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8. / 성령강림절 후 24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구르는 낙엽을 보며 중심이 없어 흔들리는 삶을 반성하게 되는 계절에, 주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채워지게 하여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시오,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0.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1. 치유 받지 못한 여인

199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지존파 사건을 알 것이다. 인간이길 포기해버린 6명의 20대 청년들이 결성해서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던 그 사건, 세상에 대한 적의로 이들은 ‘가진 자의 것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다.’는 행동강령을 세웠다.

그런데 얼마 전 JTBC 뉴스를 보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21년 전 범죄 사상 최악의 딜레마에 빠진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그의 얼굴을 가린 채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괴롭게 살고 있었다.

 

사건은 이랬다. 지존파의 범죄에서 이 여인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간신히 그 소굴에서 빠져나와 세상에 알렸다. 그의 딜레마는 이것이다. 인질을 잡아와서 지존파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게 한 뒤 강제로 발사시켰다. 공범을 만든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그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자기의 목숨을 잃게 되고, 또 지시를 따르자니 남의 목숨을 잃게 하는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 있던 것이다.

 

그는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자신이 사건의 피해자인데, 가해자라는 이상한 심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보통 트라우마를 당하면 그 기억을 회피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 기억을 꼼꼼히 적어놓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아마 트라우마가 회피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커서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피할 수 없는 고통이었는지, 아주 조금은 짐작이 된다. 그가 한 번 쯤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의 기회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공적 도움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을 취재한 기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피해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싸늘하고 냉소적인 것이 아닌가, 했다고 말이다.

 

치유와 회복, 혹은 만회의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2. 상처입은 영혼

우리의 영적인 존재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가? 죄로 인해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이 바울만의 고백이겠는가?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인간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을 인간의 원죄라고 말한다. 법이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 법 아래 있는 사람은 그 명령에 따른다. 인간은 죄의 법 아래 있어, 그 명령을 따른다. 누구나 죄인이다.

심지어 믿음을 가진 신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믿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들어와 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자기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갈등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 갈등 속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아는가? 그리고 급기야 ‘죄의 법’에 사로잡혀 사망에 이끌리는 것을 경험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딜레마를 경험하지 않았겠는가?

다윗이 궁중 옥상을 거닐며,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에 불일 듯 일어난 정욕으로 인해 갈등하지 않았겠는가?

 

죄는 우리를 포박하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이 있다.

 

  • 우리의 생각을 현혹하고 기만하며 속인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뱀은 하와를 꾀일 때, 동산 중앙의 실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실과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시험을 당할 때 우리의 감정은 온통 그것만 보도록 만든다. 정말 그게 절대적으로 좋아 보인다.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부끄럽고 후회한다.

 

  • 합리화이다. 현실적인 의무나 상황을 빌미로 삼도록 유도한다. 대신에 본질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유도한다. 잠시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은 당장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다 하는데,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급기야, 죄짓는 것이 어떠냐는 생각이 들고, 죄가 죄인지도 모르게 된다.

 

  • 생각을 미혹하고 끈질기게 유혹한다. 서운하고 속상한 일은 자꾸 떠오르고, 아니다 하면서도 섭섭하다. 별것도 아닌데, 자꾸 베베 꼬인 생각이 들고 견디지 못한다. 중독은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면서, 그 쾌감을 느끼던 때가 순식간에 떠올라 참고 참다가 결국 다시 그것을 하게 만든다. 쾌락을 멀리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그 암시를 넌지시 던짐으로써, 유혹하고 또다시 범죄하게 한다.

 

  • 죄는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은밀히 말이다. 그래서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 ‘대적함’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갈등할 때, 우리 속에 나타난다. 히스기야가 죽음의 문턱에 있던 병상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회복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 때, 그 안도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졌다.

 

 

3. 죄 때문에 우리가 겪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찾으실 때,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자유한 마음이 없었다. 가인은 하나님을 향해 낯을 들지 못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악한 일을 계획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해야 하는 이에게는 은총조차도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불행을 겪는 것이다.

 

2) 양심의 가책은 우리를 짓누른다. 죄악된 행위에 짓눌린 고통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32:3-4)

 

3) 설령 양심이 무뎌져서 가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혹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하고 경미한 죄들 때문에 일어나는 영적인 상태가 있다. 세상의 것을 쟁취해놓고서도 만족함을 모르고 기쁨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알게 모르게 짓는 작은 죄들이 자기를 두르고 덮을 때, 영혼과 심령을 무디고 메마르게 만든다. 솔로몬을 보라. 그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가장 화려한 번영을 누렸던 왕 중 하나다. 열왕기상11:3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이미 만족함을 모르게 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만큼 공허한 사람이 없다. 솔로몬의 것으로 전해지는 표제어가 붙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보았으랴?”(전2:25), 이 말의 결론에 붙은 말이 이것이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2:26)

 

4) 또한 기억하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혹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 ‘그 세계가 어디 있느냐?’, ‘죽으면 그만이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죄 때문에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무지하고 부인하고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돈만을 좋아하고, 세상 것만 탐하며, 주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다. 부자가 음부에 들어갔다.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거지였던 나사로에게 손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서 그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것이 거절되자, 그렇다면 나사로를 그의 집에 보내서 이 사실을 알리게 해달라고 한다. 고통받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들이, 설령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현세의 탐심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촌철살인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

 

4. 율법의 역할, 은혜의 법 역할

이것들을 깨닫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 역할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 죄를 깨닫게 되고, 마음으로 그 법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육신에 있는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무력화시킨다. 왜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을 이기 못할까? 이상하지 않은가? 당연히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을 이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모든 역사와 교회사를 봐도, 하나님이 법이 죄의 법을 이긴 역사가 없다. 구약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울은 탄식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는 하나님의 법으로 죄의 법을 이기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의 법을 영영히 이길 수 없는 것인가?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라. 그 역할은 거기까지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데까지다. 딱 거기까지다. 율법으로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 딱 거기까지인 율법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 붙들려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다. 은혜의 법이 있다. 하나님 사랑의 법이다. 은혜의 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아직도 죄의 법 아래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 오늘 이 복음의 소식을 들으시기 바란다. 복음을 경험하라. 확실하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당하고, 번번이 실패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시켜준다.

 

여러분, 성령충만해야 한다. 믿음충만해야 한다. 은혜충만해야 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르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말씀했다(롬8:5-6). 이 점을 잘 이해하고 깨닫고 믿길 바란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9,10) 말씀했다.

 

성령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라. 은혜의 법에 복종하고 순종할 때, 우리의 속사람이 기쁨과 평화를 느낀다. 이 시간 그 주님을 영접하라. 지금 여기에 찾아와 계시다. 여러분 심령 가운데 모셔들이기를 원하신다. 믿음으로 영접하라.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만약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그는 평생을 배신자요, 비겁자로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일을 평생 자기 상처로 안고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너 왜 그랬니? 다시는 안그럴꺼니?” 묻지 않으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지, 물으셨다. 전자는 ‘또다시 죄를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후자는 은혜의 법에 복종하느냐의 문제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해서 찾아오셨고, 평생 그 고통 속에 내버려둘 수 없어 찾아오셔서, 회복시켜주셨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복되기를 원하신다. 은혜주시기를 원하신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말씀했으니, 믿음으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 믿음으로 생각하라.

 

어쩌면 지존파로 인해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여인처럼, 우리는 죄로 인해 영적으로 동일한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에게 회복과 치유의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부터라도 주변에서 도와, 심신과 영혼이 건강하길 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베드로가 했던 경험을 동일하게 하길 원하신다. 용서받는 경험, 죄가 사해지는 경험, 주님을 사랑하며 회복되는 경험 말이다. 죄에서 자유하며,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목적을 분리시킨다. 무슨 말인가? 죄를 지어도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선에 대한 노력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암시다. 은혜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거룩해지고 성결하고,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이것을 새롭게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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