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23.)

어느 나라, 어느 시대마다 미의 기준이 있다. V라인을 강조할 때가 있었는가하면 S라인, 꿀벅지, 그리고 요즘은 힙에 관심을 갖는 것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떨까? 어쩌면 팔과 다리가 엿가락처럼 늘어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출애굽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 팔이 짧으냐 말씀하신 적이 있다.) long-다리, long-팔과는 다르다.

 

누구나 자녀를 야단칠 때가 있다. 그러면 이런 느낌을 갖는다. 속상하고 미안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좀 견뎌야 하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야단친 것을 무용지물이 되게 만든다.

그런데 이유가 있어 야단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그럴 때가 있다. 사실은 자신의 속상하고 화가 난 일 때문에 그 불똥이 자녀에게 튀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어떤가? 화가 좀 가라앉고, 기분이 좀 괜찮아지고 나면 자녀에 대해 죄책감이 밀려온다. 괜히 그랬다는 생각에 더 속상하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가도 상황은 반복되곤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자녀는 부모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마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 화가 났을 때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노라면, 자신 안에 얼마나 무자비함과 폭력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자녀가 받을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럼에도 자식이 삐뚤어지지 않고 부모 품에서, 부모를 생각해서 하는 모든 행동을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성경은 부모들에게 너희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지만 이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오히려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고, 자녀에게 더 인격적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하면서, 자신의 삶과 인격도 변화하고 성숙할 수 있는 것이다. 책 중에 이런 책도 있다. “고맙다. 아가야! 널 키우다 보니 내가 컸구나!” 사실 모두에게 통하는 말이다. 자녀를 양육하고 키우다보면, 지혜롭고 어진 부모는, 자신이 성숙하고 변화한다.

 

이런 우리의 일상사를 마주하면서, – 물론 사춘기에 있거나 이미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다르다 말할 수 있겠지만 –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같은 마음이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생각하면 말이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다고 하지만 때로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무자비한 얼굴을 드러내시기도 하신다. 왜 하나님은 무자비함에 대한 얼굴을 드러내시는 지 이유를 모를 때가 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뜻밖의 일을 만났을 때 말이다.

아브라함의 일화를 보라.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 도시의 자비를 구한다. 혹시 그곳에 의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탄원한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18:23) 그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물론 의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분명 무자비했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무자비함은 노아의 홍수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까뮈, 패스트 중 한 장면.

어느 마을에 패스트가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마을 신부는 “패스트는 도덕적인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유는 아무 죄없이 죽어가는 한 어린 아이는 무슨 죄로 인해서 죽는 것인지, 반항적인 모습으로 되묻는다.

신부는 패스트라고 하는 고난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서 리유는 이런 말을 한다.

“신부님,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죄로 인한 대가와 심판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신부의 설명이 합당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파할 것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하지 않은 채 신의 계율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에 대해 반감을 품는 리유의 문제제기에 우리 역시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젖먹이 어린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말인가? 요한복음에서 소경이 된 이는 누구의 잘못 때문이냐고 제자들이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르다. 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사건으로 이해하려는 신학적인 설명이 있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속죄제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이 자체를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신학적 논리로는 이해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속죄제물로 자기 아들을 버리셨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독생자를 버리셨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자기 아들보다 다른 아들을 더 사랑하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또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실 수 없는 것인가? 죗값을 치러야만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얼마나 속좁으신 하나님이신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역시 무자비한 발상이다.

 

이런 구분을 하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속죄의 재물 삼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셨다. 아들을 버리시기 위해 이 땅에 던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어둠 속에 빛을 비추며,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부르시기 위해서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속죄의 재물이 되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속죄의 재물이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아들을 재물삼는 아버지라면, 우리가 사랑으로 고백할 하나님의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무자비한 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7)고 말씀하셨다. 저는 이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또한 저는 아들 예수 때문에 하나님은 무자비함을 철회하셨다고 굳게 믿는다.

 

64절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말이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의 길로 초대 받았는데, 그 주님을 믿지 않는 대신, 예수님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요한복음1장4-5절은 서곡처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하고 있다.

 

자녀를 통해 무자비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통해서 무자비하심을 거두고 자비하시기로 하셨다. 나는 이것이 속죄의 은총이라는 신비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대속의 제물로 예수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로 인해, 하나님은 무자비한 심판과 저주와 재앙을 거두시고 복과 은혜를 오히려 부어주시기로 작정하신다.

 

어느 서울남연회 어느 감리사님의 이야기인데, 목회자 자녀로 자라났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늘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손해를 봐야 했다. 혼자 구석에서 부모 모르게 울어야 할 때도 많았다. 엄마 아빠는 늘 교인들과 그 자녀들의 편인 것만 같아서, 서러웠다. 성도들에게는 사랑이 많은 목사님이었지만, 자녀들에게는 때로는 무자비하게 느껴지는 부모였다. 다 성장해서, 자기가 목회자가 되고 보니까, 목회자였던 부모님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말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심정을 이해를 하고 나니까, 치유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생각해도 점점 더 사랑이 커져갔고,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도, 사실은 더 잘 해주셨다. 그런데 어릴 때는 그 상처받은 것만 생각해서 아버지를 무자비하게 여겼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목회자로서 정말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아버지 목사님의 마음이 무엇이었을까? 아들 때문에 자신의 무자비함을 지우려 정말 노력했을테고, 사랑의 지경을 넓히려 사모였던 어머니와 함께 숱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아시는가? 아들을 살리고 위하는 길은 자신의 무자비함을 지워내는 일일 수밖에 없다. 폭력과 보복이 아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럴 것 같지만, 아니다. 사랑의 능력과 지경을 넓혀야만 해결될 수 있다.

 

이런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그 자녀에게 모든 권한을 준다는 것이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줌을 통해서 그 삶을 보상하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아니실까? 십자가에 죽으신 독생자를 다시 살리셨다.

두 번째 그 자녀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고맙다는 것이다. 그 자녀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아들을 사랑하길 원하신다. 아끼고 위하길 원하신다. 우리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길 원하신다.

적어도 내 자녀와 너무나 친하게 잘 노는 아이들을 보면, 내 자녀를 위해서 그 친구들에게도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어느 부모에게나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에게 물으실 때,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고백한다. 오늘 이 믿음과 고백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한다.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백부장이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밑에서 증거한다. 백부장은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사람이었다.

부활하셨다.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가슴이 뜨거웠다.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먼저 달려오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저는 특별히 구원자 예수님이라서도 좋지만, 로마 세계의 모순(평화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지독히 폭력적인) 속에서도 참행복을 일궈내는 능력을 보여주셨다.

내일의 염려, 근심보다 오늘 내게 있는 작은 평화에 충실하며, 행복에 충실한 것은 모든 모순을 이겨내는 비밀이다.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셔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분이시다. 예수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그 권세와 능력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신다.

 

그 아들 예수를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 예수를 사랑하며 믿음으로 구하는 이의 간구에 주님께서 응답하신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그 권세와 능력을 허락하신다.

 

정현종 시인이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라는 시에서 이런 꿈이 있다고 말한다. 방이 많은 집을 하나 짓고 세상의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이다. 그가 적시하는 이들 가운데 눈길이 가는 것은 “끌어안을 때는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사람, 발이 지평선을 감고 다니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 아니시고 누구겠는가?

 

오늘 우리를 끌어안길 바라시고, 가기를 귀찮아하는 곳 없이, 우리 삶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하고, 예수 안에서 그 능력과 권세를 힘입기를 바라신다.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