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1. 성령강림절후 20주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물속의 고기를 먹이시고, 산 중의 짐승을 보살피시며, 들의 꽃과 풀을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온 천하에 하나님의 돌보심과 한량없는 사랑이 가득함을 봅니다. 그 은혜로 감싸주셔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울고 계신 예수님

소설가 박완서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서울은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회복되는 과정에서 일대의 혁신이 일어났다. 집집마다 장작불을 땠는데, 연탄아궁이가 만들어지고 보급됐을 때,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편리했다고 한다. 24시간 집에 불이 지펴있다는 것은 일대의 혁신이었다고 회상한다. 장작밖에 모르고 살던 어르신들은 이런 타박을 했다고 한다. “요새 것들은 팔자 늘어졌다.”고 말이다.

이런 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도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고, 고대 로제타석에 새겨진 글귀에도 똑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물론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세대 간에는 이런 말들을 입에 담고 사는 것 같다. 사람이 사는 모습은 생활의 어떤 편리들이 바뀐다고 해서 크게 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연탄이 지겨워진 건, 더 편리한 프로판 가스가 보급되면서였다. 그렇게 고맙던 연탄이 살인 가스를 배출하는 위험한 존재로 저주받기 시작했고, 중앙난방식 아파트가 보급되면서, 연탄은 거의 사라졌다. 더 살기 좋아졌고 편리해졌다. 편리함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굳게 믿는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땠을까? Pax Romana. 일단 표면적인 모습은 이것이다. 로마의 선진화된 도시와 문명이 이스라엘을 보다 살기 좋고 평화롭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가이사랴, 디베랴 등의 로마황제의 이름을 딴 신도시가 건설되고, 사람들의 마음은 편리해진 도시에서 주거하고 생활하고픈 열망으로 가득했다. 원형경기장과 문화시설들이 확충되고 사회적인 시스템과 행정들이 바뀌어갔다. 염장사업과 같은 공공근로와 협동조합이 생기고 사람들의 생활의 질과 수준은 향상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국자들은 그러한 것을 선전하기에 열을 올렸다. 주조사업을 통해서 경기의 활성화와 부양책을 시도하는 노력들이 쏟아졌다. (크로산)

 

오늘 말씀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첫대목이다. 히브리서는 크게 1)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 2) 대제사장으로의 예수님, 그리고 3) 그것을 믿는 성도의 신앙.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그 두 번째의 첫대목이 오늘의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읽지는 않았지만 5장 7절 말씀에 먼저 사로잡혔다. 보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주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 이것을 필요로 하시는가? 불행이나 고통과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별로 와 닿지 않는 말이다. 여러분과 상관있는가? 아니면 무관한가? 구원과 상관없는 행복을 추구해가는 사람과 구원과 관계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곧 눈앞에 당도할 것만 같던 행복이 점점 멀어져가고 요원해져갔다는 것이다. 나랑은 상관없을 것 같던 주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가 내것이라는 것을 실감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Pax Romana라는 슬로건이든 사회정책이든 국가의 선전 혹은 홍보는 행복한 세상과 삶을 지향하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실상은 사회부조리만 늘어갔다.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져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땅이라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소작농으로, 소작농은 날품팔이로, 날품팔이는 빈둥거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전에 말씀드린 바 있지만, 포도원의 비유에서 일찍부터 일한 사람, 나중에 늦게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사람이 있다. 전자는 성실한 사람이어서 이고 후자는 게으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함부로 정죄할 수 없다. 아무도 써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세상적인 편리함과 이익이 행복을 가져다 줄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근거가 빈약한 것인지 아는가? 특별한 고통과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 뒤에 오는 정신적 빈곤과 그 천박한 마성에 현대인들은 점차 싫증을 내고 있다. 신기술과 자동화 기계가 나오고 생활은 편해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여전히 인간은 불완전하고 연약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살기 편한 아파트는 늘고 있는데, 피해주지 않아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관용은 사라지고 이웃관계는 엉망이 됐다. 전세값 폭등, 일자리 문제, 자녀교육문제 사회문제도 크다. 박탈감, 불안, 염려… 그 헛헛함은 커져간다.

 

 

아버지의 등 / 정철훈

 

만취한 아버지가 자정 넘어 / 휘적휘적 들어서던 소리 /

마루바닥에 쿵, 하고 / 고목 쓰러지던 소리 //

숨을 죽이다 / 한참만에 나가보았다 / 거기 세상을 등지듯 모로 눕힌 /

아버지의 검은 등짝 / 아버지는 왜 모든 꿈을 꺼버렸을까 //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 검은 등짝은 말이 없고 /

삼십년이나 지난 어느날 / 아버지처럼 휘적휘적 귀가한 나 또한 /

다 큰 자식들에게 / 내 서러운 등짝을 들키고 말았다 //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서러운 등짝 /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

검은 등짝은 말이 없다 //

 

“서러운 등짝” 행복을 추구하는 소시민의 자화상 아닐까? 책임감을 보여주는 어깨와 다르게, 검은 등짝은 보이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불완전과 연약함이다. 시인은 아버지의 등짝을, 자기도 자식들에게 들키고 말았다고 한다. 편리함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문명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 때도, 개발과 성장의 그늘이 있었다. 평화하다, 평화하다하나 평화가 없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통곡하셨다. 단순히 잘 사는 것,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구원과 상관없이 잘 사는 것, 그렇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아시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참구원을 위한 복을 위해 이 눈물 흘리신다.

초대교회에도 삶의 질이 향상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대와 그 현실의 그림자 속에서 박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 같다. 신앙의 결단을 가지고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문제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사람들을 흐릿하게 해놓았다.

 

∙ 믿는 도리를 굳게 하길 바라시는 주님의 기대

히브리서 5;12절에서는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했던 말과 비슷하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이제는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서 참행복과 영생의 소망이 있는 약속이 무엇인지 깨닫고 붙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믿음과 현실 속에서 신앙의 진보와 성숙 없이 갈등했다. 내적확신이 든든해져가고 속사람이 강건해짐을 통해 오는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 철학적 용어를 빌자면, ‘존재론적 행복’ 쯤 될텐데, 예수 믿는 신앙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다.

우리 모두를 진정 사랑하시고 우리가 사랑해야할 예수님은, 살기 좋은 시대에 편안한 자리에서 듣기 좋은 말씀을 들려주신 것이 아니다. 로마식민치하, 경제적 어려움, 강자들의 횡포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기고 자유로우셨다. 그렇기 때문에 강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셨지만, 주님은 아랑곳 하지 않으셨다. 염려, 근심하지 않으셨다. 그 마음이 슬며시 들 때면, 공중의 새를 보셨다. 들의 핀 꽃을 보시면서, 그 속에 깃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셨다. 예수님처럼 살아도 살 수 있다. 아니 더 멋지다. 이기적인 자기 기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복되게 하는 사람, 불행하거나 절망하고 울고 있던 사람일지라도 복되게 하시는 사람. 그 모습이 예수님이셨다.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말씀하시면서 십자가 앞에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순명의 사람이 예수님이셨다.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수 있느니라.”

이분이 예수님이시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때는 신앙적이었다가, 삶이 편해지고 나면 신앙과 멀어진다.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행복이나 세상기준에 맞는 복을 바라는 것이다. 참 구원의 확신과 체험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정말 주님 안에서 변화되고 성숙해진 삶을 살지를 못한다. 그 안에서 새로운 행복에 눈뜨고, 아득했던 삶을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삶으로 바꿔내며 그 몫을 다해야 하는 것인데, 여전히 제자리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붙들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을 때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일까? 기억하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가득 차고, 사랑의 힘이 샘솟는다. 용납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서로의 약함을 덮어주고 힘이 되어주기 시작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누며, 현재의 고난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더 큰 소망을 위한 돛대라는 것을 알고 그 항해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성도들에게 “믿는 도리를 굳게 잡고” 16절에서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용기를 북돋고 있다.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심을 믿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을 통해 주시는 말씀을 증거한다. 믿지 못해서 마음이 오히려 완악해지고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다. 히3:8 광야에 있던 때를 상기시키며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왕의 마음이 완악해지고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거역했다. 믿음의 기회가 숱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었다. 광야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졌다고 말하고 있다. 믿어야 할 때, 믿지 못하고 자신의 고집과 완고함을 꺾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서게 되는 꼴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광야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그 믿음을 돕기 위해, 세우신 이가 있다. 바로 제사장이다. 제사장을 통해 백성을 축복하게 했다. 현실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마음까지 강퍅해지지 않도록 약속의 성취를 소망으로 불어넣는 일을 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대제사장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바라신다. 여기서 ‘큰’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데, ‘위대하다.’, ‘제일이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참’이신 분으로 이해했으면 좋겠다. 15절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다.”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음을 영원히 증거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복되게 하신다.

 

2.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진짜 사나이에서 샘 해밍턴이 종교활동시간에, 천주교 강론에 참석해서, 수녀에게 물었다. 자유가 없는 곳은 어디인줄 아는지 말이다. 해밍턴은 가정, 그것도 아내 앞에서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죄가 있는 곳”

16절에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겉으로 아니라고 해도 1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부검을 하자면 모두가 죄인이다. 연약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나아가라.’라고 한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신다. 육체의 한계와 경험이 무엇인지를 죄없으신 주님이 친히 당하시고 경험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신다.

그는 새옷을 갈아입은 사람처럼 자유함을 누리고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참다운 행복이 시작된다.

 

3. 은총의 자리로 초대받아 그 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지난 주, 아내가 기도제목을 적어내면서 첫대목이 이랬다.
“주님의 소망의 날개 아래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소망의 날개 아래 초대된 이들이다.

우리의 참대제사장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르시는가? 무엇이 필요한지, 잘되는 인생인지, 저주와 사망의 덫이 무엇인지,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시는가? 연약함은 모르시는가?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것은 모르시는가? 16절을 보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신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기 때문이다.

6:15,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오래 참아 받았다. 우리 역시도 동일한 은혜를 믿고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 6:19은 뭐라 말씀하시는가?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예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오늘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 소망의 날개 아래로 초대된 이들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선물로 받은 이들이다. 예수님 때문에, 참복과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인생의 저주와 불행이 끊어지고 주님의 소망이 주의 보좌 앞에서 성취되는 꿈과 비전과 환상들을 보며 확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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