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 성령강림절 후 22주, 종교개혁주일)
가을빛이 아름답다. 어디를 가든 그 고운 빛깔에, 그것을 즐기시는 분들은 탄성을 내지른다. 저렇게 아름답게 물들 때까지 보냈을 시간을 생각하니,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저절로 되묻게 된다.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까? 어린이집 아이들이 선생님과 공원에 나와 나뭇잎을 줍는다. 어느 노부부는 공원에 나와 가만히 앉아 있다. 관광객들이 산하를 찾아 힐링의 시간을 갖는다. 그 유유한 모습만 봐도 평화롭다.
그런데 사상 유래 없었다고 하는 짙은 미세먼지가 이 감상을 갈라놓았다.
희뿌옇게 된 도시를 마주하자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세상사의 일은 그리 평화롭지 않고 시끄럽기만 하다. 언제쯤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다. 세상도 그럴 것이다.
점원이 고객 앞에 무릎을 꿇고 갑질을 당했다는 사건은, 이 시대의 모순을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것 같다. ‘맘몬’이라고 하는 돈이 우상이 되고 주인이 됐다. 그 세상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를 온몸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는 구매력이 있는 ‘고객은 왕’일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과잉친절의 사회, 그것은 사실 과잉무례의 사회의 이면일 뿐이라고 말이다. 개인의 인격도 존엄성도 양심도 소용이 없다. 그 모든 것은 다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만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치욕스럽게 만드는 무례함을 보여도 상관없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우리를 분명 지옥 속에 살게 만드는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지난 긴 세월 통일의 염원 앞에, 분단의 장벽이 가져다 준 무기력함으로, 지친 가슴과 그리움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솟구쳐 흐르는 것을 보았다. 인간사가 만들어낸 이념은 얼마나 허위인가를 여실 없이 보여줬다. 무슨 욕심들 때문에, 세상은 한 맺힌 이들의 눈물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가,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이념과 사상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정말 그 원래 이념대로, 소신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념은 그럴듯하지만 그 이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속내는 다른데 있다. 우리라고 다를까? 물질적인 풍요가 개인을 행복하게 해줄 것 같지만, 욕망을 부추긴다. 앞에서와 같은 일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작용을 자아낸다. 어쩌면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신앙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맘몬’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교회가 공산주의를 지지해야 할 것 같은 부분이 있지만, 아니다. 사이비다. 교회가 자본주의를 지지해야할 것 같지만 아니다. 역시 사이비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할 뿐이다.
교회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분명히 세상에 ‘하나님 나라와 임재와 다시 오심’의 소망을 주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부탁이다. 사명이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충성을 다해 순종하며, 온전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길 바라신다.
사정이 이러한데, 목사들의 칼부림은 충격을 넘어 탄식을 주었다. ‘주님, 어쩌다 이러한 모습을 교회에서 봐야 합니까?’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타락한 모습이 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다니, 목사인 저로서도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정말 신앙인들은 믿는 대로, 신앙대로 사는가, 역시 회개뿐이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누가 하며, 절망은 누가 위로하고 이 세상에 희망의 메시지는 누가 줄까?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그 의미와 재현이 절실하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됐다. 당시 교회(구교)는 면죄부를 판매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교회에서 돈주고 면죄부를 사면된다는 된다는 가르침이 어떤 파급효과를 낳았을지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돈-면죄부’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법과 정의, 질서와 평화, 이런 것들을 좀 먹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도덕이 사라지고, 양심이 마비됐다. ‘황금-교회’ 이 연결은 부패를 가속화 했다. ‘돈-교회’는 타락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교회사의 교훈이다. 종교가 물질과 손을 잡고나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주님은 잘 알고 계시기에, 사탄의 유혹 앞에, 사람이 떡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물리치셨다.
십자가 신앙을 회피하는 것은 부활신앙도 회피하는 것이다. 쉽게 편하고 쉬운 길을 가려고 하지 예수님의 제자로 참된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필시, 영적인 힘을 잃고 만다. 신앙의 은혜와 감동은 있다고 하는데, 영적인 힘은 없다. 그것이 오늘 교회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대단한 분들이다. 큰 교회, 편리함과 복지가 잘 된 교회보다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아픔도 고통도 어려움도 함께 하는 이 교회에 속해있으니 말이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영적인 힘과 능력이 있는 교우이길 바란다. 비바람도 견뎌내고, 햇볕도 견뎌내면서, 절벽 바위틈에 필망정, 그 존재됨을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부심 또한 있기를 바란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시스템이나 교회규모나 능력있는 주의 종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다.
* ABC를 피하라. Attendance, Building, Cash
하나님께서 우리가 복되기를 바라실까? 아니다. 세상적인 것에서 말이다.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가 복되기를 바라실까? 맞다. 주님 안에서 말이다. 우리가 복음 앞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따르고, 정말 주님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면, 능력이 나타난다. 능력은 사람의 말과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능력에 있다.
저는 노년의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모아놓고 했던 말이,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면서 어느새 신앙이 오염되고 변질되고 왜곡됐다. 가나안의 우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유입됐고, 섞이고 혼탁해졌다. 오늘 시대처럼 말이다. 그때,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세겜 땅에 모아놓고 결단을 촉구했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24:14-15)
정말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복음 앞에 서기로 중요한 결단을 할 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다.”(수24:16-18)
이러한 고백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안주하고 편안하게 여기는 우상이 있는데, 때로는 하나님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한다.
여호수아는 다시 백성들에게 요청한다.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향하라.”(수24:23)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할 말씀인 줄 깨달으라. 말씀 듣고 회개하고 결단하기를 바란다. 남 탓 하고 비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복음과 신앙의 본질 앞에 서려는 마음이 종교개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히스기야도, 요시아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만연해 있던 것들을 개인이 바꾸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 앞에, 복음 앞에 직면하고 충실하면서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셨다.
복음 앞에 서는 것이 무엇일까, 이 시간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을 좀 풀어내보자.
여러분, 사람을 거들어야 할까? 하나님을 거들어야 할까?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하며 들으라. 저라면 하나님을 거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거든다고 거들어지는 분이 아니시다. 흔히 하나님을 거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욥의 친구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무지한 말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제한하며 자기 말과 생각에 가둘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러다가 욥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다. 하나님을 거든다고 했던 말들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르다고 생각하는 말이 꼭 옳은 말은 아니다. 또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도 아니다. 아시는가?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을 거들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저는 욥기를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하나님을 거들기보다 사람을 더 거들어야겠다고 말이다.
다음은 분당에 있는 어떤 종합병원 원목실에 남겨진 말들이다.
“저 양반도 불쌍하지만 16년 동안 이렇게 사는 저는 뭐예요?”
“저는 지옥에 갈 것 같아요.”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유방암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항암치료를 하는 여성병동이 있는데, 6층이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다. 30대 후반 1명, 4-50대 2명, 60대 2명, 그리고 31세 된 미혼여성이 있다. 이 병실에서는 40대 여성을 최고 선배로 대접하는데, 항암치료 기간이 8년이나 됐기 때문이다. 그의 경험담을 들으며 과일을 깎아먹고 있다. 30대 후반 여성이 40대 여성에게 묻는다.
“애들은 큰가요?”
“고3인데, 엄마가 돌봐주지 못하고 이러고 있네요.”
질문했던 여성이 다시 말한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다 컸으니까요? 제 애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예요.”
원목실 손운산(이대에서 상담학 가르침) 목사님은 주일 예배 후, 방문한 병실의 풍경을 이렇게 담담하게 전해줬다.
이런 모습 앞에,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이 한 마디는 정말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저려온다. 고3인데, 돌봐주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 초6학년을 둔 엄마의 심정,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거든다고 욥에게 상처를 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욥을 거들어서 하나님께 욥을 위해 간구했어야 옳다.
“하나님, 욥이 이런 일을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설령 그랬다하더라도 자비하신 하나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욥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이렇게 했어야 하지 않을까?
저는 하나님께, 여러분을 거들 것이다.
“하나님 우리 집사님, 이 문제 해결되게 해주세요.”
“하나님 우리 권사님, 이 문제 해결되게 도와주세요.”
“하나님 우리 전도사님, 우리 성도님, 긍휼히 여겨주세요.”
(기도제목 읽음)
여러분,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어땠는가? 바리새인들은 어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거들어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러다가 십자가까지도 지셨다.
이것이 복음 아닐까? 사람을 외면하고, 사람을 소외시키고, 진실하고 간절한 관심 없이 자기 기득권과 이익만을 위해 애쓰던, 형식적인 종교행위를 벌였던 당시 종교지도자나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보이셨다. 이점이 예수님의 종교개혁(?)에서 확연히 다른 점이다.
오늘 말씀은 뭐라고 말씀하는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6), “우리를 위하여”(8)
“죽으셨도다.”(6),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니라.”(8)
의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이 쉽지 않고, 혹 선한 사람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죄인’, ‘연약한 자’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 앞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거듦’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또한 우리의 형제, 자매, 이웃을 위해 복음으로 거든다면 하나님 기뻐하지 않으시겠는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며 소망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개인적으로 저는 이 기도 역시 잊지 않고 있다.
여러분, 따뜻한 사람이 되라.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라.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라.
종교개혁주일을 맞아서, 거창하고 요란한 슬로건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을 하나님 앞에 거들어 주는 삶을 살자. 나 자신의 기도보다 교우와 이웃을 위한 기도를 먼저하고, 나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이의 유익을 위해 먼저 구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