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29. / 강림절 첫째주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첫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덮으며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계절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지친 몸과 영혼을 맡기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0. 믿음의 약속

이시간 고마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축원한다. 믿음으로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축복된 말씀을 들으시고 위로와 평강이 넘치길 소망한다.

 

웃고 시작하자.

집에서 남편과 자녀들을 기다리는 주부가, 늦도록 귀가하지 않자 문자를 보냈다.

아내 :  당신 어디야 ? 왜 안 들어와?

남편 :어, 나 지금 거래처에 있어. 좀 늦을 것 같아.

엄마 :  큰 아들 어디야 ? 왜 안 들어와?

큰아들 : 어, 나 지금 교수님댁에 있어. 좀 늦을 것 같아.

엄마 :  작은 아들 어디야 ? 왜 안 들어와?

작은아들 :어, 나 지금 도서관에 있어. 좀 늦을 것 같아.

 

이들은 연말에 진짜 있던 곳은 어디일까?

거래처에 있다던 남편이 있던 곳은 이곳이다. (사진)

교수님댁에 있다던 큰 아들이 있던 곳이다. (사진)

도서관에 있다던 작은 아들이 있던 곳은 이랬다. (사진)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강림절이 시작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때가 되면 망년회다 송년회다 하며 회식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연말 분위기에 들떠서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간들을, 한해를 잘 마무리 하고 새해 소망을 믿음으로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을 통한 역사하심을 1년이라는 주기로 압축해놓고 지키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력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단순히 기념일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무엇인가? 교회력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하는 결단이요, 생애주기를 예수님께 맞추려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교회력의 첫시작은 강림절부터이다. 이 절기는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절기이다. 4주간의 기간을 거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기다림이 없는 이에게는 맞이함의 감동도 적을 것이다. 감동은 인생이 겪는 또 다른 행복 중하나이다. 그 행복을 통해 사람들은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소신과 확신을 갖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2016년의 새해가 밝아야 새롭다고 하는데, 우리 믿음의 권속들은 오늘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와 각오가 있기를 바란다.

 

1. 평강을 주시나니 형통하라.

내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평강을 주시나니, 형통하라!”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여러분의 가정과 삶이 복되게 변해가며, 감사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면류관을 믿음으로 사모하는 이들마다 그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신다.

우리가 복음적으로 되는 것은 우리의 공로나 생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보여주시고 약속해주시고 말해주시는데, 어떻게 부정적인 생각이나 딴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 은혜를 함께 사모하며, 모두가 복의 주인공들이 되길 원한다.

제가 목회자로서 반복적으로 들려오고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말씀 하나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인데, 광야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세우셔서 하신 말씀이 있다. 그 백성을 축복하라는 것이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인생길 위에 있는 그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 얼굴을 향하시길 원하신다. 여기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라는 것이 그냥 보신다는 의미이겠는가?

긍휼하신 눈, 자비로우신 눈으로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말씀 하셨다. 너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신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이다. 그 분께서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고 함께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전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 주시기로 하시는 평강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평강이 무엇인가?

 

2. 시류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강림절은 24절후와 비교해서도 참 절묘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가월령가나 월여농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時維仲冬爲暢月(시유중동위창월)” 때는 바로 중동이라, 창월이라 이르니

“大雪冬至是二節(대설동지시이절)” 대설, 동지 두 절기가, 이 달에 들어 있다.

 

대설과 동지. 해의 길이가 가장 짧아지고 어둠이 짙어간다.

 

그런데, 그럴수록 별빛은 빛난다. 동방박사들은 그 별들 속에 아기 예수 탄생의 별빛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별빛 따라 주님을 경배하러 좇아왔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환하게 빛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별빛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세상을 보면서 어둠이 짙어가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세계의 평화는 위협을 받고, 이 나라는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어떤 학자는 2차 세계대전이 있던 1900년대 당시의, 세계가 극도로 불안하고 긴장상태를 보이던 때를 다시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질거라는 전망들을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연일 나라빚과 가계부채는 IMF이전보다 심각한 상태라고 연일 외쳐대고 있다.

저는 프랑스의 테러와 국제정세를 보면서, 요한계시록의 두 번째 봉인이 떼어졌을 때를 보는 듯 섬뜩했다.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계6:3-4)

 

그리고 세 번째 인을 떼실 때에는 검은 말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다고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아와 굶주림,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고 배급을 받아야 겨울 살 수 있는 비참한 경제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별빛이 더욱 반짝반짝 빛나며 선명하게 다가온다. 세상은 이렇게 어둠과 혼란이 심해 가는데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과 나심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을 갖으라. 주님께서 그 반짝이는 그리스도의 빛을 여러분에게도 비춰지고,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 주시는 약속은 무엇인가? 주님의 말씀이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계22:16)

 

광명한 새벽별. 그것만으로도 어둠이 문제 되지 않는다. 혼란도, 혼동도 마찬가지이다. 시련도, 방황도, 길 잃어버릴 걱정도 전혀 문제가 없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그 별을 보길 바라신다. 기쁨과 소망이 넘치길 바라신다.

 

3. 평강을 주시나니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세상의 일을 바라보면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다. 세상은 이렇게 어려워지는데, 우리가 어떻게 평강을 얻을 수 있을까? 무슨 수로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 은총과 그 신비는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뜻하지 않을 때, 임한다. 아무 공로나 자랑 없지만 주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급이 넘친다. 과연 평강이란 무엇인가? 안이함이나 안일함과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의 주시고”라고 말씀했다.

“때마다, 일마다” 하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게 될 것인가?

첫 번째는 시험을 감당할 힘을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신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다.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했다(약1:5).

 

우리가 다윗은 사울로부터 얼마나 많은 설움과 죽음의 위협과 고통을 받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윗의 심령가운데 주님은 이런 고백과 찬송을 주셨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산성이시로다.”(시18: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시18:3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3:5)

 

두 번째는 감당치 못할 즈음에 미쁘신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시는 신비와 구원을 체험한다.

히스기야가 산헤립 군대에 완전히 포위되어 끝장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로 밤을 지새웠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하나님만 의지했다. 다음날 기적 같았다. 그 군대가 철수하고, 버리고간 수많은 전리품들을 얻을 수 있었다.

 

다윗 역시도 동일한 체험이 있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1-2)

 

그 상황의 웅덩이와 수렁이 기가 막힐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 발을 반석 위에 두시는 구원을 체험했다.

 

주님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님은 이길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한다. ‘친히 평강을 주시고’ 친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특성이 있다. 인간이 측량하거나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막바지에 오셔서 응답하실 수도 있고, 과정 속에 응답하실 수도 있다.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은 막바지에 임하신 은혜다. 그런가하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그것은 과정 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성령을 통해 증거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6-19)

 

우리가 한 해를 맞이하면서, 분명코 여러 가지 인생의 모양이 있을 것이다.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주님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평강을 주시길 원하신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을 때, 평강을 얻게 된다.

 

4. 형통하라.

신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불빛 한 점 발견할 수 없는 절망과 어둠의 때에, 그 때야 말로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하게 된다. 믿음의 자리에 서 있을 때 말이다.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그러면 경험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형통함이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갔다. 분명히 노예의 신분이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어땠을까? 낙담하고 신세한탄하고 괴로워하고만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셉은 어떠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는 주님과 함께 했다. 그리고 평강을 얻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형통함이었다. 보디발의 눈에 비친 요셉의 모습이 그랬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3)

 

보디발의 집에서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노예 신분으로 가정의 총무가 됐다. 얼마나 많은 집사들이 있었겠는가? 그 모두를 관장하는 총무가 됐다는 말이다. ‘주님을 믿고 평강을 얻어, 긍정적으로 열심히 하는 자를 또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구나!’ 우리 인생의 모습도 그렇지 않은가? 성실한 사람, 열심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 평강을 얻은 사람에 대해서 세상은 인정을 해준다.

그에게 시련이 왔다. 누명을 썼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불같은 성화를 부렸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다.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도 발견된다. 평강이 사라질만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 그리고 요셉이 거기서도 형통하게 되어 감옥의 제반 사무를 맡아보게 됐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증거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증거되고 있는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신비는 혼란과 절망과 어둠 속에서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총이 있다는 것이다.

위기는 기회며, 어둠은 별빛을 더욱 밝게 해준다. 주님은 형통을 바라시고 원하신다. 그래서 더욱 평강을 더하시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월여농가에서 말하는 창월이란 이런 뜻이다. ‘만물을 충실하게 하되 발동시키지 아니한 달’, 음력 동짓달을 이르는 말이다. 선조들은 내적인 충만함을 채우는 달로 이 절기를 보냈던 것 같다.

우리의 신앙적인 내적 충만함을 채우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강림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산달을 기다리며 몸가짐, 마음가짐을 조심스럽게 하는 산모처럼 이 절기를 보냄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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