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9. / 성령강림절 후 11주, 광복주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열방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 뜻 깊은 광복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압제의 포효가 그치고, 자유를 맨 사슬이 풀리던 날, 해방의 감격으로 이 민족이 흘린 눈물을 상기하는 때에, 또 하나의 언덕인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 됨의 찬가를 부르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러분 이 사람 한 번 꼭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거금을 사용해서라도 말이다.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우는 워렌 버핏은 매년, 그와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경매에 붙인다. 2천년도부터 시작됐는데, 경매에 낙찰받은 사람은 지인 7명과 함께 3시간 식사를 할 수 있다.

(영상)

 

최고 경매가는 수년전 37억원이었다고 한다. 식사비용은 일인당 7-8만원 선이다. 평소 식단대로 버핏은 낙찰받은 사람과 식사를 한다. 언제 주식을 사고팔지에 대한 것만 묻지 않으면 뭐든 것에 자신의 생각을 답해준다고 한다. 경매에 응하는 사람은 이렇게 많은 돈을 사용해서라도 버핏과 점심식사를 하려고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묻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일까?

 

성경에서 생각난 사람이 있다.

 

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한 밤 중에 말이다. 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에 관해 물었을까? 정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정말 버핏은 모든 것을 잘 대답해주고 수십억원의 가치있는 답을 주었을까?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식사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의미있고 뜻깊었던 시간으로 여기는 것 같다. 어느 사람은 ‘투기꾼’에서 ‘가치 투자자’로 거듭났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돈이 아깝지 않은 시간으로 여긴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덕지는 많다. 진짜 거듭나는 것은 이런게 아니다. 돈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어쨌건 당사자가 만족하니, 뭐라 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무슨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했을까?

 

이런 상상을 해봤다. 만약에 워렌 버핏이 아니라 솔로몬을 만나 점심식사 한 끼를 한다면 그는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은금으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누가 나보다 이 모든 것을 다 해보았으랴’, 묻는다. 그는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사람이다. 그러나 은금을 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택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은 법이라고 말한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고귀하고 값진 것인지, 우회적으로 드러내 준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다.

 

인생이 다소 허무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감동이 되고 크게 공감된다. 가치 있는 삶을 향한 방향설정은 인생의 의미를 재설정해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인생을 누구나 추구하고, 그래야겠다는 다짐을 준다. 그 자체만으로도 참 의미있는 시간이다.

만남은 성공적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어땠을까? 아쉽게도 성공적이지 못하다. 다소 불편하다. 어떤 사람은 너무나 불편하게 여겼던 사람도 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이해했겠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고, 부자청년은 그의 가진 것 전부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에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표적을 기대하고 구했으나 실망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실패했던 것은 아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이들은 세상 그 무엇도 자신의 짐을 덜어 줄 수 없었는데, 예수님에게서 쉼을 얻었다. 그리고 힘과 용기가 샘솟아, 자신이 무겁게 지고 있는 것만 같았던 인생의 짐들이 무겁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갈급하기는 하지만 죄의 문제로 그 사랑을 기대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죄인들, 세리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 자체였다. 삭개오가 변하고 마태가 예수를 좇았다. 간음하던 여인이 더 이상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을 받았다.

병든 자들이 예수님의 지극한 정성과 돌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낫게 되고 치유됐다. 자신의 처지와 형편 때문에 늘 수모를 당하던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난생처음 칭찬을 받았다.

심지어 날품팔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은, 노동력이 미약하여 아무도 자신을 써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까지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불공평할 정도로, 오히려 공평한 사랑으로 쓰임 받고 가치있는 대우를 받았다.

내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는 불투명한 미래를 가진 이들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권고와 천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약속 앞에 희망이 솟구쳤다.

 

마치 예수님을, 빵을 먹는 것처럼 마음에 영접하고 모신 이들마다, 영원에 잇댄 새생명의 능력이 솟구치는 것을 경험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성경이 이것을 증거한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아니하고 영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68절에서 베드로가 하는 고백을 보면 이 말씀은 이렇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55절과 56절을 보자.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예수님 말씀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생명의 떡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생명의 양식으로 취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알기는 하는데, 먹지는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먹었을 때,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시편은 주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고백한다.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양식으로 취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첫 번째,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이사야 55:1-2을 보자.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갈급함을 위해서는 세상적으로 취하던 것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세상적으로 취하던 것이 사실은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들 아니었는가? 지금 당장은 청량음료처럼 시원함과 짜릿함이 있을지는 몰라도 더 목마르게 하는 것들은 아니었는가? 세상일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우울하게 되지는 않았는가?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락까지 추락해 본적은 없는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다. 확신과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한다.

 

두 번째, 예수님을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있다는 뜻이다. 귀신처럼 따라다닌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물론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지만, 이 뜻은 예수님을 묵상하는 자가 경험하는 신비이다. 예수님을 묵상하는 자에게 주님은 늘 함께 하신다. 지혜도 주시고, 용기도 주시고, 희락도 주시며, 의와 평강을 얻게 하신다. 내게 왜 이 말씀을 주실까? 이 일을 경험함으로 어떤 깨달음을 얻길 바라실까? 주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는 무엇일까?

자기 인생에서 주님을 음미하라. 어떤 맛을 느낄 수 있는가? 매운맛, 쓴맛, 아린맛? 예수님의 맛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내게 주는 평안의 맛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주님의 묵상을 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묵상하다보면 감사와 기쁨이 넘쳐야 한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선하시고 사랑이 끝이 없으심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게 정말 중요한데) 나눔과 섬김이라는 실천을 통해서 주님을 생명의 떡으로 취하게 된다. 거기서 정말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취한 능력이 나타난다. 우리가 음식을 취하고도 힘을 쓰지 않는다면, 일하지 않는다면 탈이 나지 않는가? 소화라는 말 자체에 이미 나눔과 섬김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자.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라는 헌신으로 5천명이 먹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나눔과 섬김을 통해 분명히 일어난 기적이었다. 기적과 능력은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대로 작은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찾아왔다. 그러니 우리가 말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예수님을 온전히 소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알기는 하는데 먹지 않는 것이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먹을 수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생명은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49-50)

 

광야에서 먹은 만나란 무엇인가? 질문을 바꾸어서 우리 인생에서 취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세상적인 것들은 참생명을 주지 못한다. 욕심과 탐욕에 빠뜨리고, 가지고도 부족하다고 여기게 만들고 염려와 불행에 빠진다.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이 불의와 거짓을 만들며 분노와 억울함을 낳게 하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움에 시달리며 결국 소망없는 종말을 맞는다.

 

그런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그 나누고 섬김을 통해 오는 주님 생명의 참 기쁨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온몸에 섬김과 나눔의 실천으로 소화되어 나타날 때, 그리스도의 영생하는 신비는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참 생명의 양식이요, 능력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사랑의 은혜가 충만하길 빈다. 평화가 가득하길 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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