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22. / 강림절 후 26주 왕국주일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엉성해진 길 옆 가로수의 달랑거리는 잎새가 가을이 슬그머니 그 문을 닫으려함을 알려주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희망을 가슴에 품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어루만지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엘2:13)
- 물음
2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하고 있다. 누구에게 하는 말씀인가? 아브라함?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찾아오셨으니까, 이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그 사랑에 응답하게 되면 경험하는 것이 있다.
1) 하나님께서 복되길 원하신다는 확신이다. 4절을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증거하고 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은 관계를 끝내라는 뜻이 아니다.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점층법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기대고 의지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신앙적인 요청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바꿔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겠다는 강한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것은 그 사랑에 응답을 하고 나니까, ‘복되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강한 확신이 들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되게 하시길 원하시는 뜻에 대한 강한 확신이 드는가?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이 표현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데가 또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약속을 맺으시면서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7:9) 말씀하신다. 삶의 처지와 형편과 모양은 달라도 복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동일하다.
2) 듣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이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했던 말씀을 들려드렸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믿음으로 시작했던 일도,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금방 불신앙의 마음이 그를 덮쳐서 육체로 마치는 결과를 맞는다. 작심삼일이 될 수도 있고, 용두사미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신앙적인 실수에 빠지지 않으려면 매사 하나님으로부터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듣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그 옮겨간 곳에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음성을 들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듣게 하신다. 선한 증거와 믿음을 갖게 하신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이렇게 구했다. 주의 종에게 ‘듣는 마음을 허락하소서.’라고 말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 평화가 사라지고 갈등과 분열의 골이 깊어지는 것은 이 지혜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듣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 피할 길을 내시고 인도하시는 섭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아브라함을 보면, 때때로 이러한 마음이 닫힌 때도 있었다. 그래서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아보며 반성하는 마음은 다시금 이 마음을 갖게 한다. 아브라함은 다시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갖는다. 신앙의 회복도 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3) 순종하며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는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예배함의 정점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충성을 다짐하고 맹세하는 것이다. 기복종교나 신앙에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마음들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 축복
처음의 물음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다. 본문만 보면 그렇다. 그런데, 성경을 보다보면, 이러한 고백과 표현을 만나게 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말이다.
야곱이 하란으로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보여주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아브라함이 복되기를 바라시고 창대케 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이삭, 손자 야곱, 요셉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더 후대의 자손에게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계보는 혈통이나 육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한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3-24) 무슨 말인가? 그 소급 적용이 바로 우리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름이 열국의 아비,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믿음으로 말이다.
-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
여러분, 복 받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는가? 당연히 믿음이다.
아브라함에게 신앙적인 위기가 수차례 찾아왔다. 상속자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뭇별을 셀 수 없는 것처럼 자손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창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서, 믿음에는 인내를 필요로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응답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자, 조급한 마음이 그에게 찾아왔다. 하여 여종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 때 나이가 86세였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이미 사라의 태는 닫히고 경수는 끊어진 상태였다.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들었다.
이스마엘이나 잘 키워서, 대를 잇게 하고 상속자로 삼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사라를 통해서 였지만, 어쩌면 자신이 어리석어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찾아왔다. 오히려 이스마엘을 통해서, 뭇별을 셀 수 없는 것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확신이 굳어졌다.
그 때, 하나님은 또다시 그에게 찾아오셨다. 그에게 듣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가지를 약속하셨다.
①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크게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역시 그 약속에 대한 소망과 믿음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②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약속마저 변함이 없으셨다.
그런데 세 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듣자, 그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거부해서가 아니라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③ ‘사래’의 이름을 ‘사라’라고 부르시겠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보라. 사라라는 이름은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냥 그렇게 부를 수는 있겠지만, 자식도 낳지 못한 여인이 그렇게 불린다면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에 맞는 뭔가 명분이나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사라는 그렇지 못했다. 의미상으로만 그렇게 불러줄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겠는가? 헛된 영광이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지금 자식을 낳는다?’ 자신의 나이도 이미 100세 가까운 99세이고, 사래는 경수가 끊어졌다.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브라함은 심중의 생각을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로마서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복을 받는 비결이요, 약속의 성취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기대에 대서 말이다. “약속하신 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는 것이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히브리서는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은 변함이 없고, 후회하심이나 철회하심이 없다. 믿음 안에서 말이다.
여러분 복음을 들어보았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지경을 축복하는 말씀을 들어보았는가? 말씀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주의 종의 입술을 통해서 말이다. 여러분에게 듣는 마음이 있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과 순종하고 충성하는 인내가 있기를 바란다.
복음은 다른 게 아니다. 우리가 저주와 사망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살리심과 같이,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복을 우리에게 주셔서, 세상의 모든 일로 형통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며 영생에 이르길 원하신다. 의롭게 여기시고 지극히 사랑하신다.
- 복음과 전도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도 이런 복 받는 비결과 원리를 발견한다. 3절 말씀을 보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제 2의 모세로 그리고 있다. 유대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모세가 바로 왕의 유아살해 명령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셨다. 모세는 10가지 재앙을 애굽과 바로에게 입혔는데, 예수님은 10가지 이적을 일으킨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모세 유형론’이라고 한다.
로마서는 예수님을 제 2의 아담에 비유한다. 첫 번째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인류의 원죄를 일으켰지만, 예수님은 순종함으로 인류를 복되게 하셨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이 논리대로라면 예수님의 제 2의 아브라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의 조상을 통해 복을 받는 모범의 비결을 보이셨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복을 누리는 비결을 성취시키시는 분이시다.
3절 말씀을 이렇게 적용해보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동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가장 복된 소식, 즉 복음이다. 이 크신 은혜를 깨닫고 확신하라.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길 바라신다. 예수님의 이름이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 파송기에서 복음을 전하며 평안을 빌면, 그 집에 평안이 임하여 복을 받는다. 혹 그 빌었던 평안이 그 집에 합당치 않을 때, 그 복이 어떻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정말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이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원수 된 자에게도 복을 빌라. 저주를 빌다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을 빌면 그 복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목사가 죽어서 심판대 앞에서 심문을 받는 꿈을 꾸었다. 심판자가 물었다.
“그대는 항상 선했는가?” 목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심판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대는 항상 의로웠는가?” 목사는 한숨을 내 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심판자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항상 깨끗했는가?” 목사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목사는 불안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
곧 큰 형벌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때 밝은 빛이 환하게 비추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였다. 예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목사를 껴안고 보좌를 향해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 사람은 항상 선하지 못하고 항상 의롭지 못했고 항상 깨끗하지 못했으나 세상에서 저의 편에서 있었습니다. 이제 지금 여기에서는 제가 이 사람의 편에 서겠습니다.”
(문병하 목사님 페이스북에서 퍼옴)
우리가 늘 선하고 의롭고, 깨끗할 수 없지만, 예수님 편에서 예수님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 그 순종과 충성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