을 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주님은 오늘, 그 능력 믿고 세상에 나아가 승리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라신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희망의 말을 전하는 것이, 비록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큰 능력과 역사를 이루게 된다. 사람이 모르는 일이다.
마가복음 16장 15-18절을 읽어보자.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굴복하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고, 뱀을 집어 올리고 독을 마시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지키시고 이기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