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3. 신년주일

시간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 신년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희망을 가득 안고 새해의 첫 단추를 채우는 신년주일에,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중심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주의 은혜대로 하심이라.”

 

<영상_자료실>

https://youtu.be/gzs1qyACUME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에 대해서, 성도들에 대해서 ‘신부’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찾아오시는 기쁨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설계자이시다. 주님을 맞이하고 영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이 특별하다. 주인공처럼 말이다.

어떻게 많은 성도들이 영상의 주인공처럼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사변적이다. 주께서 우리를 맞아주실 때, 적어도 개인이 경험하는 환희는 이와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 다른 예를 찾아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품을 떠났다가 탕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라. 아버지는 그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하면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게 했다. 풍악이 울렸고 춤추는 소리가 들렸다.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게 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게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성대하게 맞아주었다.

 

제가 주님을 만나고 경험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도 이랬을 것이고,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도, 모양은 달랐다 말해도 그의 속사람이 경험하는 감격은 이랬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의 의지와 확신을 묻는 시험적인 물음이라기보다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지라도, 사실은 주님의 프러포즈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경험하라고 누차 말씀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를 이처럼 맞아주시고 사랑하신다. 복음을 경험하지 못하면, 주님의 사랑이 개인의 공로와 의지와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아니 복음을 듣지 못한다.

 

제가 올해 받은 말씀은 디모데후서1:9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목회의 방침과 가르침을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셨다. 2016년 한 해, 우리 모두가, 문정포도나무교회에 속한 믿음의 권속들 모두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믿고 복음을 경험하길 바라신다. 그 비결은, 행위가 아니요 은혜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으니까, ‘어쩜 이렇게 주님께서 제게 합당한 말씀, 듣고 싶었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주셨는지’ 모른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주님의 사랑 속으로 부름을 받았고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올 한 해, 우리가 어떻게 복을 받고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을까?

 

  1. 미련한 신부와 슬기로운 신부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다. 비유의 맥락을 잘 알아야지, 엉뚱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열 처녀가 등장한다. 다섯은 미련하고 나머지 다섯은 슬기로웠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 과연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의 분깃점이 무엇일까? 미련하다고 하는 것과 슬기롭다고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깨어 있는 자와 잠든 자? 미련한 자는 어리석어서 영적으로 잠들어 있고, 슬기로운 자는 현명해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를 말하는 것인가? 이미 이에 대한 말씀은 여러 차례 드렸다. 5절을 보라.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미련한 자든, 슬기로운 자든, 졸고 있었다. 그러니까 깨어있음과 잠들어 있음은 그 분깃점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등불과 기름의 준비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흔히들 미련한 여인들은 등불은 있으나 기름이 준비되지 않았고, 슬기로운 여인들은 등불과 기름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졸 수 있지만 기름이 준비되어 있는 신앙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것도 아니다. 9절에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이 말의 전제는 기름의 양이야 어떻든, 기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등불을 켤 수 있는 기름은 있었다.

③ 이런 생각을 해봤다. 아내가 따뜻한 음식을 준비했는데, 남편이 늦게 온다. 어느새 국이며, 밥이며, 음식이 다 식어버렸다. 남편이 왔는데, 음식이 차다. 그렇다면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언제 음식을 준비해야 지혜로울까? 남편이 곧 온다고 해서 음식을 준비했는데, 예상보다 늦게 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예상보다 빨리 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빗대서 이런 식으로 가정해보자.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고, 주님이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졸음이 와서 잠을 자더라도 등불을 켜놓고 잠을 잤다. 오는 것 같아서 불을 켰다가 아니라서 다시 끄고, 또 오는 것 같아서 불을 켰다가 다시 끄고…. 잔뜩 긴장을 하면서 이런 식이 반복되다 보니, 기다리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하도 신랑이 오지 않아서 어느새 기름이 거의 줄어들어버린 것이다. 반면에 태평히 잠자던 다른 신부들이 그제서야 등불에 불을 켰다. 물론 가득 채운 기름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늦게 온 신랑이 그것을 몰라주고, 기름을 다시 사러 간 사이에 혼인 잔치의 문을 닫아버리면 얼마나 야속하겠는가? 물론 가정이지만, 저는 이 미련한 처녀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을, 이런 가능성 때문에 함부로 정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생이나 신앙생활에서 이런 일들을 겪는다. 처음부터 열심히 쭉 그것을 해오던 사람과 이제 막 그것을 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교롭게도 처음 사람이 낭패를 보고 나중 사람이 기회를 얻는 경우 말이다. 여러분 흔히 말하는 ‘가나안 성도’들 중에는 과거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던 사람이 많다. 이것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은가?

 

; 여담이지만 요즘 대형교회에 이런 현상이 있다. 예전 선배 목사님들은 예배할 때에 사정이 생겨서 교회에 나올 수 없으면, 가까운 곳에서라도 꼭 예배당에 나가 예배를 하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대형교회가 앞다투어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 물론 대형교회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것이 바른 것인가 생각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 그 교회의 예배를 방송할 테니,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나 TV로 예배해도 무방하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예배로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기가 찬다. 사람이 인정해서 인정되고 아니어서 아닌가? 하나님께서 인정해야 인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해돋이를 보러 여행을 가면서 그 차안에서 방송으로 송구영신예배를 드렸단다. 이 역시 ‘가나안 성도’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적용돼야 할 것 같다. 나의 세상적인 기쁨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겸할 수 없다.

 

아무튼 과거에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예배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신앙인들이 많다. 물론 상처 때문일 수도 있고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그랬는데, 지금은 역전현상이 크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주님은 여러분이 신랑을 맞이하는 슬기로운 신부처럼 깨어있기를 바라신다. 혼탁한 시대, 영적인 가르침이 혼탁하고 진리가 혼탁하고 본과 말이 전도된 때에 말이다. 깨어있는 비결은 어렵지 않다. 자 살펴보자.

 

  1. 깨어있으라.

13절을 보면, 5절에서 열 처녀 모두 졸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주님은 비유를 매듭지으면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졸고 있었지만 기름을 준비했던 사람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 혹 이런 신앙적인 명제를 세운다면 얼마나 말장난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영적으로 졸고 있으면서 신앙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한가? 앞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를 정죄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는 그래서 그렇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난 번 시계와 시계공의 비유를 말씀드렸던 것처럼 고장난 시계가 돌아가고 있어야 수리공이 왔을 때,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미련한 다섯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없었던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그 때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이 더 클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기름이 충분한 처녀들은 그 알 수 없는 때에, 기름을 낭비하지 않고 운 좋게 신랑을 맞이한 것 밖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교훈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깨어있으라. 그 때와 시기를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 주님의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 미련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 한 해의 기도제목과 소망들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어제까지 잘 버텼는데, 오늘 실망하고 낙망하여 포기했더니,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쩌겠는가?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하고 버텼으면 좋았을 텐데, 다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무엇이 졸게 되는 것인가? 영적인 실망, 낙담, 포기, 상처, 자기 뜻, 주님의 섭리에 둔감함… 이런 것들이다. 그러니 여러분 올 한해 늘 깨어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길 축원한다. 주님께서 그 길에서 도우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길 원하신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를 가르는 분기점은 무엇일까? 어쩌면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 처녀의 미련함은 이것이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그 시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한 것도 미련함이지만, 결정정인 것은 이것이다. 기름이 줄어든다는 것, 그 너무나 평범한 사실,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신앙적인 어리석고 미련함이 무엇인가? 나의 열심을 불태우기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이 뭐라고 말하는가? “우리의 등불이 꺼져가니…” 안타깝고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이다. 그러기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기름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늘 깨어서 준비하고 채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제가 올해 받은 말씀, 디모데후서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 채워야 하는 슬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앞에서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복음을 경험하고 체험적인 믿음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사모하며, 믿으라. 주님은 사모함으로 구하는 자에게 허락하신다. 누차 드리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약속이다.

 

공관복음서는, 악한 자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러지 않으시겠느냐고 주님께서 확신을 주셨다. 구하라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요한의 복음도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행위와 공로와 노력 이전에 성령님을 보내주신다. 성령을 주신다. 신령한 은혜로 기름 부어 주신다. 그 은혜를 사모하라.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임재의 자리를 사모하라. 우리 교회에는 그런 분이 없으시지만, 혹 다른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자신들은 인터넷이나 TV방송으로 집에서 편안하게 예배할 수 있다고, 그런 시스템을 갖춘 교회라고 자랑하는 것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는 주인공이요, 복음의 감격과 기쁨과 환희를 체험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 시간 우리가 같이 부르며 은혜 받기를 원하는 찬양이 있다. <예수>

 

우리 같이 소리 높여 부르고 난 뒤에, 기도하자.

 

주님, 올 한해, 열심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게 하소서.

늘 깨어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채우는 자 되게 하소서.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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