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0)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상쾌한 계절에, 마음을 잠근 자물쇠를 풀고 마음껏 주님을 호흡하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이 주시는 새롭게 하심의 물결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의 채취로 물씬 적셔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곳은 어디일까? 흔히 광야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은 가나안이다.
광야는 거쳐가는 길이었을 뿐이다. 그 시기가 언제 오느냐는 사실 나중 문제이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나안을 보여주셨다. 물론 2-3년 광야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곧 들어갈 가나안 땅을 보여주셨다. 약속대로 였다. 젖과 꿀이 흘렀다. 각 지파 중 12명의 대표를 뽑아 가나안을 정탐하게 하셨다. 탐스러운 포도송이, 무화과와 석류, 실과가 풍성하고 좋았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견은 여기에 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을 즉시(이 시점이 문제될 때가 있다) 차지하자고 했다. 그런데 10명의 보고서는 비관적이었다.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이 있어, 자기들은 그 앞에서 메뚜기 같은 존재라고 했다.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40일 정탐한 날 수를 년으로 바꾸어 40년간 광야로 들어가 생활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큰 맥락에서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먼저 인도하셨고, 아직 그 땅을 차지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판단에 광야를 훈련장으로 삼아 그 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가나안 없이 광야였던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광야 뒤에 가나안이 아니다. 가나안을 향한 광야였던 것이다. 광야 앞에 가나안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무의미한 고통과 어려움, 애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의미와 목적과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광야 같은 인생길로 인도실지라도, 그러나 그곳이 종착점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스라엘이 거기서 척박하고 거친 인생을 만났다. 먹을 게 없고, 마실 게 없고, 고기냄새가 그리웠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성도들, 그 사랑하는 백성들 앞에 가나안을 약속하시고, 그곳을 향해 걷길 원하신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능히 취할 수 있다, 차지하자고 했다. 대단히 용기있는 믿음이다. 정탐 후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취하자고 했지만, 불평하여 가나안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믿음으로 취할 수 있었을텐데, 믿음없는 결과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다.’ 얼핏 이러한 논리적 귀결이 가능해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자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큰 광야라는 고생길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대로 우리에게도 적용하자고, 섣불리 메시지를 전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것은 말할 수 있다. 그 믿음을 본받아 담대하고 용감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말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나안을 취하듯, 인생의 동일한 문제에, 무작정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자고 못하겠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의 사견이 들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가감없이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미련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섣부른 판단, 무모한 용기로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억지 믿음과 만용을 부릴 수 도 있다.
이스라엘이 호르마에서 당한 일을 보자. 믿음으로 용기를 내겠다고 도전했지만 참패였다. 백성들이 가나안에 대한 문제로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깨닫는, 어떤 사건을 만난다.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평한 것에 대해, 뉘우치고 회개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취하자고 공격해간다. 결과는 어땠을까? 참담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믿음이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말이다. 즉시 회개하고 그 땅을 취하고자 했지만, 이미 물 건너간 일인가? 소용없게 된 것일까? 무조건 맹신적인 믿음으로 용기를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신중해야한다.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은 대단했다. 그러나 어쩌며 갈렙과 여호수아는 아직 물불가리지 않는 나이일지도 모르다.
“응답하라 1994”에서 삼천포와 사천의 통합문제로 갈등을 빚는 장면이 나온다. 대학생들이 방학에 삼천포집에 놀러갔다. 거기서 서울에서 좋은 대학에 다닌다고 삼천포를 협상테이블에 함께 참석하게 한다. 삼천포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한 가지를 제안한다. 칠천포다. 삼천포와 사천을 합쳐서 칠천포. 그러다가 뭇매를 맞았는데, 폭소를 자아낸다. 동네 어른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아직 어려서 뭘 모른다고 핀잔한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믿음은 좋지만, 그 젊음의 패기만 믿고 생사를 걸 수 없다.
이것이 적나라한 우리의 실존의 문제 아니겠는가? 믿음이 맹신적이고 무모할 때, 그러나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기에는 인간적인 생각에 그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신앙적인 고민이 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시시 때때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내일에 대해서 알 수가 없으니, 그 망막한 길을 어떻게 갈 수 하염없이 갈 수 있는가? 다른 이유들은 다 제외하고서라도 (왜냐하면 이미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자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점은 큰 고민거리다. 민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처자식 때문, 특히 자식문제 때문.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 말씀하실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을 질책하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바라보지 못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아 불안, 염려가 들어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후회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낙자손이라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을 만나 낙망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믿음으로 용기를 내자고 했지만, 단순히 믿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역시 신앙적인 갈등을 한다. 그리고 불순종의 태도를 보인다. 때로는 회개하고 용기를 내서 믿음으로 도전할 때도 있다. 그러나 섣불리 행했다가 호르마사건처럼 큰 낭패와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철회되는 것인가? 아니면 굳게 믿어야 하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어떤 훈련과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살펴보자. 무모한 용기가 아니라 확신 넘치는 용기는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들을 주목해보자. 약속을 성취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말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복된 것을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왜 잃었는가? 아낙자손 때문이었다. 인생의 장애와 위협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과 믿음을 잃어버린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물위를 걸어오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그렇게 했을 때, 거센 파도와 바람 때문에 겁을 먹고 물속에 빠져 들어갔다. 애굽의 군대의 추격에, 말 탄자와 병거든 자를 바다에 빠뜨리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 이 중에서 재수없게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위 말하는 사주팔자가 안좋은 사람이 있을까? 기억하라. 그것이야 말로 미신이다. 설령 그런 숙명과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시작이 잘못 됐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것을 끊으시고 꺾으시고 복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예수와 제자들이 만난 소경에게 주님하신 말씀 무엇인가? 제자들의 눈에는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됐다고 비쳤다. 그래서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묻는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다. 그는 복된 사람이라는 게 주님의 선언이었다. 야베스는 날 때부터 고생하며 낳은 자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환난을 벗어나 근심없게 하옵소서.’ 간구에 주님께서 그 지경이 넓어지는 복을 허락하셨다.
광야에서 가나안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잃어버리면, 불평 불안, 괴로움이 찾아온다. 인생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못하고 약속을 믿지 못하면 동일한 문제를 겪는다.
시편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되게 하지 않으시겠는가? 약속이란 이것이다. 복되게 하시겠다는 것. 믿으라. 광야는 과정일 뿐, 성취가 아니다. 야베스의 기도대로 지금 어려움이 있다면, 곧 벗어나 지경을 넓혀주시는 복이 넘치길 소원한다. 가장 좋은 것을 기대하고 꿈꿀 수 있기를 소망한다.
두 번째, 불평하고 불만을 갖고 심지어 악평하는 습관을 버려야 했다. 이스라엘은 불평을 계속했다. 만나와 메추라기, 물을 내시는 역사가 있음에도 말이다. 이것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셔도 불평한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다. 그 불평이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뒤에, 그 집에서 은총과 평화를 빌면 그곳에 임하려니와 합당치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합당치 않게 되는 것일까? 불평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민수기는 더 어둡게 말하고 있는데, 불평을 넘어 악평은 약속의 성취를 재앙으로 바꾸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는 무엇인 줄 아는가? 불평이 반복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됐다.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하나님의 응답은 사랑과 위로와 격려와 더불어 계속된다. 그러면서 어느새 믿음이 커져서 호르마에 도달해 있었다. 사람을 성숙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적 명령이 아니다. 이유 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 무조건 적인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하길 바란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붙는 것 같아도, 사랑의 임계점을 넘으면 변화와 성숙이 찾아온다.
세 번째, 이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불평하고 불신을 갖는 이의 심령에는 하나님 거하실 틈이 없었다. 오직 감사와 믿음의 터 위에 하나님 거하실 수 있다. 9절을 보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신다.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지도하시고 가르쳐주길 원하신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갈 길로 갈지라도, 우리의 구주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인가? 임마누엘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탐 후에, 곧바로 회개하고 가나안 정복을 첫 번째로 시도했을 때, 그 패배가 호르마까지 이르렀다. 모세는 그 백성 속에 무모함과 성급한 믿음이 있을 뿐 참 믿음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올라가지 말라고 한다. 패할까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와 아니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광야의 훈련을 거치는 동안 그들이 이른 곳은 어디인가? 앞에서 호르마라고 말했다. 거기서 믿음으로 거뜬히 호르마를 차지했다.
이미 이런 변화에 성숙에 더 큰 능력을 가지게 됐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발람더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한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광야의 삶 속에,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커져 있었던 것이다. 한 번도 싸워보지 않은 이스라엘을 두려워 할 만큼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광이 나타났다.
광야를 방황하듯 살아온 40년의 세월이었던 것 같지만, 하나님 함께 하시는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가나안의 모든 주민의 간담이 녹았다(수2:24).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신 분이 계신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을 살면서도 발이 부르트지 않고, 의복이 헤지지 않았다. 그게 가나안 인들을 거기다 데려다 놓으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우리가 가면 어떨까? 하나님 함께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할 일이다. 그것만 봐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은 위대하다.
말씀을 정리하자.
여러분 하나님의 복되게 하신다고 하는 약속을 믿으라. 광야 같은 인생에서 감사의 법을 터득하길 바란다. 그 심령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동행하길 바란다.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다보면 중국이나 고비사막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한강의 물결이 동쪽으로 칠 때가 있다. 꼭 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바람이 강물을 거스를 수 없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