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4. 성령강림절 후 19주

 

맑은 하늘과 고운 산천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창조주 하나님, 10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허리가 휘도록 겸손을 떠는 벼 이삭들이 온 대지를 뒤 덮은 풍요를 말해주는 계절에, 마음속에 그냥 놔둘 수 없는 주님의 세심한 사랑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를 너른 품에 품으시고 다독거려 주사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서 살 용기를 갖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욥기를 읽는 세 부류의 모습

욥기를 대하는 세 가지 반응이 있다.

1) 지금 고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이에게는, 욥의 이야기가 불편하다. 아무 문제 없이 무탈하며, 평안하던 삶에 갑자기 불어 닥친 재난을 보면서 말이다. 하루아침에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질병이 찾아왔다. 이 이야기의 내용이 자기에게 옮겨 붙을까봐 접하기를 꺼린다.

 

2)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갈등과 도전이 된다. 갑작스레 재앙이 닥쳤다. 1장 13절~22절을 보면 ‘아직 말하는 동안에’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평온하던 욥에게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재앙이 닥쳤다고 말한다. 가솔들이 강도들의 칼에 죽고, 가산을 빼앗기고, 심지어 자녀들까지도 천재지변으로 잃었다. 그리고 자신까지도 몹쓸 병에 들었으며(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다), 옆에서 서로 고통까지도 함께 해야 할 아내는 떠나버렸다. 차라리 건강을 잃은 것이나 재산을 잃은 것은 이것에 비하면 낫다. 자녀를 잃었다. 그런데도 욥의 태도는 의연하다.

 

1:21절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의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10절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대단한 믿음이고 내적인 강건함이 욥에게 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갈등도 되고 도전도 된다.

 

3) 이미 고난이 지나가고 믿음으로 승리한 자에게 욥의 이야기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그 때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돌이켜보면 욥의 고백이 하나도 틀린 것 없고, 다시 복주시고 은혜롭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할 수 있다. 욥의 인생의 결론을 보면, 말년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되 처음보다 더하게 주셨다. 아들 일곱을 주셨고 또 세 딸을 주셨다. 물론 처음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 보고픔, 슬픔의 감정은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다시 얻은 아들들은 듬직했고 딸들은 행복미가 넘치게 했다. 부모는 기둥 같은 아들 때문에 듬직하고, 애교있는 사랑스러운 딸들 때문에 행복미가 더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욥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매듭을 짓고 있다.

 

욥42:15-17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더라. 그들의 오라비들에게 했던 것처럼 기업을 나눠줬고, 그 후에 140년을 살면서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그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자녀들도 다시 얻었고, 자녀들에게 골고루 넉넉히 나눠줄 만한 재산도 다시 얻었다. 그리고 천수를 다할 만큼 건강도 회복했다. 행복한 결말 자체가 위로와 감동이 된다기 보다도, 고난을 겪어낸 뒤에 또다시 찾아온 행복이기에, 그 느낌이 전과 같지 않은 것이다.

 

욥기를 읽으면서의 불편함

욥이 당한 고통스러운 인생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과연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여기서 ‘사탄’은 악마를 연상하게 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께 참소하는 자’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세상의 첩보를 물고 와서 하나님께 문제제기 하는 자이다. 어쩌면 우리의 의심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물음, 혹은 생각과 이해를 벗어난 것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 대신 하나님께 묻고 있는 질문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먼저 욥에 대해서 참소하고 시비를 건 것이 아니다.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을지는 모른다. 그런데 먼저 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하나님이시다.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러니까 사탄이 하나님께서 그를 복되게 하시고 소유물이 많게 하시니까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했다. 곡간에서 인심난다고 하는데,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먹고 살 걱정 없이 소유가 넉넉하면 왜 나누고 베푸는 인생을 살지 못하겠는가? 사흘을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마 만큼 사람이 궁핍해져보면 얼마든 추하게 될 수 있는 존재가 사람 아닌가? 사탄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여러분은 어떠실 것 같은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 욥의 고난이다. 이 점이 욥기를 읽을 때의 불편함이다. 인생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걸려넘어지게 하는 존재가 있을 것만 같아, 잘 되면서도 불안해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인생과 삶을 두고 사탄에게 시험을 해보도록 용납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미쁘시다고 믿는데, 이런 식으로 고난을 안겨주신다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이 대목에 대해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염려하는 것 같다.

 

욥기의 지혜문학

그런데, 여러분, 욥기가 성경의 구분으로 말하자면 성문학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역사적 사실에 바탕으로 두고 쓴 책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이다. 모든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극대화해서 ‘고난’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에서 욥기는 1, 2, 42장 이 세 장만 주목받아왔다. 입술로 범죄치 않고 믿음을 지킨 욥을 42장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셨다는 패턴이다. 물론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3장에서 41장까지의 내용을 보면, 욥기를 모범적인 신앙인물의 낭만적인 내용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욥기의 본론은 여기에 있다. 고통 받는 자의 슬픔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3장만 보더라도, 욥이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있는 것 자체부터 저주해보지만, 그 고통을 다할 수 없다. 또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서 찾아보지만, 원인을 모르고, 이유가 없는 것들이 더 많다.

 

1,2장에서 사탄이 등장하고 욥이 고난에 빠지는 것은 하나의 문학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고난의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해보고자 하는 도입이다.

 

3장에서부터 31장까지 3마당의 욥과 친구들 간의 격렬한 논쟁이 이어진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하고 달려왔다. 11절 친구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서로 약속하고 왔다. 멀리서부터 욥의 모습이 보였는데,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12절 일제히 소리를 질러 울었다. 12절 이하에 그들은 얼마나 배려심 많고 좋은 친구들인지 보라.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으로 몸을 긁고 있는 모습에 자기들의 행색이 미안하게 비칠 수 있기에,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었다.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며 욥과 같은 모습으로 애도 했다. 그리고 7주야를 한마디 말하지 않고, 약속대로 위로했다.

그들은 좋은 친구들이었지만, 서로 아는 지식으로 논평을 하면서 그 관계가 깨지고 만다. 불원천리하고 달려와 주었던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 알 수 없는 이유의 최고점까지 점점 다가간다. 32장에서 엘리후라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한다. 그는 친구들과 욥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의 역할은 그 대화를 요약해주는 것이다. 욥에게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하는 태도에 화를 냈고, 친구들에게는 자신들 역시도 고난의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는 것 때문에 화를 냈다.

그 심도 있는 논의를 여기서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38장에서 욥에게 묻는다.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욥은 어디에 있었는지, 바다를 가둔 자가 누구이고,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삼라만상 우주를 움직이고 생명을 주는 이가 누군지, 그 이치를 아는지, 아니 헤아릴 수나 있는지 묻는다. 인간은 많은 대답을 가졌지만 아직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 신비가 더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그 이유와 원인 역시도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속단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원망할 수 없는 것이다.

욥은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누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고백한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 수 있을까? 측량할 수 있을까? 섭리를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메시지

이야기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상시 우리의 삶 속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인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절대적인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를 모르고 원인도 없는 고난은 우리를 답답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탄짓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던지시거나 방관하시는지 원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욥은 “1:21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찬송했다. 또 “2:10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믿음을 대단하다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무엇이 되겠는가?

욥은 전 재산과 식솔과 자녀를 잃었다. 게다가 건강까지 잃었다. 박노해는 ‘몸 하나의 희망’이라는 시 말미에 “장자의 선성편”의 글귀 “차존신지도야”(此存身之道也, 어려움을 잘 견디어 몸을 보존하는 것이 참의 길이다.)를 빌어 이런 노래를 들려준다.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자기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를 잃은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몸’을 망쳐버리면 과거도 미래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긴 호흡으로, ‘몸 하나의 희망’입니다.

 

몸이라도 건강해야 다시 희망으로 일어서고 힘차게 도약할 수 있다. 그런데 욥은 어떤가? 건강이 악화돼서 가망이 없어 보였다. 완전한 절망이다. 더 이상 꿈꿀 수 없고 비전이 없고 소망이 없다. 완전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런데 결론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다. 고난당하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끝장 난 것 같지만, 아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고난이 없는가? 그렇다면 왜 고난이 있는가?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시할 땅으로 가서 몹시 힘든 ‘기근’이라는 어려움을 겪었다. 요셉은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애굽으로 팔려갔다. 모세는 출애굽 해서 광야를 만났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을 피해 쫓겨 다녔고, 수많은 첩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복을 얻었다.

 

십자가 뒤에 나타난 부활신앙을 가지라. 고난 뒤에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라.

 

두 번째, 고난당할 때, 이유를 묻거나 원인을 규명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기라. “1:12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 “2:6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 감당할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믿음은 이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늦은 비, 이른 비로 때로는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고 동행하면서 복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이에게 상주시고 복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히브리서가 믿음의 장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의 핵심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저주나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릇된 신앙이다. 혹은 하나님은 인간이 고난당하길 바라시고 고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도 그릇된 신앙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것을 간과하고 있다. 욥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사탄이었지, 하나님이 아니다. 욥을 의심했던 것은 친구들이었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욥을 이렇게 대하시고 말씀하시고 바라보셨다.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2:3, cf.1:8)

 

세 번째, 이것은 자연스럽게 세 번째와 연결되는데, 하나님의 기대와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믿음을 가지라. ‘온전함’ 욥에 대한 하나님 기대와 신뢰이자, 우리에게도 요청되는 존재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큰일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고 공로를 쌓는 것만이 사명이 아니다. 근본적인 사명은 온전함을 지켜 주어지고 맡은 일들을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성실을 다해 순종하는 것이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또 다른 기대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참소하는 사탄에게, 욥의 승리를 통해, 보란 듯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떤 보응과 대가가 있어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찬송 받으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남이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다.

어떤 조건을 통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들은 이해타산적인 모습 때문에 사람관계가 깔끔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은 깊은 공감과 이해와 배려에서 나오는 관계가 어떤 힘과 능력이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생각조차 못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을까? 환난이나 적신이나 곤고나 칼인가? 아니라면,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셨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새롭게 하고 난 뒤에 “귀로 듣다가 눈으로 뵈오니”라고 고백한다. 귀로 들어 아는 신앙은 간접신앙이다. 이유를 따지고 원인을 파악하고 의심하는 신앙이다. 들으면서 의심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으로 뵙는 신앙은 무엇인가? 체험신앙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들의 놀라운 신비와 아름다운 섭리와 전능하신 역사하심 속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어, 오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 영원에 잇댈 만큼 아끼고 사랑하고, 행복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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