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2 / 성령강림절 후 10주)
다윗과 밧세바의 부정에 관한 이야기는 다들 아는 바이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그것을 감추기 위해 그 남편 우리아를, 밧세바와 잠자리를 하도록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도록 한다.
오늘의 말씀은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남편의 전사소식에 밧세바는 ‘소리내어’ 울었다(v.26).
다윗은 어땠을까?
밧세바의 눈물은 진심이었을까?
대부분, 거의 모든 부분에서, 성경은 진의를 기록한다. 밧세바의 눈물이 진심이 아니라, 순전히 거짓이었다면 그런척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 눈물의 진의를 따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을 좀 바로잡아야겠다.
다윗을 두둔하려는 사람들의 편견에 따른 해석이다.
그의 부정을 조금이나마 옹호하고 덮어주고자, 이런 해석을 덧붙이곤 했다.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하기 위해 그 시간에 목욕을 하고 있었고, 먼저 꼬였다는 것이다. 다윗이 어쩔 수 없이 그 꼬임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억지다.
그러면서 이런 변명도 덧붙인다. 당시에 왕들은 정약결혼을 했기 때문에, 밧세바를 아내로 취한 것은 그렇게 크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윗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인가?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인가? 죄를 지어도 좋게 봐주거나 이해해줘야 하는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다윗에 대한 무한한 신뢰 때문에, 다윗의 잘못 보다, 밧세바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불신앙이다. 하나님 외에 완전하고 선하신 분이 없다.
죄를 저지른 사람보다 죄를 짓게 한 사람이 더 나쁘다는 논리는 타락한 논리다. 아담은 하와에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죄를 범한 뒤에는 그 핑계를 하와에게 돌렸다.
잘못한 것에 대해 냉정하지 못하고 편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다윗은 저녁 때 왕궁 옥상을 거닐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기를 좋아하는 신실한 다윗이었다. 밧세바의 목욕하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자, 정욕이 불일 듯 일어났다. 그러면 안되는데, 결국에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 말았다.
다윗의 스캔들은, 인간이 죄 앞에, 개인의 성결과 경건이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런 식의 주장과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내심, 그 속내가 탄로날까봐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죄에 대해서 동질성을 느껴서도 안된다. 다윗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실한 사람도 죄를 짓는데, 자기가 죄를 짓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자. 거룩한 사람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가? 훌륭한 사람은 어떤가? 권력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어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느 누구도 없다. 누구나 죄인일 뿐 자신의 성결과 경건을 이유로 남을 정죄하거나 멸시할 수 없다.
아니 거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있기는 한 것일까? 주의하라. 그것을 구분하려는 사람들의 편견과 독선을 말이다. 그 속에는 필시 사람을 하대하고 깔보고 무시하려고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폭력적인 교만이 숨어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속죄를 전제로 한 것이다. ; 나의 죄인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어,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려는 십자가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특별히 다윗은 신분과 권력과 명성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남핑계대고 합리화하면, 한 사회의 공의는 무너지고 만다. 분명한 것은 다윗은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해서 대단히 큰 잘못을 범했다.
오늘의 성경말씀 속에서도 이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밧세바에 대해서 보다, 다윗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27)는 것이다.
죄를 짓고 나면 눈이 어두워진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보지 못한다.
다윗은 이 일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려고 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화과 잎을 엮은 치마로 감추려고 했다. 하나님이 찾으실 때, 두려워 숨는다. 가인은 하나님을 향해 낯을 들고 예배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기뻐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이것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영적인 현상이다.
나단이 다윗에게 들려주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한 사람은 부자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하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직접 사서 기르는 작은 새끼 암양 한 마리 뿐이었다. 이에 비해 부자는 엄청 많은 소와 양 가지고 있다. ‘직접 샀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가난한 사람의 작은 소망이 읽혀지는가? ‘직접 샀다’는 말을 바꾸면 어렵게 장만했다는 말이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작은 것’을 어렵게 장만했는데, 부자가 강제적으로 자기 힘을 이용해서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한 마리 암양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자기에게는 암양 한 마리가 아무 것도 아닐지 몰라도 그의 꿈과 희망까지 빼앗아 버린 것이다.
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어두워진 다윗의 눈이 다시 밝아지고 뜨이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나단이라는 선지를 통해 일깨우신다. 이것은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보며 우리가 그것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의 반응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다. 이 경우에 율법대로라면 새끼 양을 네 배나 갚아주면 된다.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도록 시정조치를 내리면 된다. 그런데 다윗은 이 말을 듣고 의분을 느꼈다. 이 일을 행한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쉽게 말하자면 ‘죽일 놈’이라고 격분하고 있다.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필요한, 격한 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뭔가 있는 것 아닐까?
나단이 이 이야기를 다윗에게 들려주었을 때, 분명히 다윗의 부정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7절에서 나단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기 까지는 전혀 자신인줄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다윗은 좀 다르게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윗은 그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공감하면서 들었다. 자신이 예전에 그랬기 때문이다. 사울이 맏딸로 다윗을 사위 삼고자 할 때, 자기 집의 넉넉지 못한 처지와 형편 때문에 낙담한 적이 있다. 더구나 사울은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준다고 해놓고, 그 때가 되자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냈다. 다윗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신의 없는 형편 때문에 무시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또 다시 사울의 작은 딸, 미갈이 다윗을 맘에 들어하자, 미갈을 다윗에게 주고자 한다. 그때 다윗은 종전의 경험 때문에, 왕의 사위가 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냐고 냉소한다. 얼마나 많은 비용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푸념한다.
겉으로는 빈곤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함을 알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가난한 것은 아니겠지만 상대적인 빈곤의 문제 때문에 오는 박탈감을 다윗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단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다윗은 더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처지와 형편에 있어봤기 때문이다. 그 설움을 알기에 (5절)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격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단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다윗은 어리둥절했다. ‘누구? 가난한 사람? 토색한 사람?’ 다윗은 어안이 벙벙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기가 우리아에게 했던 일은 다름 아닌, 사울의 수법이었다. 전장에 내보내서 제거하려는 수법 말이다.
다윗에게 딸을 주겠다는 것은 구실이었다. 속셈은 위험한 전장에 (다윗을) 내보내 죽이려는 것이었다. 다윗을 시기하여, 직접 손대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전력은 블레셋이 훨씬 우세했다. 무기도 블레셋은 철기라고 하는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도 놋과 구리로 만든 청동기로 만든 무기뿐이었다. 이 블레셋과 전투를 하라고 명했다가, 미갈을 아내로 얻는 조건으로 블레셋 군인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라고 했다. 사울은 반드시 전장에 나가면 죽으리라 판단했다. 사울의 처사를 생각하면 화가 나는 일이다.
그 일이야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고 도우셔서 해냈지만, 지금은 다윗이 그 짓으로 우리아를 죽게 했다.
저는 이것을 ‘정치적 위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겉으로는 다윗을 아끼고 위해서 사위 삼고자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보고, 이 일을 평가할 것이다. 다윗은 바보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공은 모두 사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짓을 다윗이 하고 있다. 겉으로는 우리아를 위해서 휴가도 주고, 아끼는 듯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전장에서 죽게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의 모습은 아닐까? 우리의 모순이 바로 이런데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도 당하고 싫었으면서 자기도 남에게 그렇게 한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이런 이중적인 잣대로 윤리와 도덕을 말하려고 하고 정죄하려고 한다.
전령이 당신의 종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다윗의 진짜 속마음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다윗은 그 죽음을 용맹한 죽음으로 포장한다. 요압에게 걱정하지 말고 그 안타까움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힘써 담대하라고 전령에게 전한다. 짜놓은 각본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 지휘관의 죽음을 통해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전우애’라는 의식은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다윗은 ‘역시 훌륭한 왕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사람들은 칭송해도 하나님은 악하게 보고 계시다. 이 사회가 허다한 죄를 감추고 권력자들이 죄를 덮으려 해도, 하나님은 분명히 불의한 것에 대해서, 공의롭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악하게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나단을 통해서 엄중하게 말씀하신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것 같이, 그 보다 더 큰일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아내들을 빼앗아 백주대낮에 동침하게 될 것이고, 그 집에 칼이 영원토록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이 죄를 은밀히 행했지만, 하나님은 온천하가 보는 앞에서 이 일이 벌어지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절망하게 된다. 탄식하게 된다. 사실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나단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듣고 있을 때, ‘바로 당신의 이야기’라고 일깨워줬던 것처럼, 성령은 오늘 이 죄와 저주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임을 일러주신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을 들으라.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그는 울면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진정 죄를 뉘우치고 있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으로도 죄의 문제를 덮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자백한 것이다. 나단이 응답한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다. 다윗에게도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은 남아있고 그가 살면서 앞으로 받아야할 심판 아닌가?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한마디 남기고 돌아간 것이 더 불안케 하고 염려하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러분 다윗의 경우는 이랬지만, 성경은 이런 부분도 있다.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게, 그 저주와 징계의 채찍마저 철회하시고 거두시는 내용 말이다. 오히려 그를 더 불쌍히 여기시고 복을 주시는 장면도 있다. (로루하마, 로암미를 루하마, 암미라고 부르실 뜻을 호세아를 통해서 보여주셨다.)
그러고 보니까, 성경은 우리의 죄의 문제에 대해 우리보다 더 아파하고 신음하는 분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안에서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담당하기 위하여,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성령이 또한 예수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다.
성경은 어느 누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로 결단하는 자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증언한다.
로마서8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도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굳게 믿고 구원의 신비와 은총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죄로 인해 징계를 당하는 것 같은 인생을 당할 때도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말씀을 들어보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율법 아래에서는 징계 같아 보여도, 복음 아래에서는 우리를 온전히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영상)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성숙한 신앙을 위해서 오늘 성경에서 당신이 바로 그사람이라고 하는 음성을 놓치지 말자.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용서와 자비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죄인됨을 시인하고 고백하면서 그 깊은 사랑과 신비에 복받는 믿음이 동시에 열리는 것이다.
남핑계를 대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죄의 문제에 직면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 피하고 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인정하고 나와 용서와 자비를 얻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죄인임에 눈을 뜨고 깨닫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믿고 주님의 용서와 긍휼을 경험하길 원하신다. 거룩은 타고난 게 아니다. 죄인됨을 부정하고 의로운척해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다. 죄인됨을 인정하고 예수의 길 길을 걸어가는 게 거룩이다. 결단과 거둠의 기도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