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예배
- 매듭
마무리를 짓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 참 중요하다. ‘마무리’를 지으면서 후회, 반성, 아쉬움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한다. ‘시작’을 통해서 기대, 바람, 소망을 가지고 미래에 용기 있는 첫 발을 내딛는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격언들이 있다. ‘유종의 미’, ‘시작이 반이다.’
요즘 현대인들이 그 매듭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지금 이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 매듭의 시간이다. 2015년을 보내고 2016년을 시작하는 기점에 서 있다. 굳이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마만큼 결단과 각오를 굳게 하라는 이유에서다.
- 아픈 상처와 고통이 있는 분들에게는 주님의 치유를….
- 실패와 절망이 있던 분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용기와 도전이 있기를…
- 상실감은 그리움을 지나 주님의 영광으로…
이나명 시인, 보기에 참 아름다웠다.
숲길로 들어서니
나무마다 훌훌 잎을 벗어내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의 발에 밟혀 벗겨진 땅이
차곡차곡 덮여 있었다
‘숲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그의 돌아봄의 시간이다. 거기서 역설을 발견한다. ‘사람의 발에 밟혀 벗겨진 땅이 차곡차곡 덮여 있었다.’ 수풀에 길이 나 있었다는 뜻이리라.
제 각각 안의 길을 트고 있는지
여름 내내 진액 흐르던 상처자리도
아물어 단단히 굳어 있다
상처들 몹시 앓았던 그 때의 흔적이
선연하게 툭 불거진 형태로 남아있다
아마도 몹시 방황했으리라
그때, 길의 방향도 바꿨으리라
곧게 뻗은 나무기둥 중간 쯤 바로
그 상처자리에서
몹시 휘어져 있었다
그쪽 방향으로 가지들도 몇몇 더
갈라져 나갔다
내게는 나무의 휘어진 몸 그 굴곡이
보기에 참 아름다웠다
단순히 감상적이고 상투적으로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는 시가 아니다.
‘그 때, 길의 방향도 바꿨으리라’ 방향변경, 휘어짐, 갈라짐이 없다면 나무는 초라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고통, 아픔, 상처가 있지만 그 자리에서 삶의 방향, 목적이 변하고, 견디며 휘어지고, 모색하며 갈라진다. 그러면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진다.
요즘 리메이크 돼서 유행하는 노래가 있다. ‘그대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픈 기억들 모두 가슴에 묻어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슬픈 얘기들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여러분의 매듭이 유의미한 시간 되길, 주님께서 바라신다.
- 안식
질문 자체가 어리석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천지창조 중 어느 날을 가장 좋아하셨을까? 인간중심주의적인 성경해석자들은 여섯째 날을 말한다. 다른 날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vs. 4,10,12,18,12…) 그런데 여섯 째날에는 사람을 지으시고 복주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 ‘심히’라는 말이 포함돼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말하지 않은 둘째날은 안좋았던 것이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셋째날은 배나 좋았던 것인가? 31절에서 인간을 지으신 여섯째날에 대해서 만이 아니라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일까? 제 7일, 안식하셨다고 하는 날이다.
안식일에 대한 바른 이해.
① 쉬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날짜나 요일도 본래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② 안식일은 매듭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복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의 섭리, 창조 모든 것이 복됐다. 그런데 그것은 흔히 망가지고 더러워지고 상처를 입고, 손상을 입기도 한다. 오염되기도 한다. 그렇던 것을 다시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기회가 필요하다. 쉼과 안식에는 그런 힘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의 섭리를 안식이라는 것으로 매듭지으신 것이다.
③ 생각해보라.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사람들, 강자에게 서러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고달팠던 사람들… 자녀와 손자를 비롯해 다음 세대가 걱정이 되고, 서글펐던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섭리와 모습을 생각하며 고달픈 삶을 이겨갔다. 안식일을 통한 매듭의 정신은 어제와 오늘을 새롭게 내일로 이끌도록 했다. 저주받은 인생, 삶, 모습이 안식일 정신에 깃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복되고 하시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④ 그러자 처음 바벨론의 삶은 척박하고 황량함 그 자체였으나 점차 자리를 잡고 형통함으로 나아갔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 같은 인물들이 나왔다. 느헤미야, 에스라, 에스더, 스룹바벨 등 그 척박한 토양 속에서 영향력 있는 걸쭉한 사람들이 배출됐다.
안식하며 복되고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자, 그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라는 율법 법령 속으로 편입됐다.
요컨대 안식일은 요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되고 거룩하게 하시며 새롭게 일어나 형통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쉼표요 매듭이다.
그러기에 오늘 이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이런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있는 날이다. 오늘이 중요한 인생의 분기점이 되고, 변곡점, 전환점, 갈라짐의 시간이 되고…
지나간 날은 후회없이 사랑했다 말하과,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작정하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께서도 바라신다. 결단과 믿음이 있기를 말이다. 내년에도 역시 고된 삶, 반복적인 삶, 시간이 무지하게 빠르게 여겨지는 날이 지나가겠지만, 복되고 거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음을 믿으라.
- 거룩
- 3 ‘거룩하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이 ‘거룩’을 망가뜨리고 불결하고 부정하게 만든다. 착취, 촉력, 욕심… 죄가 그렇게 만든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거룩하길 바라신다.
창세기1:28은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축복이자 사명이며 명령이다. 복되고 거룩하길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28절처럼 돼서 거룩한 경우가 있는가하면, 28절처럼 하면서 거짓되고 망련된 경우도 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은 거룩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다시 잊지말고 기억해야 한다.
굉장히 의아한 대목이 있다. 성경에서 형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그것은 우상을 지칭하는 말과 관계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형상을 깎아 만드는 것이 우상이다. 달리 말하면 우상은 사람이 형상을 깎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예외적인 대목이 딱 한군데 있따. 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마네킹이나 인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숨쉬고 느끼고 영혼이 있는, 생명이 있는 인간, 사람이다. 그에게 이 용어를 쓰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모습은 사람이 깎아 만든 형상, 곧 우상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서는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①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니라.’(요일) ② 거룩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③ 말씀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
새해 거룩함으로 나아가자. 예배, 말씀, 구제와 봉사 등등 더 열심히 하자.
평강을 주시나니 형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