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8. / 성령강림절후 21)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사랑의 하나님, 구원을 바라는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통해, 주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믿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교회를 향한 주님의 열정과 사랑을 마음에 품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0. 도입질문.

44절에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 하고 있는데, 어떤가? 행복하게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살기로 결단할 수 있는가?

 

1. 실패하는 인생, 실패를 붙드시는 하나님

히브리서는 제자리에 머문 신앙인에 대해, 단단한 것을 씹어야 하는데, 젖먹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져가고 강건하길 바라신다. 인격도 믿음도 말이다. 자녀가 그렇게 자라는 모습을 보라. 흐뭇하다. 어려움이 와도 지혜롭고 담대하게 이겨내면서 해쳐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자랑하고 싶다.

건강한 성장과 성숙,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분깃점이 있다.

 

인생의 십자가 앞에서 미련해지는 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 보면 된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방법대로 하려다가 견디지 못하고 낙망하고 실망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더 큰 믿음을 가지고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듯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불평하고 매사 부정적이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감사하고 매사 긍정적이다. 믿음 때문에 말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말씀하고 계시다.

 

바람이 없는 날은, 아무리 좋은 연이요, 잘 만든 연도 띄울 수 없다. 바람 부는 날 연은 창공을 선회할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중심을 잃고 빙빙거리다 추락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얼레를 잡은 이의 가느다란 줄을 의지해서 중심을 잡고 유유히 떠있는 연이 있다. 끊어지면 안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창공에서 분명코 연줄과 같은 분이심을 믿으라. 우리 신앙 중심의 줄을 얼레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맡기고 승리하길 바란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언어유희가 생각났다. 얼레는 실패(실을 감는 물체)의 일종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패배하는 실패가 있다. 성경은 우리의 실패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붙들고 계신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가 되어, 감겼다 풀렸다 하면서 바람도 이겨내고 승리할 줄로 믿으라. 광야에서 끊임없는 믿음의 실패를 보았던 이스라엘도, 구름기둥, 불기둥, 그 인도하심을 따라,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설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감격적인 역사를 체험했다. 우리의 인생도 실패 연속인 것 같아도, 끝내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 매여 있다.

 

2. 십자가 앞에 미련한 제자들 (누가 십자가를 바라나)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씩이나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뒤에 공통점이 있다. 제자들의 무지 어리석음 오해이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가 항변했다가 꾸지람을 들었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이다. 무지한 것이다. 그때 주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주문하셨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예고하셨을 때,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지, 서열을 따졌다. 어리석은 것이다.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자(작은 자)를 영접하고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가질 것을 주문하셨다.

오늘의 본문은 세 번째 예고하시고 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이 주님께 한 자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제자들 사이에 시기 질투가 벌어진다. 주님이 마실 잔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부어주실 복은 좋은데, 십자가는 꺼린다. 타인의 십자가에는 감동을 하는데, 자기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부인한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된다. 때로는 감동을 콘텐츠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결단과 각오로 삼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나의 십자가’였는데,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응답과 확신을 주시고, 감사와 기쁨을 주신다. 소명과 사명을 주시고, 감당할 힘과 능력을 주신다.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해주신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가 들다가도, 힘과 용기가 난다.

 

하나님의 복을 오해하고, 무지한 경우도 있다. 세상적인 지위와 부와 행복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무료하게 만들고, 때로는 불행하고 메마르고 악마로 만드는지는 모르면서 말이다. 좋기는 하지만 허무한 복이다. 물론 그 자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하나님 없는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감당하게 하신 이유와 사명을 알게 될 때, 감사가 되고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단풍이 물든 세계를 보라. 형형색색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느끼게 한다. 내게 주어진 사명과 삶의 몫을 잘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이 인생을 허무하지 않게 만드는 참 복은 아닐까?

 

3. 십자가 체험

그렇다면 십자가 체험이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죄사함과 용서의 체험이다.

바울은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사망에서 건져내랴?’ 탄식했다. 죄로부터 스스로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를 사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죄값을 대신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상하게 사람은 고통과 번민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잘못과 한계와 연약함을 깨닫는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다. 그 때, 우리가 경험하는 십자가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사함과 용서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 45절에서, 주님께서 온 것은 그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송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죄사함과 용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며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것을 깨닫고 확신하길 바라신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다시 한 번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가슴을 치는 깨달음을 얻었다. 기독교는 여느 기복종교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종교와 신앙은 기복적이다. 무당은 얼마나 기복적인가? 그런데 기독교는 기복을 훨씬 뛰어넘는다. 무엇인지 잠시 뒤에 생각해보자.

 

2)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다.

인생의 고난 앞에 용기를 잃고 자신감을 잃고, 주저앉고 싶었는데,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한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순간, 담대함이 생겨나고, 희망이 샘솟고, 은혜가 넘친다. 주께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히2:18)고 말씀했다.

-병마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병마를 물리칠 힘을 얻는다.

-인생의 궁핍과 가난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오병이어를 체험한다.

-인생의 실패로 물속에 빠졌던 사람이 건짐을 받고, 물 위를 걸어 주님께 당도하는 체험을 한다.

-인생의 풍랑과 광풍에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이, 평강과 잔잔함을 경험한다.

-주의 이름이면 하늘의 사탄도 번개처럼 떨어진다. 뱀과 전갈을 밟아도 해를 당하지 않고 제어할 권세와 능력까지도 주신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능력체험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마음에는 평강이 넘치고 복잡했던 정신은 잔잔해지며, 자신감을 얻고, 힘과 용기를 얻기를 바라신다. 이것들을 경험하길 바란다.

 

그러고 보니까, 내 인생에서 감당해야 할 몫들이, 다름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이라는 확신이 든다.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된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속상한 일이었을텐데,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일이라 생각하니 힘이 난다. 대신에 주님은 내 모든 문제를 맡고 계시다.

 

이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왔다”고 말이다. 주님께서 그 사랑하는 백성들을 섬기고 돕길 바라시기 때문에, 주님을 믿고, 주님께 나아오고, 주님께 구하는 자는 구하게 되는 것이다. 찾는 자는 찾게 되는 것이다. 두드리는 자는 열리게 되는 것이다.

 

4. 기복종교, 빚진 종교

그러고 보니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게 여겨졌을까? 권세부리는 세상의 자리로 착각하고, 그것을 주님께 요구했으니 말이다. 하나는 주의 좌편에, 다른 하나는 주의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고, 그 일 때문에 제자들이 시기질투로 시끄러웠다. 참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예수 믿으면서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서, 섬김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데,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누군가를 내 맘대로 조종하려고 하고, 불화한 삶의 자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 죄사함 받기를 바라면서,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하는가?

 

저 스스로 이것을 생각하다가, 이런 것을 깨달았다. 모든 종교는 기복적이다. 자기가 잘되고 봐야 남을 도울 수 있고, 착한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받는 일을 우선적으로 주님께 요구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도리는, 기독교는 결코 기복종교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복받지 않는 종교냐? 그것도 아니다. 절대적인 복을 받는 것이다. 오히려 기복신앙, 기복종교와는 비교도 안된다. 무엇일까?

빚진 종교다. 빚졌다는 말의 전제는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기복종교는 자기가 구하는 것을 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빚진 종교는 한량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 때문에 보답하려고 하는 사랑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너무 크게 받아서 결코 갚을 순 없지만, 그 갚으려고 보답하는 삶이 오히려 더 복되게 되는, 비기복적이되 복된 종교다.

하나님의 죄사함과 용서와 구원을, 예수 십자가 사랑을 통해 받았다. 예수님을 통해 섬김과 도우심과 은혜를 받았다. 힘과 용기와 능력을 얻게 되었다. 예수 생명의 빚을 지고 우리가 살고 있다. 그 빚을 질고 우리가 보답하며 살면서 복을 만들어가는 신비한 현상이 발생한다.

 

44절,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했는데, 이 삶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분명히 여기서 종됨은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해도 괜찮은 존재가 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높은 사람들에게 비굴하라는 말도 아닐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약자에게는 또한 함부로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약자들에게도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유효할 것이다.

 

저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진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갚아야지 마음만 먹고 갚지 못한 사랑의 빚도 너무 많다. 빚진 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할까?

남을 희생시켜서 내 행복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희생과 헌신으로 타인을 복되게 만드는 섯이다. 그 증폭되어 돌아오는 행복을 누리는 삶이다. 이미 나도 주님의 희생과 헌신을 경험한 사람 아닌가? 십자가의 사랑을 말이다.

 

또 상대방을 변화시켜서 내가 행복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해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함으로 나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한 부인이 정신과 의사를 찾았다.

“선생님 더는 남편과 살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은 너무 신경질적이고 잔소리가 심해요.”

의사는 한참 고민하다가 처방을 내렸다.

“이 약병의 물을 남편이 귀가하면 한 모금 머금으세요. 그런데 머금기만 해야지 절대 삼키면 안 됩니다. 처방대로 하시면 금방 효과가 있을 겁니다.”

부인은 처방대로 약병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 날도 밤늦게 귀가한 남편은 평소처럼 짜증과 잔소리를 아내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부인도 맞받아쳐 싸웠을 테지만, 그 날은 처방대로 약을 입에 머금었다. 약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꼭 다물었다. 얼마가 지나자, 남편은 잠잠해졌다. 그 날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이다.

그 날부터 남편이 잔소리를 시작하면 부인은 어김없이 약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남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했다. 먼저 신경질이 줄고 아내를 함부로 대하던 행동도 몰라보게 변했다. 신비한 효과에 깜짝 놀란 아내가 의사를 찾아가 감사인사를 했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참 약이 잘 듣더군요. 우리 남편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의사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남편분이 변한 것은 약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침묵 덕분입니다.”

(문병하 목사님 페이스 북에서 퍼옴)

 

내 자신은 변할 것 같지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먼저 양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은혜 속에 나는 죽고 예수가 사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나도 행복해지는 삶이 우리 신앙의 숨은 비밀 아닐까?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 아내의 생일 날 케이크를 사들고 퇴근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발을 쓸 수가 없었다. 아내는 발을 절고 무능한 남편이 싫어졌다. 그녀는 남편을 무시하며 ‘절뚝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절뚝이 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창피해서 더 이상 그 마을에 살 수가 없었다. 부부는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다른 낯선 마을로 이사를 갔다. 마침내 아내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을 무시한 것이 얼마나 잘못이었는지 크게 뉘우쳤다. 그녀는 그곳에서 남편을 ‘박사님’이라 불렀다. 그러자 마을 사람 모두가 그녀를 ‘박사 부인’이라고 불러 주었다. (문병하 목사님 페이스 북에서 퍼옴)

 

‘섬김을 받아서’가 아니라 ‘섬김을 통해서’ 비교되지 않는 사랑을 체험하는 삶이 우리의 숨은 능력 아닐까?

오늘 우리의 삶이 조금 고생스럽고 어렵더라도 맡겨주신 삶의 몫을 통해 아름답게 빛으로 물들게 하실 주님의 은총 생각하면서 굳건하게 지키자.

 

저는 늘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 교회와 이런 사명을 맡아주겠니?’ 참 감사한 것은 나름 순종하고 충성하려다 보니까, 여러분을 만났다. 소중하고 사랑하고 아름다운 여러분은 선물이다.

사랑의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사랑으로 갚아내면서, 사랑의 아름다운 빛이 단풍처럼 물들어가는 사람들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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