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설교

참 세상이 시끄럽다. 연일 듣지 않아도 될 진실공방을 듣고 있다. 개인의 사적인 것은 사실 우리가 관심 갖지 않아도 될 일인데, 노상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그런 것이다. 불우한 소식도 많다. 11살짜리 아이의 참담한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가슴 아팠다. 이웃주민들은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을까? 그 아이가 있는지도 몰랐다고들 했다. 그런데 밝혀진 사실은 기가 막히다. 여름 내내 아이는 울부짖었다. 그 무더위에도 창문을 열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단순히 혼낼 때 우는 소리가 아니라, 잡아죽이나 싶을 정도의 울부짖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의 일이라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구조조정의 압박을 받는 지인들이 그 고통을 호소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옆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가 실종이 됐는데, 나중에 죽어서 돌아왔다. 강압적인 지시와 명령을 내려놓고 그책임을 떠넘겼다. 정말 밥값도 못하는 사람들이 누군데, 열심히 일하고 성실했던 착한 사람들만 어려움을 당하는 실정이다. 언론은 아주 특수하고 예외적인 단편의 사건만 들어서 기업의 편을 들고 있는 것 같다. 서민들은 주거문제로 걱정하고 전세난, 높은 월세로 고통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고통 받고 신음하는 소리들이 너무 많다.

 

‘빈방 있습니까?’라는 연극작품이 있다.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한다. 그것을 한국의 최종률 씨가 대본을 쓰고 극으로 만들었다. 1980년부터 지금가지 사랑받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약간 지진아였던 덕구(빌리)에게 여관주인 역을 맡겼다. ‘빈방 없어요.’ 이 한 마디 대사였다. 지도 선생님은 덕구에게 성취감과 자신감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연극이 시작되고 마리아와 요셉이 출산을 위해 여인숙을 찾는다. 이제 덕구의 대사차례가 왔다. ‘빈방 없어요.’ 한 마디면 된다. 그런데 덕구가 대사를 못하고 혼란을 겪으며 얼굴표정이 오락가락했다. 모두가 조마조마했다. ‘덕구 때문에 연극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덕구는 어렵게어렵게 ‘빈방 없어요.’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대본대로 뒤돌아 가려고 했다. 덕구는 더 훈란스로운 표정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가는 마리아와 요셉을 붙잡으면서, ‘우리 집엔 빈방이 있어요. 정말이예요.’라는 것이었다. 대본에 없는 내용이었다. 연극은 망쳤고 아이들은 덕구를 원망했다.

그런데 객석에서는 훌쩍훌쩍 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연극을 지켜보던 꼬마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제 2, 제 3의 덕구가 돼서, ‘우리 집에도 빈방 있어요.’ 외치는 것이었다. 덕구(빌리)의 순박한 마음은 닫혀있던 이들의 마음을 열게 했고, 감춰져있던 빈방을 끄집어내게 되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빈방이 있는가? 사람들의 마음에는 예수탄생을 함께 기뻐할 빈방이 있는가?’ 이 물음은 끊이질 않는다. 그 빈방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미움과 불신과 갈등에 빼앗기고, 나눔이 있어야 하는데, 욕심과 탐욕과 이기심에 잃어버렸으며, 또 그 빈방에는 평화가 있어야 하는데, 분열과 전쟁과 폭력에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그리스도의 나심을 위해 찾아왔다. 만왕의 왕이요, 온 우주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을 알리는 별이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아기 예수의 탄생을 물었다. 그 때에 성경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전하고 있다. 큰 소란이 있었다. 메시야의 탄생 예고를 듣고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예수님 당시에 빈방이 없던 사람들, 사회전체가 시끄럽지만 그 시끄러움을 묻어두고 숨기고 살아야 했던 시대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의 탄생사건이 단 일회적인 사건일 수 없는 이유다. ‘오늘 우리시대의 시끄러움 속에 아기예수 탄생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어떤 소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보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사9:6)

 

아기예수의 탄생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와 평화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그 지역에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한 밤중이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나 주의 영광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어 주었다. 조명기구와 같은 그냥 빛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어떤 빛인가? ‘주의 영광의 빛’이다. 그 빛이란 그리스도로 오신 아기예수를 알게 해주는 빛이다. 헤로데가 아기예수를 찾아서 죽이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유아살해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말이다. 그렇게 확신한다.

동방박사들이 별빛을 보고 알았다면, 목자들은 메시야로 오신 아기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빛이 비취었다. 그 빛이 비추자, 무서워 떨 때에, 천사의 음성이 들려온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광경을 봤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천상과 우주의 하모니였다. 그 노래가 목자들에게 울려 퍼지자, 그들은 가서 아기예수를 찾아 경배했다. 천사들이 말한 대로 강보에 싸여있었고 구유에 뉘어있었다.

 

왜 구유에 뉘어 있었을까?

인간이 아무리 교만해도 하나님은 그 교만을 꺾으신다. 아무리 강포한 자가 힘으로 힘없는 자를 괴롭혀도 그 힘은 하나님의 손에 꺾이고 만다. 아무리 욕심 많은 부자가 탐심으로 남의 것을 빼앗고 괴롭혀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은 인간이 막을 수 없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요셉과 마리아가 왜 빈방을 찾지 못했을까? 가이사가 각각 호적을 하라고 영을 내렸다. 그래서 베들레헴에 오게 됐다. 흔히 그가 늦게 와서 빈방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셉은 다윗의 가문이다. 이스라엘에 그렇게 위대하다고 떠받드는 왕의 가문이다. 5절은 해산의 때가 차서 베들레헴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임신 중에, 초기나 중기쯤에 간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6절 ‘거기 있을 그 때에’ 미리 와 있었고, 해산할 날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빈방을 구할 수 없었다. 어쩌면 로마의 식민지배질서체제가 만들어 놓은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몰락하게 된 백성들의 아픔과 설움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는 누군가를 위해 내어줄 빈방이 없었고, 또 빈 방을 구할 수 있는 처지와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있었다. 게으르거나 무능력하거나 준비가 안돼서가 아니라,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처지와 형편 말이다. 여기서 ‘여관’은 지금의 여관이나 호텔이 아니다. 당시의 모습으로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내준 다락방 같은 것 말이다. 길 가는 나그네에게 손님 대접하기를 주의 사자가 다녀가듯 해야 하는 전통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형편이 어렵고 처지가 어렵다보니까,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구유에 뉘었다는 것은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 우리식의 마구간을 떠올리면 안 된다. 주막이 있고, 마구간이 따로 있어, 거기에서 볼 수 있는 구유가 아니다. 유목민의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유목민들은 크게 텐트를 치고 거기서 잠을 자고 생활을 한다. 말이나 낙타를 따로 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텐트 안에서 먹이를 먹이고 생활했다. 목자들은 자기 양떼를 지키러 나갔고 텐트는 비어 있었다. 그런 자리라도 내준 목자들이 고마웠다.

밤에 홀연히 나타난 천사들의 말을 듣고 찾아왔다. 동방박사들이 보배합을 열어 아기예수를 찬미하고 있었다. 목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고맙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 동방박사들도 목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감격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구속의 자리는 구유라고 결코 폄하되거나 막을 수 없다. 추함은 아무리 능력있고 힘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아름다움 앞에 맥을 못추고, 거짓은 아무리 아름답고 선해보인다고 할지라도, 진실 앞에 맥을 못춘다. 어둠은 빛을 만나 캄캄함이 물러간다. 이 때문에 오늘 아기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며 힘과 위로를 준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이며, 받아들이고 영접할 것은 무엇인지를 통해서 말이다. 빈방이 없다면 마구간이라도 내줘서 말이다.

 

자칫 이렇게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휴머니스트들의 감상적 접근 말이다. 소외되고 낮고 천한 인간을 위해서 비천한 곳을 택해서 탄생하신 것처럼 미화하기를 즐긴다. 사실 마구간보다도 더 험한 곳에서 태어난 성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베이비 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도 있고, 입양 보내진 아이들도 있고, 그들 중에서도 훌륭한 인물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이 다 헤아리고 측량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아기예수 그가 누구이며, 왜 우리에게 오셨는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영역 안에 속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사실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사건이다.

아기예수님께서 구유에 뉜 것에 대해서 그 누추함의 여부는 사실 두 번째 문제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해야 한다. 동방박사의 말을 들은 헤롯은 이렇게 대답한다. 마태복음 2장 7-8절을 보라.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로데 왕이 결코 아기예수를 찾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숨기시고 막으시고 돌보시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듣고 다른 길을 통해서 고국으로 돌아갔다. 요셉과 마리아는 애굽으로 피했다. 헤롯은 속은 줄 알고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죽이게 했다.

헤롯이 미행하는 사람이나 비밀요원이 따라 붙게 한들, 구유에 누이신 아기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숨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간파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뜻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함이다. 전쟁 속에서 평화를 구해내고, 죽음 속에서 생명을 구해내신다. 질병에서 강건함으로, 어둠 속에서 빛으로 불러내시고, 가난과 질고 속에서 부요함과 풍성함으로 구해내신다.

 

동방박사나 목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셨다. 비록 구유에 뉘었지만 아기예수 탄생 속에 그리스도의 빛을 발견하는 눈이 열렸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 은혜를 허락하신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 역시 그 눈이 열리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맞이하여 경배하기를 바라신다. 그 속에 일어나는 놀라운 신비와 은총이 우리 안에 가득하길 바라신다.

 

저는 이런 소박한 꿈을 꿔본다.

저는 이렇게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난 것처럼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기 잘도 잔다.’ 이 잠을 이루도록 지켜줄 수 없을까? 세상이 시끄럽고, 세상이 요동하며, 소동이 일어나도 아가는 평안히 잠을 잔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평화로운 잠은 능력이다. 풍랑과 광풍이 불어 배가 뒤집힐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잠을 주무셨다. 그 평강이 바람과 바다라도 잠잠케 했다.

맘 편히 잠을 잘 수 없고, 외풍과 내풍에 단잠조차 잘 수 없는 이들의, 가뿐한 잠을 지켜줄 수 없을까?

아기예수의 잠을 지켜주는 것,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일까? 이보다 더 큰 평화의 꿈이 있을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로다.’ 천사의 찬송처럼, 아기예수를 바라보며, 이런 소박한 평화야 말로 참 평화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단 잠의 평화, 그것을 지키는 사명으로 주님은 아기예수 탄생한 곳에 우리를 보내셔서 경배하게 하신다. 또한 여러분이 그 단잠의 평화를 누리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목자들처럼 동방박사들처럼 그 은혜가 가득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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