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9.27. / 성령강림절 후 18주, 한가위)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한가위 민속명절로 사람들의 마음이 부푼 때에, 우리의 인생을 주관 하신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감사를 생각하며, 더욱 베푸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나왔사오니, 이시간 주님의 은혜충만함으로 복을 더하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이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한가위 명절 여러분 가정 모두에게 큰 복과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한다.

달의 모양은 여러 가지다. 초승달, 반달, 둥근달 어느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는가?

 

요아스가 엘리사에게 급히 내려와 ‘내 아버지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한다. 그러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엘리사에게, 병으로 죽음이 임박했다. 요아스는 열일을 제치고 찾아왔다. ‘내려왔다’는 표현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찾아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방문’의 의미로 쓰였다. 엘리사의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요아스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발걸음이나 문병이 아니라 모든 일들을 제치고 찾을 만큼 긴급한 일이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을 미리 알면, 요아스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더 긴박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인생도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왜 이러고 있나 할 때가 있다. 그나마 알면 다행이다. 모르고 있다가 대처할 새도 없이 무방비로 맞는 경우도 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이 말은 엘리사의 스승이었던 엘리야가 승천할 때, 그를 애타가 부르는 말이었다(왕하2:12).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전부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엘리야가 자기에게 그래주었던 것처럼, 과연 엘리사도 누군가에게 참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요아스는 엘리사가 자기의 전부라고 여길 만큼 너무나 귀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임종의 시간이 괴로운 것이다.

 

요아스의 이러한 고백은 왜일까? 북이스라엘은 다 망하다 시피 됐다. 13장 7절을 보라. 그 아버지 여호아하스가 아람과 전쟁에서 모든 군대를 잃고 말았다. 고작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남지 않았다. 이 수준은 그저 왕을 경호하는 수준이다. 그러한 북이스라엘을 건재하게 해준 것이 엘리사였다. 아람군대를 사마리아에 포위해 놓고, 칼과 활로 잡지 않고, 떡과 물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뒤 돌려보냈다. 엘리사는 국난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가르쳐주어 이기게 했다.

요아스 때 선친의 실정으로 더욱 국방력은 위태롭고 아람의 폭정과 학대가 심해서 늘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런데 엘리사라고 하는 큰 정신을 가지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왕과 백성은 큰 힘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마음을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면, 걱정할 것 없는 인생이라도 작은 바람에 스르르 무너지고 마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 반대는 또 얼마나 많은가? 태산을 넘어 험곡을 가는 인생이라도 든든한 마음의 피난처가 있다면, 능히 못 걸을 것도 없다. 이러한 소명 다할 수 있을까, 늘 묻는다.

 

군대의 힘이 없는 이스라엘이 아직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의 지대한 영향력 때문이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병들어 죽게 됐으니 이제는 누구를 의지할까? 그 마음이 들자, 하늘이 무너지듯 마음이 굉장히 힘들었다.

 

15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소서 하는지라. ~ 가져오매

 

엘리사는 곧 죽을 침상에서 온 힘을 다해 일어났다. 저는 엘리사의 다음 행동을 통해 큰 감명을 받았다. 엘리사는 요아스 왕에게 활을 잡으라고 하고 동쪽 창을 열어 쏘게 한다. 그러면서 행동이 무엇인가? 16절, “자기 손등을 왕의 손 위에 얹고”

동쪽 창을 향해 쏜 화살은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라고 말한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임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는 위기에 있는 이스라엘에 구원과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변해주는 인물이었다. 다 망한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지키시며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 계셨다. 죽음이 임박했어도, 그 온 몸 깊숙이 파고든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 하나님의 의지는 손 위에 손이 얹어지는 것을 통해 지속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동쪽을 향하고 쏘아 댄, 구원의 화살’이라는 상징도 중요하다. 그런데, 제게는 이 손에 손을 얹음을 통해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상징이 더 감명 깊게 느껴진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돌보신다. 위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망하거나 넘어지거나 포기하길 원하지 않으신다. 이대로 끝나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힘과 도움이 되시며 피난처가 되신다.

 

이스라엘, 그 요아스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은혜주셨을까? 14절에서 19절을 보면 요아스는 두드러진 자격이나 요건을 갖춘 인물이 아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더라.”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하면 이단이다. ‘하나님 앞에 어떤 죄악을 저질러도 구원과는 상관없다.’, ‘못된 짓을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다.’ 하나님은 죄악에서 떠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아직 그렇지 못할지라도 그 백성을 향한 사랑은 애달픈 모습일망정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이 한 선지자의 존재와 삶 속에 온전히 녹아있다.

예수님은 이런 점에서 그 사랑의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신 분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며 영원하고 크심을 온몸에 담아 육화하신, 성육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은혜를 감사함을 받아야 한다.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는 은혜는 이런 것이다. 뉘우칠지 모르고, 용서를 구할줄 모르며, 회개하지 않은 채로 은혜만 받으면 상관없다고 하는 일그러진 믿음이다. 뻔뻔함이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이 닿을 때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그것을 기뻐하신다. 이 시간 그 체험과 확신이 있기를, 주님이 원하신다.

 

앞에서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다. 22절을 보면, 아람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하사엘이 죽고 그 아들 벤하닷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마찬가지이다.

머릿속에 영상을 떠올려보라. 엘리사가 죽는 장면, 하사엘이 죽는 장면. 임종을 지키는 요아스, 그리고 벤하닷. 어떤 선택을 할까? 한쪽은 공격수이고, 한쪽은 수비수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변변한 군대가 없다. 수비할 수가 없다.

이 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망막하고 어렵다. ‘아버지 같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같았던 엘리사를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심히 괴로웠다.

여러분 혹시 이런 인생을 당하고 있는가?

 

엘리사는 이 왕의 마음을 잘 알고서 끝까지 그를 위로했다. 그리고 앞으로 되어질 일을 미리 예견하고 그에게 도움을 준다. 동쪽으로 쏜 화살은 ‘아람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승리하는’ 구원의 화살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의 퍼포먼스들은 그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준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위로와 격려를 허튼소리로 듣는다. 용기를 내지 못한다. 담대히 일어서지 못한다.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용기를 내야 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고 재차 강조하셨다. 이것이 믿음있는 성도들이 듣고 용기를 내야할 결단이다. 여러분 기억하라. 그 믿음이 산도 옮길 수 있는 기적과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주시는가? 두려움인가? 회의적인 마음인가? 염려인가? 자기만 아는 죄나 연약함 때문에, 외면하실 것 같은 의심인가?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다시 화살들을 잡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땅을 치라고 했다. 그는 세 번을 친 뒤에, 그쳤다. 18절, ‘그친지라.’ 저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조금 해보다가 그치고 만다. 왜 그럴까? 자기 회의나 의심 때문이다. 그 불안이라는 어둠에 갇히기 때문이다. 어떤가? 주님은 그것을 끝내 믿음으로 넘어서고 승리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마음이 불붙은 엘리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권면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19절, 엘리사가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라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라.” 불신앙으로 어둠 속에 갇힌 이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라. 상황이 어렵다고 그것에 짓눌려 믿음의 돌파구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영향력을 잃어버리거나 유익함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히브리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혹시 의심하고 있다면 왜 의심하는가? 왜 믿음으로 승리하지 못하는가? 중도에 포기할 생각부터 하는가? 낙심하는가? 어쩌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그 모습을 엘리사의 입을 빌어 꾸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권면이기도 하다.

 

담대한 믿음을 가지라.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라.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 굳센 믿음 가지라.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장으로 초대하신다. 지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아스는 왕으로서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약한 눈물을 보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25절에 보니까, 하사엘 때 빼앗겼던 성읍들을 그 아들 벤하닷에게서 되찾았다.

 

여기에서도 영적인 교훈이 있다. 인생이 분주하고 바빠서, 믿음의 길에서 그 심령부터 굳세게 하고 용기를 내는 일을 할 틈이나 겨를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예배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세상일로 먼저 달려가고, 인간노릇하기 위해 돈도 벌어야 하고, 한가할 틈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아는가? 승리는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비하심 앞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담대함과 용기로 무장된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25절 하반절,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화살들로 땅을 치는 것은 무슨 의미였는가? 이것이 승리의 횟수를 의미하는 줄 알았더라면 세 번만 쳤을까? 아닐 것이다.

여러분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고, 하나님 앞에 소망으로 기도하며, 헌신하고 순종하는 것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며,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어찌하겠는가?

히브리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상주시는 이심을 알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러분 만약 그것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이왕이면 더 많이 크게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순종하며 열심을 다하라. 승리하는 믿음 갖도록 인내하고 연단을 참아내며 힘을 내자.

주님이 바라시는 믿음은 무엇인가?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칠 수 있는 믿음. 우리의 장애와 환난과 고난과 한계와 복을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을 능히 꺾을 수 있는 승리하는 믿음과 용기를 바라신다.

 

달은 모양이 여러 가지여도 진짜 모습은 둥글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한가위 명절 휘영청 둥근달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향해 얼굴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힘과 용기를 내시기를 축원한다. 가끔은 초승달처럼 달빛을 조금 볼 수 있다. 그 역시 사랑의 모습이다.

 

친구 중에 황진문이라는 시인이 있다. 초승달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오늘 밤은 하나님도 잠 못 이루시어

은밀한 내 기도를 엿듣고 계시는가

눈물로 얼룩진 내 골방 창가에

살며시 걸려있는 환한 귀 하나

 

요아스가 엘리사 앞에서 흘렸던 눈물에, 하나님은 오히려 구원과 승리를 약속해 주셨던 것처럼, 초승달 같은 환한 귀 하나를 우리 가슴에 대고 엿듣고 계시다가, 오늘 한가위 그 큰 가슴에 환한 달빛 밝은 얼굴을 휘영청 밝게 비춰주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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