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26. / 성령강림절 후 9주)

 

 

 

  • 뻔하다고 결론짓는 삶의 모습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물론 못하실 일이 없다고 믿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는 게 있다. 그 현실에서는 어떤가? 의심을 하곤 한다.

 

누군가 보자고 해서, 만났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직장 상사의 무언의 압박 때문이었다. 사직서를 내라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그러고 싶다. 작정하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다. 비열하게 굴고, 그 앞에서 굴욕감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처자식이 있어서 그러지 못한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없는 불신자였기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퇴직금을 받아서 뭐라도 해볼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이런 일을 자기가 당할 줄은 몰랐을 뿐이다. 그를 무기력하게 하는 게 있었다. 이직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나이가 있어서 받아줄 데가 있을지 부터 회의적이었고, 어디를 가나 무얼 하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며, 어떤 방법이 있는가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음을 본다. 낙심된 마음 때문에 희망을 잃었고, 기대와 용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일단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하면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뻔한 이야기를 할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피식 웃었다. 목사에게 들을 이야기가 뻔한 것 아니겠는가? ㅎㅎ

 

그런데, 사실 뻔한 이야기에 길이 있다. 어려움 당하는 이에게, 진심으로 ‘힘과 용기를 내라’는 위로의 말은 뻔한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하느냐고 따져물을 수 없다. 그럼 정말 포기할 것인가? 용기를 내고, 힘을 내서 이겨내고 승리해야 한다. 진짜 어려운 사람은 이 뻔한 말 한마디에도 큰 위로와 힘이 된다.

 

‘뻔하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알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달리 말하면 이런 말일지도 모른다. ‘해보지는 않는다’ 말이다.

 

제 입장에서 생각해보겠다. 믿음 없는 사람들 중에 어려움에 처해서, 저를 생각하고 불러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개중에는 뻔한 경우가 있다. 이미 자기결론과 대답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저 자기이야기나 넋두리를 하고 싶을 뿐이다. 무슨 설교를 듣거나 교회에 와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다.

뻔하다고 생각한다면, 바쁜데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만날 필요가 있을까? 이 무슨 시간 낭비인가? 그런데 저는 그렇게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정성으로 대하는 만남 속에는, 예상치 못한 은혜와 복이 있다. 그 값진 보화를 캐낼 수 있는 사람은 만남 자체를 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 아니시고 누구시겠는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세리나 죄인들에 대해 뻔하다고 생각하고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을 때, – 정작 자기들이 뻔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르면서 말이다. – 주님은 하나님의 잃었다가 찾은 자녀라고 기뻐하셨다.

 

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없는 게 있다. 이성과 자기 생각은 많을지도 모른다. 자기생각은 그 어떤 것보다 신중하고 사려 깊을 수 있다. 실력도 있고 능력도 있는 데다가, 나름 정확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없는가?

 

믿음이 없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기적같은 일이나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거나 기대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성경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을 알면서도 뻔하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믿음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시험과 환난을 소망을 가지고 인내와 연단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 길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말씀 속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런데 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자기판단, 자기생각, 자기방법, 자기방법, ‘자기’를 내려놓고, 그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황논리에 쉽게 갇히기 쉬운 사람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답답한 상황에 대해 결론을 지어버리고 하나님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믿음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심령이 이와 같이 뻔하다는, 신앙의 무의식으로 굳어져 있다면, 이시간 바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채워지길 기대한다. ‘뻔하다’는 내 생각을 깨고서 주님을 바라볼 때, 기적이 일어난다.

 

 

  1.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

에베소서는 한편의 아름다운 감동과 은혜가 되는 바울의 집약적인 신학사상을 읽을 수 있다.

에베소 교회의 세워짐은 단순히 사람의 노력과 의지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에베소 교회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없이, 세워진 교회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에베소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연합된 연결이 있을 때,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를 이루는 창조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1:11)고 말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1:23)

 

교회를 창조주 하나님의 지으신 섭리 가운데 이해하는 바울의 믿음은, 우리 신앙의 공동체가 꼭 고백하고 붙들어야 할 믿음이다. 이 문정포도나무교회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다.

 

그런데 전제가 있다. 성령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확신 있는 믿음으로, 그것을 자기 공로라 자랑치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2:8), 무한한 감사와 찬송과 헌신을 주님께 돌려야 한다. 이 가운데 필히 역사하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인가? 성령이시다.

 

성령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한다. 구원의 확신을 준다. 그리고 삶의 자리 어디서나 평화(평강, 화평, 화목)의 능력이 나타난다. 2:22을 보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쉽게 상황논리를 들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신앙생활을 저버리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상황이라는 논리 때문에, 불신앙의 길을 택하게 된다.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은, 혼자는 힘들고 어렵지만, ‘함께’라는 말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성숙과 상황까지도 이겨내는 비결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꼭 견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고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그 소식이 에베소 교회에 들려왔다. 이단이나 유대인의 공격으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도 겪었다. 권세자들의 박해와 핍박도 있었다. 마귀의 간계가 교회와 신앙인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 어디라고 어려움이 없겠는가? 그 때마다 상황논리를 따르자면, 어느 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이야 문제해결을 하는 것 같지만, 또 다른 문제에 휘말리고 휩싸이게 된다. 우리 인생의 모습도 그와 같지 않은가?

 

바울은 염려하는 것이 있었다. 어려울 때에, 자신을 의지하고 기댔던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고, 믿음을 흔들리게나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라. 믿음 안에 서면 능력이 나타난다. 주님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것을 담대히 믿어 하나님 앞에 서길 원하신다.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여러 환난과 고통에서 승리한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한다.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바울이 당하는 환난에 대한 것뿐이겠는가? 우리는 수많은 환난과 고난에 대해 낙심하곤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낙심치 말라’고 전한다. 아시는가? 바로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하셨다.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은 능히 이길 힘을 주시고, 능력을 보여주실 것을 확신하라.

 

 

  1. 상황 속에 견지해야 할 신앙

어렵다고 말하는 상황과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라는 것 속에서 우리가 견지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사모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계시기를 간구하라(17).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제일 먼저 예배할 마음을 잃어버린다. 기도하기를 게을리 한다. 인간적인 생각이 많이 든다. 결국은 자신의 판단과 고집대로 한다. 존재의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이 찾아든다.

기억하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회의감 속에 서서히 빠져든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절망 속에 희망이 샘솟는다. 슬픈 마음과 비통함 속에 희락과 평강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만난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어둠 속에 빛을 밝혀주심을 체험하게 된다.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하셨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주님은 기도제목을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지혜와 능력과 힘이 돼주신다.

 

둘째, 우리 지식과 상식을 초월한 주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18). 이 부분을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초월하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20절을 보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씀한다. 한마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은 내가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지식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윤리, 내가 알고 있는 방법, 내가 알고 있는 사상, 내가 알고 있는 사랑 말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한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이 뻔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지식 때문에, 알면서도 하지 못한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윤리의 저울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고 자결했다. 베드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양심의 저을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 빈그물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철회된 줄 알았다. 그러나 어땠는가? 베드로에게 넘치는 찾아오셨다. 그 어느 약속 하나 철회되지 않았다. 이것이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우리가 주님 앞에 연약한 죄인이지만, 주님은 그 사랑을 깨닫길 원하신다. 상황논리에 따라 주님을 배반한 적도 있었고, 거역한 적도 있었지만,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불순종했고, 불신앙의 부끄러운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셋째,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굳게 붙들어 주시기를 구하라(16). 16절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간구한다. 우리의 속사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변덕스러움, 연약함, 간사함, 방정맞음, 일구이언?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이다. 귀신들린 여자에게서 귀신이 나오게 했다. 그 여자를 이용해서 이득을 챙기던 사람들의 소득이 줄자, 바울을 고발해서 감옥에 갇히게 했다. 심하게 매를 맞고 온몸이 찢겼다. 차꼬를 발에 채우고, 성경은 그를 깊은 옥에 가뒀다고 증언한다. 한밤중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깊이 갇힌 옥에서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다. 옥중의 죄수들이 모두 함께 들었다. 성령이 함께 하시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낙심치 않고 더욱 기도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고난과 핍박과 환난을 당해도, 우리 속사람이 강건하여 기도와 찬송을 할 때, 매이고 묶이고 갇힌 상황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속사람이 강건치 못해, 상황에 이리저리 끌려간다.

바울의 간구처럼,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믿음을 견지해야 한다.

 

여러분의 상황을 뻔하다 생각하지 말고, 세 가지 신앙을 견지하기 바란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라. 자기 지식을 초월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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