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9.13. / 성령강림절 후 16주)

길고 지루했던 여름날을 거두시고 선선한 바람과 함께 아름다운 결실의 계절을 펼치시는 창조주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더 높아진 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가는 양떼구름으로 가을이 슬그머니 다가온 때에, 계절을 통해 주시는 평화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진리로 영혼을 채워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어느 분이 저에게 문자로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그럴 수 있으면 선뜻 빌려주겠는데, 그럴만한 액수가 아니었다. 또 그 돈을 빌려준다고 해서 그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있는 지 없는 지 확인 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기도하자’고 할 때의 반응이다.

첫 번째는 시급한 문제가 풀려야 기도할 수 있다는 반응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무슨 소용있겠느냐는 반응을 보인다. 또 은혜가 안돼서 기도가 막혔다고 한다. 그 것부터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기도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만, 실상은 기도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다. 결국에는 자기 방법대로 해놓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한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더라고 말을 한다. 과연 그럴까?

은행에서 대출이 안됐다고, 투자자에게 투자를 받지 못했다고 실망할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없어도 그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돈을 빌리지 않아도 그 일이 진행되고 있다면,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 다른가? 심리적으로야, 무난히 투자를 받아서 하는 게 편안한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빚은 빚이다. 그러나 좀 마음에 무거움이 있더라도 그것 없이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제가 잘 아는 목사님에게 중학교를 다니는 딸이 있다. 명철하고 총명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를 학원에 보냈으면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기도제목이었다. 그게 늘 가슴 아팠다. 그런데 아이가 공부를 곧잘 해서 top을 달린다. 자.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 것일까, 아닐까? 학원은 방법이었지,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 방법 아니고서도 아이를 총명하고 명철하게 하셨다.

세 번째는 기도의 능력을 아예 처음부터 믿지 않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넘겨짚는다. 별 수 없으니까, 혹은 거절의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넘겨짚고 불신의 태도를 보인다.

이 경우들은 신앙이 있다고 말 할 수 없다. 신앙적인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정말 믿음으로 기도하는 경우다. 내 뜻대로 내생각대로 안 돼도, 내 생각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고, 믿음을 지키고 은혜생활을 하는 경우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신다면 내게 그것이 적당하고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더 좋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신뢰할 수 있기를 빈다.

왠줄 아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고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신앙은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아 보이고, 맘먹은 대로 안되는 것 같아 보여도, 나중에 보면 잘 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 신앙이다. 그때까지 인내하며 연단을 참고 견디는 사람이 복받는 사람이다. 힘들더라도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됨을 확신하길 소망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고 창조의 일반적인 원리요, 섭리이다. 그리고 경이로운 생명의 은총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열왕기하 4장은 네 가지 생명의 선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4가지 생명의 선물은 이것이다. 가난한 상황에서 빚을 갚을 만큼 충분히 많은 돈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독이 든 음식에서 건강한 음식으로, 그리고 기아에서 풍요로 진행된다.

우리 인생에서 어려운 누구나 문제를 만난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도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 문제상황에서 어떻게 되는가? 정말 끝인가? 열왕기하 4장이 보여주는 것은 기적적인 행위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생을 미로에 비유하곤 하는데, 미로에서는 잘 못된 길로 들어서면 어떻게 되는가? 타임 아웃되기 전에 되돌아 나와야 한다. 그런데 인생의 문제가 그럴 수 있는가? 미로에 비유되지만, 다른 점은 그 막힌 곳에서 새길이 열리는 체험이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자. 한 과부가 엘리사에게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의 남편은 선지자 생도였다. 그가 빚을 많이 지고 죽었는데, 채주가 찾아와서 그의 두 아이를 종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빚을 갚아야 하는 시한을 정해놓은 상태라, 하루하루 애가 타들어갔다. 그 많은 돈을 갚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생계 자체도 막막하다. 이 어려움에 처해 본 사람은 안다. 행복했던 평범한 가족이 해체되고, 특히 자녀들과 찢어져야 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말이다. 자신의 목숨을 찢어놓을지언정, 그럴 수는 없다. 당시 사회의 여성들은 지금과 같이 맘놓고 일하며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나 형편이 못됐다. 그러니 이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이 된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선지자 생도는 무슨 이유로 빚을 그렇게 많이 지고 대책도 없이 죽었을까? 그리고 여인이 엘리사에게 호소하는 것도 이상하다. 사실은 엘리사에게 호소할 것이 아니라 채주에게 가서 사정사정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엘리사가 채주에게 그 명성과 덕망을 이용해서 나서주기를 바랐을까? 아니면 뭘 기대했을까? 엘리사에게 부탁을 하면 무슨 대책과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런데 믿음이 있기에 엘리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인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아니 더 근본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도움말이다. 제가 엘리사였다면 어떨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비슷한 일을 당했을 때, 이런 마음이 든다. 뭐든 어떻게든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가능할까, 변변한 것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러면 목회자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기도하자.’는 말이다.

 

어쩌면 여인의 호소하는 눈빛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싸늘함이 감도는 하소연과 원망의 눈빛 말이다. 1절에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열왕기상18장에서도 등장하는 말이다. 오바댜가 그의 사비를 털어 선지자들을 아합와 이세벨의 손에서 건져내고 돌봤다. 요세푸스는 이 여인의 남편도 비슷한 일로 그렇게 됐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전(全) 재산으로 선지자들을 돌보고, 그 학교운영에 바쳤다가, 오로지 주의 일에 헌신적으로 살다가 죽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가난을 넘어 수많은 빚더미에 나앉아야 하는 처지가 됐고, 자녀들마저 빼앗기게 됐다. 그래서 4장 1절에서 엘리사에게 ‘부르짖었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원망, 하소연, 절박함, 절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원망하는 마음이 안 들겠는가? 우리가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더라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보상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일 수 있다. 이래서 믿음을 갖는 듯 하다가, 떠나 버린 사람도 많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이나,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처럼 말이다.

이럴 때, 기도하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자고 한다면, 어떤 마음일까? 속는 느낌일까?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그렇더라도 끝까지 이기는, 겸손한 믿음으로 승리한다.

여러분 아시는가?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이다. 제자들이 왜 자기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었는지 물으셨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다. ‘기도 외에는 다른 류가 없느니라.’ 기도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될 때, 정말 기도하라. 기도하자. 주님은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려운 처지와 형편에 눌려, 믿음으로 받들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와 간구에 주님께서 응답하신다.

 

괜히 사람을 의지하고 기대려고 했다가 실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약용 선생님이 유배생활 도중 학연, 학유 자녀에게 썼던 편지들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유배중이고 폐족이 된 신분이라 생활이 어렵자, 자녀들이 권세가들 문지방을 넘나들었다.

 

학연, 학유 보아라.

너희들은 심중에 사대부의 기상은 한 점도 없고, 오로지 권세가의 집안, 호의호식하고 사는 집안을 보고 부러워하고 침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흠모하면서, 이 아비는 다시는 돌아볼 필요도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가령 저들의 권력이 나를 공격해서 추자도나 흑산도로 보낸다 할지라도 나는 머리카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편지에서 항상 버릇처럼 말하기를 일가친척 중에 긍휼히 여겨 돌보아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개탄하더구나. 항상 은혜를 베풀어 줄 사람이나 바라면서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도움이나 받으면서 살라는 법은 애초부터 없었다. 여러 날 밥을 끓이지 못하는 집도 있을텐데 너희는 쌀되라도 퍼다가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뒷날 너희에게 근심 걱저알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보답해 주지 않더라도 부디 원망을 품지 말고 바로 미루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이 마침 도울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도와줄 힘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할 뿐, 가벼운 농담일망정 ‘나는 저번에 이리저리해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구나!’하는 소리를 입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지난날 쌓아 놓은 공과 덕이 하루아침에 재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이나 어떤 백이 될 만한 것을 의지하거나 기대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자. 이 여인이 그랬다. 우리에게도 도전이 된다.

엘리사가 여인에게 묻는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당연하다. 그러나 믿음으로 엘리사가 말하는 대로 순종한다.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했을 때, 전재산 같은 것이라고는 기름 한 병 뿐이었다. 엘리사는 가서 빈 그릇을 빌려와, 조금 빌리지 말고 빌릴 수 있는 대로, 있는 대로 빌려와 그것에 기름을 채우라고 했다.

여러분 믿음이 있는 자에게, 이것은 방법이 되지만, 믿음이 없는 자에게 이것은 방법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지만, 믿음 있는 자에게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뿐만이 아니라 더 큰 복과 은혜를 바라는 것이다. 현실적인 데 그치지 않고 미래지향적이고 소망이 있는 것이다.

 

과부와 두 아들들은 시킨대로 문을 닫고, 더 이상 빌릴 그릇이 없을 때까지, 그리고 그 빈그릇이 다 찰 때까지 기름을 부었다. 신기한 것은 정말 그 그릇에 기름이 가득가득 했다. 여인은 이 기쁜 소식을 엘리사에게 가서 전한다. 발걸음이 가볍다. 신이 났다.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는 앞으로 생활할 만큼 충분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복과 은혜를 여러분 모두가 받아누리시길 빈다.

 

어떻게 해야할까?

첫째, 축복을 받아야 한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축복은 사람이 하나님께 비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저의 여러분을 축복해야할 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깨닫고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제사장을 세우시고, 그 백성을 축복하도록 명하셨다. 그것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까지 들어가는 중요한 비결이다.

2절에 보면 엘리사가 어떻게 해줄랴 묻고 난 뒤에,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기름 한 그릇 뿐이었다. 기적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하면, 그 있는 것에, 축복을 받았을 때, 나타난다.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능력주실 때에도 동일하다. 그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막대기, 혹은 지팡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광야를 인도하는 능력의 지팡이로 삼아주셨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지금 가진 음식이 무엇인지 물으셨고, 그것을 축사하시고 축복하셨을 때, 장정만 5천명이나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엘리사는 그 기름을 빈 그릇에 부으라고 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이 축복을 받으니까, 많은 빈 그릇을 채울 수 있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진 것들을 축복한다. 마중물을 아는가? 펌프에서 물을 길어올리기 위해 떠놓는 한 바가지의 물이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귀히 쓰음을 받길 축원한다.

 

두 번째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기적은 합력하여 나타났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노력이 씨줄과 날줄처럼 만나 비단이라고 하는 기적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3-4을 보라. 엘리사는 그릇을 빌리라고 한다. 조금이 아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기름을 나눠담을 수 있는 만큼, 그 용량의 그릇을 빌려야 옳다. 그런데 그는 믿음으로 순종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30배, 60배, 100배도 넘는 용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했다.

인간의 이성과 계산, 혹은 저울을 앞세웠다면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 가나의 혼인잔체에서의 기적도 마찬가지다. 포도주가 떨어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했을 때, 아구까지 채운 뒤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전에 맛보지 못한 좋은 포도주로 바뀌어있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주님은 무리지어 앉게 하셨다. 떼를 지어 오십명에서 백명씩 나눠 앉았다.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나눠먹자하셨을 때, 그렇게 했다. 이렇게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순종하고 도전할 때 기적같은 일이 나타난다. 신비로운 일이 분명히 일어난다.

순종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이성, 내 생각, 계산, 방법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 시간 그것을 다 내려놓으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마음 주시는 대로 순종하자. 분명히 기적이 일어난다. 확인해보라.

 

세 번째는 빈 그릇이다. 차다 남거나 가득찬 그릇이 아니다. 텅빈 그릇이라야, 뭔가를 부담없이 담을 수 있다. 그래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을 준비하고 채우라.

빈 그릇은 무엇일까? 들어가야 할 내용과 용량이 정해져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바로 바라는 실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채워야할 그릇에 대한 계획을 잘 세워서, 하나씩 채워가라. 기도로 붓고, 소망으로 부어서, 나중에 그릇마다 기름이 가득 차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기름부어 채워야할 빈그릇들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름붓는 일이다. 기도하고 축복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빈 항아리요, 타다 남은 막대기 같고, 골짜기의 마른 뼈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채워지고, 가득 차면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포도주가 되고, 복음의 횃불이 되고, 생기가 넘치는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게 될 것 이다. 그래서 이시간 여러분을 축복한다.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 피난민들이 청계천에 거주할 때의 일화를 들려준다. 참 열악했고, 각박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의지는 대단했다. 어느날 허름한 옷 수선집에 들어섰다. 청계천의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녹슨 깡통이 그의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 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쉬셨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예수, 차정식·김기석, 343 재인용)

 

여러분, 빈 깡통에서 피워낸, 채송화 꽃처럼, 여러분의 삶 속에 온갖 삶의 해완과 정성으로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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