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1. / 성령강림절 후 23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11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잎들이 가을의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계절에, 주님의 온유한 음성에 취하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지치고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치유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알아도 어려운 말씀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다. 그러나 어려운 말씀이기도하다. 첫째 계명,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좀 예민한 사람은 ‘다하라’(whole)는 말씀이 걸림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알기는 알지만, 참 어렵다. 둘째 계명,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어찌보면 황금률의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상대도 싫어할 수 있다.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상대도 좋아할 수 있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이다. 이게 무너져서 갈등한다. 관계 때문에 어려워한다.

 

서기관 중 하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가 감명을 받았다. 성경에서 서기관은 대부분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다. ‘쉬제테인’(논쟁하다)은 마가가 잘 쓰는 단어인데,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는 함의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만난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토론하고, 그 많은 계명들을 요약하려고 노력했다. 서기관은 예수님께도 같은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고 요약해주셨다. 서기관은 자신의 생각과 통하는 것에 감격했을까, 32절에 ‘선생님, 옳소이다.’ 말한다. ‘옳소이다’라는 말에 ‘아멘’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여기서는 ‘칼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뉘앙스는 이런 것이다. 맞장구칠 때 쓰는 말이다.

2. 화육하신 주님

저는 28절 말씀을 접하면서, 옛 생각이 났다. 대학교 다니던 시절 신학과 믿음의 길, 그리고 현실 사이에서 답을 찾지 못할 때가 있었다. 교수, 선배, 그리고 존경하는 목사님들은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보다, 찾도록 기다려주셨다. 하여 고민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거다’하는 깨달음을 주신 순간이 있었다. 서기관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왜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는지, 확 와 닿았다.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사실 하나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굳이 구분하자면, 어느 계명이 더 쉬울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적어도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서 그렇지,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쉽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사실 어렵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고, 이익이나 유익이 없는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말일 것이다.

 

로마서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자. 어느 게 더 쉬울까? 누구나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은 쉽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기”란 쉽지 않을 때가 많다. 나의 상황이 어렵고 고통 가운데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 앞에서 시기심과 질투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보다 성숙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솔직히 어렵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끌어안거나 품어 안을 수 있는 ‘긍휼’을 주셨다. 또 뿐만 아니라 이것도 선물로 주시는데, 결론부에서 말씀드리겠다. 그 ‘긍휼’의 마음이 우리 속에 자라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은혜롭게 부르는 찬양 중에,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그 고백 아니겠는가? 긍휼의 마음을 주신 자비의 나무를 키우라.

 

그런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가? 가능할까? 그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 신앙적인 열패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다 하다’라는 이정표 앞에, 우리의 노력은 순간순간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여러분, 예수님이시니까,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라. 예수님도 분명히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분이시다. 우리가 어렵다고 여기는 것을 예수님도 겪으셨다.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을 예수님도 겪으셨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해서 완전을 이룰 수 있을까? 죄인 된 우리가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단언컨대, 서기관은 방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하시면서 보여주신 모습에서, 그 서광을 보았을 것이다.

 

13절에서 27절까지, 표면적으로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한 논쟁, 부활논쟁이다. 그리고 그 속셈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 논쟁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의 당당함과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이웃사랑에 대한 인자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기관은 이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논쟁하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그동안 머릿속으로 생각해왔던 것이 구현되는 하나님의 증거를 본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은 가이사의 것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것이 따로 있다는 ‘두 왕국론’이 아니다.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뜨려 책잡으려고 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고방식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기에 바쳐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것을 사람에게 바치는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을 흠잡을 수 있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로마 당국자에게 고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해야함을 깨닫게 되지 않는가? 세상의 일과 힘 때문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기 쉬운 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온 삶으로 보여주셨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이것들이 따로따로 나누어져 구분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 자체였다.

 

부활논쟁도 마찬가지다. 자칫 말장난이나 사변적인 논쟁에 빠질 수 있다. 사두개인들이 지금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형사취수제를 경험한 사람들은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말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고 했다. 왜냐하면, 말장난은 말꼬리의 말꼬리를 물으면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했다고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27절에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말씀해주셨다. 무슨 뜻일까? 죽으면 소용없다는 말이 아니다. 살아있는 자만 가치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형사취수제의 본래 목적은 이것이다. 율법은 약자를 보호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아무 상속이나 상족자 없이 살아야 하는 과부의 처지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법과 제도를 외면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사변적인 논쟁 시도에 대해, 지금 살아있는, 불쌍한 자를 돌보라는 실천적 사랑의 가르침으로 바꾸어주신 것이다.

이 시대는 분명히 예능프로그램에서 했던 ‘나만 아니면 돼’라는 유희화된 악마적인 말로 인해, 이웃사랑의 실천이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분명히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성경적 가르침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카르디아), 마음은 영적인 본거지이자 내적 존재를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고 했다.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느냐? 세상을 두느냐? 갈등할 때가 많다.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불행하고 어둡고 불안하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결단하자.

“목숨을 다하고”(푸쉬케), 호흡하는 생명자체를 말한다. 목숨을 걸어야 할 때, 목숨 걸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고, 걱정과 근심이 찾아올 때이다. 이 시간 주님은 은총과 평강을 얻기를 바라신다.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주시기를 바라신다. 그 생기를 우리 영혼의 호흡 가운데 불어주신다. 세상일에 목숨 걸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다하자.

“뜻을 다하고”(디아노이아), 지성과 오성을 말한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자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주님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 주님의 오성으로 공중의 새를 보시고, 들의 핀 꽃을 보셨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섭리하시는 것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새들도 꽃들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처럼, 햇빛과 비가 선인과 악인에게도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우리 삶과 우주 속에 충만함을 이해하셨다. 우리 속에 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다. 그것을 알도록 노력하자.

“힘을 다하여”(이스퀴스), 이것은 듀나미스와 동의어이다. 듀냐미스는 규정된 힘이 아니라 폭발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못한다고 스스로를 제한하고, 나는 이정도 밖에 못한다고 스스로 규정한 힘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넘치는 힘이다. 하나님이 돕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퀴스는 내가 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 내가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힘, 그러나 자기도 생각하지 못했던 힘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보자. 의욕이 넘칠 때의 힘과 의욕을 상실했을 때의 힘은 다르다. 그것을 점화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믿음이다. 믿음으로만 점화되는 힘이다. 믿음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힘이다.

 

여러분, 말씀이 육화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길 바란다. 위로가 되길 원한다. 힘이 되길 바란다. 모범이 되길 원한다. 그 모범을 따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새롭게 다시 지속할 수 있길 주님께서 바라신다.

 

3. 율법의 관점과 믿음의 관점에서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서기관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말씀하셨을까? 부정은 아니지만 긍정도 아니다. 십자가 옆에 달렸던 한 강도에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부자청년에게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이면,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복음이 된다. 서기관은 유대인의 전통이 뿌리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신명기는 이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나 불순종을 하면 그렇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명기 11:14, 순종을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6은 경고하고 있다. 불순종하면,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율법은 행위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게 되는가? 그러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연약하다. 율법으로 이해하면 오늘의 고통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일 수밖에 없다.

복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자리와 태도가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수많은 방해가 있다. 현실의 어려움은 갈등을 유발한다. 갈등도 방해다. 유혹을 당한다. 고난이 있다. 그런 중에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함께 하신다. 도우신다. 그 갈등과 의심과 회의적인 마음 가운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신다.

이점이 다른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적인 이해는 ‘복 받느냐? 마느냐?’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요청을 하신다. 고난과 어려운 현실과 괴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승리하길 바라신다.

앞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긍휼’을 주셨다고 했다. 또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다고도 했다. 무엇일까? 믿음이다.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도우신다. 그 믿음의 은총을 이 시간 우리에게 붓길 원하신다. 그 때, 참된 행복이 느껴진다.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창조하시고 복되도록 명령하시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완성하도록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믿음을 도우신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능력이 나타난다. 승리가 있다. 하나님 사랑하라.

꼭 기억하라. 주님은 이 복된 소식이 땅 끝까지 증거 되길 바라신다. 우리 이웃에게 전파되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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