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7. 송년주일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송년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빗장을 잠그고 들어가는 집 주인처럼 한 해가 마무리 지어지는 날에, 한량없는 은혜로 일으켜 주시고 감싸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내년에는 더욱 더 충성하기로 결단하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중심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

 

 

  1. 고난의 궁극

2015년 마지막 주일, 송년주일. 다사다난했다. 고통없고 문제없는 사람 없다. 모두 나름의 이유로 어려움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원래 그런지도 모른다. 불교는 모든 생명과 그 삶은 고(苦)라고 봤다. 맞을지도 모른다. 생로병사 모든 것이 고통이다. 기독교 역시 인간의 원죄; 불순종으로 인해 그 결과, 죄가 세상에 유입되어 고통받게 되었고 죽음과 사망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 한, 그 어떤 고통도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우리의 한 해에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또 새해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테지만, 하나님의 기묘한 섭리와 역사를 믿으라.

십자가 뒤에는 부활영광이라는 최후승리가 있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최후승리와 영광을 깨닫는 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내하기를 바라신다. 연단을 통해 소망을 이루기를 바라신다.

 

수요일 예배에 드린 말씀인데, 너무 중요하기에, 못들으신 분들을 위해 다시 말씀드린다.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때가 언제일까?

애굽으로 팔려갔을 때? 보디발의 아내에 대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그는 풀려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창세기40:23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만 2년이 흘렀다. 이 기간은 침묵기이다.

애굽으로 팔려갔을 때,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하는 일들마다 형통했다. 뜻대로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되더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광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는 하나님도 침묵하시는 것처럼 여겨졌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다시는 석방될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세월을 보냈다. 사실 평범한 일상이었을 뿐인데, 기대가 꺾이고 절망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침묵도 무겁게 느껴진다.

 

오늘 시편의 고백을 보면 찬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천사들도,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그리고 자연과 동식물, 처녀·총각, 노인·아이 모든 존재와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할 대상들이다. 창조주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명령이기도 하고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 찬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

그런데 우리 삶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찬양을 잃을 뻔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명령과 당위성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데, 하라고 해서 되지 않는다. 감동이 있어야 하고 고백이 있어야 진심에서 우러나온다. 체험은 찬양을 더욱 값지게 해준다.

 

반문들: 전월세 가격이 오르고, 사교육비 때문에 힘들다. 가계경제가 휘청거리고 장사가 되지 않는다. 희망퇴직의 명분 속에 강퇴당하는 억울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갑질하는 무례한 고객 때문에 감정노동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사람을 얕잡아보고 찍어 누르는 사회현실을 경험하노라면, 하나님보다 세상 힘이 더 세 보인다.

 

속상한 일이 많아서 마음이 상했는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해보면…, 쉽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반문이 들 수도 있다. 요셉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그 2년의 그 시간은 어땠을까?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상을 주시며 복주신다고 하는 위로의 말도 허언처럼 들릴 때도 있다. 13절 고백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뛰어나다고 찬양하는 것도, 현실 속에서는 추상적인 것이나 관념처럼 받아들여진다.

 

강자들의 횡포와 전횡 때문에, 세상의 폭력과 악 때문에, 고통받는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경배하라는 것은 한가로운 소리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1. 찬양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데 아시는가? 찬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단순히 노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찬양을 받을 수는 있어도 찬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 시편의 고백을 묵상하며 번뜩,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대해 반하는 그룹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깨달음이 왔다. 그들은 대단히 위험한 사람들이다.

여러분 만약에 고대 이집트의 제사장들이 3절의 고백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이집트는 ‘아몬-레’라는 이름을 가진 태양신을 섬겼다. 이집트의 신학자들과 제사장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바로 왕을 절대화 하고 신격화했다.

또 수메르의 거대문명은 제사장들이 3절의 말씀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는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오랫동안 달신을 섬겨왔다. 그 신앙에 기초한 메소포타미아 제국을 세웠다. 그 안에서 고통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한다.

우가릿에서 발견되는 얌(바다)이라는 신이 강의 신들과 폭력을 휘두르며 자기주장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킨다. 세상은 고집 세고, 막무가내로 구는 사람들의 것처럼 여겨진다.

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바벨론의 최고의 신은 마르둑이다. 티아맛이라는 신은, 젊은 신들이 세상에 소동을 일으키자 죽이려고 한다. 마르둑이라는 신이 태어나는데, 티아맛과 싸워서 이긴다. 마르둑은 티아맛을 반으로 갈라 한쪽으로 하늘을 만들고, 다른 한쪽으로는 별자리들을 세워 신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삼았다. 킹구라는 신이 티아맛을 편들었다고 해서 그 피로 인간을 만들어 신들이 하던 일을 하게 했다. 이것이 바벨론의 신화다. 세상은 폭력과 전쟁의 신들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모습이 끊이질 않는다. 힘은 곧 정의이고 진리이고 전부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여기는 세계관이다.

고대 근동에는 만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시편 148편에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던 모든 대상들이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바다, 용, 불, 우박, 눈과 안개, 짐승과 새들. 그 신학을 바탕으로 왕은 자신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했다. 그것을 신인동형론이라고 한다.

 

이런 우상종교의 제사장들이나 권력의 당사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었을까? 자신을 우상화하고 권력화하며 세계를 자기지배질서 아래에 두려고 했던 왕조와 왕과 권력들은 이 고백과 찬양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곧 자신이 신이 되고, 법이 되고, 우상이 된다.

 

그런데 창세기의 선언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만드신 것이다. 해와 달과 별과 바다, 불과 우박 눈과 안개, 산과 과수 모든 백향목,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지으셨다. 피조물일 뿐이다. 그리고 수많은 신화들은 인간이 만든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피조물일 뿐 찬양받을 대상이 아니다. 성경은 형상을 깎아 만든 우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상과 형상은 같은 것인가? 다음 주 설교에서.) 그것이 창세기의 선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바로 일깨워주는 진리이다.

 

 

  1. 황제찬미 vs 예수찬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신앙인들의 찬송은 로마제국에 가장 강력한 도전이 됐다. 당시 로마의 신학은 그리스도는 오직 황제뿐이다.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2장에는 그리스도의 찬가가 나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르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이사(로마황제)가 아닌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찬미하는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 자체로 반역이었다.

 

믿음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예수님도 사람이셨는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절대화 하는 것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 세상의 왕들과 우상은 힘과 권력과 부를 절대화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낮아지심을 통한 섬김과 사랑의 완성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의 완전’이 나타났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참능력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사랑을 체험하고 고백할 수 없는 사람에게, 예수는 아무 의미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을 체험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부활하셔서 내 인생, 여러분 인생 가까이 다가오신 주님에 대한 경험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애 곁에 찾아오시고 힘주시고 능력주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늘 주님을 영접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1. 찬양아 아파도 찬양하라

오늘 시편의 고백은 힘을 최고의 가치요, 진리요, 정의라고 믿는 이들에게 무엇을 일깨워주는가? 시험에 들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일깨워 주는가?

 

높은 데서 찬양하라(1).

오늘 시편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찬양받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음이 좋을 때 아름답게 찬양하는 것을 요구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왕들도 그 군대도 하나님을 찬양할 대상이지 찬양받을 대상이 아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결코 절대화하거나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우상이다. 찬양은 단순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노래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믿음에 대한 고백이다. 세상 위에 더 높으신 존재가 계시다는 것 말이다. 피조물을 지으시고 창조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 찬양이다. 우리가 우상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거나 어려운 이유이기도 한다. 사람을 괴롭히고 상처주고 함부로 했던 사람은 그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누군가의 교만과 오만 때문에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당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어렵다면, 그 교만한 자 위에 우리 주 하나님께서 계심을 기억하라. 절대적인 힘과 권력 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 사람에게 못되게 굴고 힘으로 짓누르고,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광포한 사람 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

 

피조물이 대상이 아니다(5).

피조물의 명령을 듣는 자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피조물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찬양은 세상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종처럼 굴며 굴종의 삶을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백성됨과 구속하심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은 하나님께 있다(13-14).

저는 이 대목에서 인생의 궁극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드러난다. 삶이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생활이 힘들고 속상한 일들도 겪지만, 그래도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백하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 이길 힘을 주셔서 이기게 하시고, 피할 길을 내셔서 복된 길로 인도하시며, 최후 승리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착실하고 신실하게 자리를 지키고 믿음을 지키다 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사용하시는 때가 온다. 요셉이 만 2년 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하는 자리로 나가, 일순간에 총리가 됐다. 어쩌면 우리 삶 속에 침묵과 연단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준비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까지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찬양이 아파도 찬양하라. 인생의 궁극은 고난이 아니라 ‘창조주’되시고 ‘승리주’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14절은 그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다고 고백한다. 아무리 세계가 마르둑이 만든 힘과 전쟁과 광포함이 판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혼돈을 질서로, 어둠을 빛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송년주일, 다사다난했던 한해다. 2016년은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는 한 해가 될 줄로 믿으라.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한 걸음 더 성취되는 역사가 될 줄로 믿으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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