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6. / 강림절 둘째주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를 부르신 하나님, 강림절 둘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삼라만상이 겨울 추위로 오그라드는 때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랑의 온기로 차디찬 저희의 마음을 녹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1. 살구나무

며칠 전에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내랑 자녀들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깨서 일어나더니 꿈꾼 이야기를 짤막하게 하더니 다시 누워 자더라는 것이다. 악몽을 꿔서가 아니다. 너무나 좋은 꿈을 꿔서다. 악몽을 꾸더라도 이래본 적이 없다. 단꿈을 꾸고 있는데, 누가 잠을 방해해서 깬 적은 있다. 그런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자다가 놀래서 깰 만큼 좋은 꿈을 꿨다. 어느 교우가정에서 집을 샀는데, 거기 초대 받았다.

그러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계속 좋은 비전과 환상을 보여주신다. 십일조에 대한 꿈을 보여주시는가 하면, 우리 교우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장면을 보여주신다. 제사장들에게 광야에 있던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주신 명령을 말씀하시는가 하면, 아론의 지팡이에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펴서 살구열매가 열리는 장면도 보여주신다.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해봤다. ‘얼마나 우리 교우들이 복받기를 바랐으면 이런가?’하는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무의식중에 바라고 있나보다.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는 시편 기자가 환호하는데, 그 감정처럼 꿈만 같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짐에 대한 기쁨과 환호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자다가 벌떡 일어났나보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딱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꼭 ‘기도에 대한 무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바’가 있음을 깨닫게 됐다.

 

여러분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고 했다. 그러니 여러분,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어려웠을 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믿음을 주시고 확신을 주셨다. 위로를 주시고 용기를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복음을 듣고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그 복음을 체험하고 전하고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다. 주님께 제일 먼저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사랑하라. 주님 사람이 여러분 삶의 제 1순위가 되라.

 

그래서 여러분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 받는 비결, 비밀, 원리… 이런 것들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마음에 잘 새기고 믿음으로 붙들기를 바라신다.

 

 

  1. 복음의 활력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때에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 있다. 그것을 누가복음에서 재인용한 구절이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40:3)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노역의 때가 끝나고 죄사함을 받았으니, 백성을 위로하여 힘껏 외치라고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해방, 광복, 자유… 곧 포로생활에서 돌아온다는 메시지였다. 이러한 소식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다. 사방에 퍼져간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는 일은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누가 파발을 띄워 소식을 전하지 않더라도 어느새 예루살렘에까지 도달했고, 소식이 곳곳에 퍼져갔다.

 

시편의 시인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126:1-3) 만세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성경은 그냥 선포와 외침에 그치지 않는다. 복음은 활력을 얻게 돼있다. 이 소식과 선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자, 우리도 뭔가를 준비합시다.’, ‘주님의 나라와 역사에 동참합시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과 자발적인 마음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난다. 뜻이 모아지고 하나가 된다. 성령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치가 된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 말씀은 형식은 명령이지만, ‘꿈꾸는 기쁨’에 견줄만한 복음을 경험하고 확신하는 자에게는 무엇인가? 명령이 아니라 일치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말씀했다.

 

사명과 명령은 어떻게 다른가? 명령은 일방적일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일 경우에는 순종함이 있어야 한다. 내가 싫어도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따르는 것 말이다. 선택적일 수 없다.

사명은 상호적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일치한다. 억지로 되거나 사람이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임하게 된다. 예수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는 일은 누구나의 사명이 되기를 주님께서는 바라신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복음의 활력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1. 이사야의 비전에 대한 세례요한의 재해석

오늘 말씀 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 요한에게 임한지라.’(눅3:2) 당시 세계는 암흑기였다. 어떤 갈급함은 있지만 해결방법을 몰랐다. 그런데 요한에게 임한 말씀은 이사야 때와 같은 말씀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말씀이었다. 모든 문제는 죄의 문제였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고,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을 공허하고 어둡고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메시야로 친히 오신다는 신비를 깨달았다. 메시야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사야 때의 문제는 바벨론으로 굴비구름 엮이듯 끌려가던 길은 포로의 길이었고, 돌아오는 길은 자유와 해방의 길이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존재가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과 멸망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길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되는 놀라운 신비와 은총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 놀랍고 신비한 일을 모두가 알기를 바라신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영접하며, 복음을 믿는 이에게는 구원하심을 깨닫게 된다.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 ‘마침내’ 형통하는 길이 열린다.

이 땅에서 이기적인 번영을 누리더라도 멸망의 길이 있는가 하면, 빈곤이 있더라도 생명의 길이 있다. 또 고난이 있더라도 예수를 믿어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길이 있다. 하나님께서 복되기를 원하신다. 치유되길 원하신다. 회복되길 원하신다. 자유하길 바라신다. 건강하길 원하신다. 성공하기를 원하신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안다면 ‘마침내’ 승리하는 것이다.

 

 

  1. 은혜의 법

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를 구원하고 복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인가? 믿음인가? 저는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 안에 있다고 하면서 은혜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여러분들은 아니라 생각한다.

율법아래에 있다는 것은 이것이다. 자기가 구원받거나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어떤 의무를 다하거나 공로를 세워, 자격이 생긴 뒤에 복을 구하거나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오히려 더 은혜생활을 못한다. 조금 자신의 열심과 충성이 있을 때에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남을 정죄하거나 금방 교만해져서, 어느새 비복음적인 삶을 살아간다.

몇 주 전에도 말씀드렸다. 율법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죄를 깨닫게 하는 데까지이다. 딱 거기까지다. 율법으로 구원받고 복을 누리고 주님의 상급을 바라겠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율법은 필요없다?’, ‘믿음의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며, 신앙생활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믿기만 하면 된다?’ 물론 아니다. 바로 율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경종을 울리게 한다. 하나님 뜻에 빗나가고 불순종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성령이 근심하고 있는 이유를 알게 한다.

그렇기에 율법 없는 은혜에 속아서는 안된다. 잘 이해하라. 죄의 속임수가 있다. 죄를 범할 때 달콤하다. 우리에게 속삭인다. 죄를 지어도 자비의 하나님은 용서를 하시고 죄를 사해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죄를 짓고 나면, 이런 마음이 찾아온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용서와 복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자비와 긍휼을 자신에게 베푸실 수도 없다고 말이다. 하나님과 단절하도록 만드는 사탄의 치밀한 전략이다. 그래서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그는 아버지께 받을 유산의 분깃을 나눠달라고 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계획이었을까? 처음부터 방탕한 데 사용하고 타락하고자 했을까? 흔히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아버지의 재산을 반쯤 가지고 자기 원대로 하면, 뭔가 잘 될 줄 알았다. 그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났다.

그 유산은 달콤했지만 생각과는 달랐다. 어느새 허랑방탕해지고 모든 것을 탕진하고 말았다.

우리 역시 신앙생활 편하고 쉽게 하면, 자기 자유와 의지와 능력을 따라 멋대로 하면 좋을 것 같은 마음이 일순간 찾아온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늦춘다. 한 번 두 번 빠지고 생략하고 넘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 돌아오는 삶의 형국은 하나님과 단절된 처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을 경험한다. 정말 하나님의 울타리를 넘어서있다. 그러니 율법의 경종을 들으니 주의하라.

탕자가 된 둘째 아들은, 남의 집에서 돼지를 치며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돼지를 쳤다는 것은 더러운 일도 가리지 않는 처지가 됐다는 말이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고 부정하게 여기는 가축이다. 그래도 그의 실상은 주림을 면할 수 없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가 좋았다. 탕자가 된 아들도 안다. 그러나 돌아가기로 마음먹기까지 어땠을까?

그가 아버지 집을 떠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따뜻한 집, 풍성한 음식, 일상에서 풍족한 모든 것? 염치없는 모습? 아니다. 품꾼이었다.

자신은 더러운 일을 해도 먹을 것이 없고 주리는데, 그 집 품꾼들은 풍족했다. 아버지께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빌고 자신을 품꾼으로라도 써달라고 청해볼 생각이었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만약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비를 구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어땠을까?

아버지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성공하고 난 뒤에, 아버지가 다시 받아들여주실 정도로 뭔가를 이룬 뒤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결코, 돌아갈 수 있을까? 염치없어 못 돌아간다.

율법을 통해서 복 받고 구원받겠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께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그 깨달음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바래야 한다. 기억하라.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용기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은혜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1.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복과 은혜와 구원을 받는 길이 예수를 통해서 열렸다는 것이다.

 

(그림1~6)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가? 부활을 믿는가? 하나님 나라를 믿는가? 다시 오심을 믿는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모든 신비의 눈이 열릴 수 있다.

 

 

  1. 복주시고 상주시기로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여러분, 저는 복주시고 상주시기로 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우리 모두가 온전히 갖기를 바란다. 탕자를 마을 어귀에서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간절히 기다렸던 아버지의 마음처럼, 하나님께서 바라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의심이 든다면, 왜 복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주시고 상주시길 바라신다. 형통케 하신다. 물론 고난과 환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강을 주시고 이길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셔서, 마침내 승리하여 참된 복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세례요한이 요단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이사야의 말을 재인용하고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눅3:4)

율법 안에서 회개하는 것을 넘어서라. 은혜 안에서 회개하라. 시편84:5은 이렇게 고백, 간증하고 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대로란 왕이 입성하는 큰 길을 말한다. 시온의 대로란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강림절 둘째 주를 보내고 있다. 우리에게도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림과 같이 주님의 오시고 임재하는 길이 활짝 열리기를 바라신다. 그 예비함이 사모함으로 있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복과 은혜가 임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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