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7.19. / 성령강림절 후 8주)

  1. 쓰러지신 하나님

그림 하나를 보겠다.

이 그림은 비아 돌로로사 제 4처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림이다. 비아 돌로로사는 슬픔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는 뜻인데, 많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길을 걷고 있다.

제 4처소는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만나신 곳이다. 이곳에 아르메니안 교회가 세워져 있다. 바로 그 안에 걸린 그림 중 하나이다.

 

그림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황무한 언덕을 십자가 지고 오르시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셨다. 손목이 꺾여있고, 머리와 십자가가 부딪친 땅에는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갈라져 있다. 여러 가지를 감상할 수 있게 한다. 그냥 넘어진 충격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넘어진 충격이다. 넘어질 때, 반사적으로 팔을 내밀어 충격을 완화시키는데, 손이 십자가에 묶여 그럴 수 없다. 꺾인 손목은 그 절실함을 나타내준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얼굴은 땅에 처박히듯 했다. 그렇게 넘어진 충격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땅이 갈라질 정도로 세게 부딪쳐서 아프다. (여러분 잠시 감상해보라.)

 

비록 그림이지만 작가는 예수님의 고통을 상투적인 넘어짐에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넘어짐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에서 어떠한가? 예수님만 이런 고통으로 넘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넘어진다. 그냥 혼자 금방 일어날 정도의 넘어짐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넘어짐을 경험한다. 자기의 손과 발은 어딘가에 꽁꽁 묶이고, 아무 것이라도 해 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없어 애태울 때가 있다. 그리고 꺾인 손목처럼 최후의 안간힘까지 써보지만 소용없는 그런 인생의 문제를 만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있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지고 있는 인생의 질고를 주님께서도 지셨다.

 

이 그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자.

‘쓰러지신 하나님’, ‘쓰러진 나를 세워주시는 하나님’ 이 둘 중 어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일까? 쓰러진 나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기를 바라는데, 하나님이 쓰러지셨다니……, 나는 누가 일으켜 주며, 예수님은 누가, 혹은 어떻게 일어나실 수 있을까?

 

  1.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다윗은 성경 곳곳에서 자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구원의 뿔이시요, 산성이시라’고 고백한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 신실한 믿음을 찬양으로 표현한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위대한 왕이었다. 그가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형통케 됐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평탄한 길 가운데 서서, 주님을 찬양하는, 믿은 좋은 신실한 이가 보여주는 고백 같은가?

 

그러나 다윗의 이 고백은 평탄한 인생길 가운데 부른 노래가 아니다. 폭풍과 광풍이 부는 것 같은 인생을 만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큰 시련과 고통, 그 눈물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 요새, 방패, 피할 바위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하고 염려하는 가운데, 아니 공포가 휘몰아치고 고통스럽고 괴로워하는 중에 이 노래를 불렀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사망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다.”(삼상20:3) 이 말만큼 고통에 처한 형편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없을 것 같다. 사울의 시기심 때문에 다윗이 고통을 겪을 때, 그 괴로움으로 요나단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의 직접적인 폭력 때문만이 아니라 싸늘한 눈총, 언어적 폭력, 감정적 폭력으로 얼마든 사람이 죽고 살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왜 사울 때문에만 이겠는가? 밧세바에게서 난 첫아이가 죽었을 때, 괴로움도 괴로움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불의에 대해 징계하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죄의 문제로 고통스럽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한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32:4) 죄 중에, 자기를 버리시고 저주하시는 것은 아닌지, 영적인 고통을 당했다. 암논이 이복형제였던 압살롬에게 살해당했을 때,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켜 도망을 갔을 때, 그 압살롬이 결국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자기 앞에 놓였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인생의 고통과 절체절명의 위기가 있었다.

‘살고 죽는 것이 한 걸음 차이라’ 사실 그렇다. 생과 사가 먼 것 같지만, 고통당하는 이에게는 어쩌면 한 걸음도 안될 수가 있다. 그마 만큼 절박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때마다 다윗은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죄를 용서하시고 보호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고백한다.

 

시편23편의 고백 역시 평안한 자리에서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고 적들의 화살이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믿음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양을 지키는 목자처럼,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다윗을 지켜주실 믿고, 살고 싶지 않은 고통 속에 그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힘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체험했다.

 

그에게 큰 도움이시며 힘이 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요새, 반석, 피할 바위, 환난 중에 큰 도움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믿음이 인생의 곤고와 고통을 이기게 한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존재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우시며 인도하신다. 이런 확신을 가지라.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고통과 어려움이 그를 둘러싸고 있지만 싸이지 아니하며 낙심치 않는다고, 바울의 안위를 염려하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했다. 왜냐하면 주님 때문이다. 주님은 바울의 보배 같은 분이었고,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주셨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잘났다고 하려는 말이 아니라, 이 은혜를 체험하라는 권고이다. 그 보배를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가지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있기만 하면 된다. 이 시간 그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라.

 

  1. 불확실성 속의 믿음

다윗은 무엇을 믿었는가? 믿음의 근거와 바탕이 됐던 것은 무엇인가? 그렇기에 위기와 환난, 고통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요, 방패시요, 피할 바위시며 큰 도움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었는가? 성서일과로 전하는 오늘 말씀은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오늘 시편 속에 들어있는 고백의 배경은 무엇일까? 3-4절을 보면 이 시편의 배경이 되는 기억을 엿볼 수 있다. 사무엘하7장에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언약이다. 사울을 왕으로 삼았던 것을 후회하시고 다윗을 택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사울 왕은 버렸지만 다윗은 버리지 않으시고 그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혹 사울처럼 죄를 범하면 사울은 버리셨지만 다윗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할지언정 그 왕위는 영혼이 견고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바로 이 약속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은혜에 대한 약속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이 잘되고 평안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이루어지리라는 것이 쉽게 믿어지고 은혜가 되는 때가 있다.

그런데 인생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문이 생기고,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워 쉽게 믿어지지 않는 때도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다. 믿음의 증거 밖에 없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눈에 보이는 확신 속의 믿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 속에 믿음이, 지금 이 시편의, 아니 시편전체의 기조이다.

다윗은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시겠다고 하는 언약’을 믿었기에, 그 믿음을 근거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다윗이, 아니 우리도 역시,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맡은 임무와 직무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큰 도우심이며 힘이시라고 믿음으로 고백하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먼저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아시는가? 믿음 있는 심령이 주의 음성을 확신 있게 듣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능력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 20절에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하나님의 은총을 떠올리는 다윗의 기억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여러분의 의지요 선택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다윗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려움과 환난이 찾아올 때, 믿음을 잃고 만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요, 의지요, 이런 저런 이유와 방법으로 부르신 섭리 때문이다. 다윗은 이 믿음을 놓치지 않았다.

21절에서 계속이어지는 고백은,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해야 마땅하지만, 믿음 없는 자에게는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라고 믿음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버리기 쉽다.

그러나 다윗은 쓴 쑥보다 더 쓰디쓴 고통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마음에 새겼다.

 

  1.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을 부으시고 왕위를 허락하시며 약속하셨는데, 우리는 무엇을 받았는가? 아무것도 약속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윗은 기름부으셔서 은총을 약속하셨지만 사울은 버리지 않으셨는가? 이처럼, 경우에 따라 다른 것이며, 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도 의심스럽게 여길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소리이다. 예수님만한 구원에 대한 확실한 약속의 증표가 없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 아들 예수를 주시고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할렐루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약속을 받았는가? 자녀되는 권세를 받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했다. 로마서에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사울은 버림받고, 다윗은 왕위를 약속 받았지만,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 우리에게 하락됐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말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는가?

 

집나갔던 탕자가 고생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따뜻하게 그를 맞아주셨다. 그리고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주었다.

 

또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9)

 

여러분 꼭 기억하라. 환난 가운데 주님을 굳게 믿고, 그 굳게 믿는 근거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시간 그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길 바란다. 주님은 여러분의 심령에 있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있기만 하면 된다. 영접하면 된다. 물론 주님을 믿고 간구해도 상황과 여건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주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그것을 이길 힘과 능력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내 밖의 여건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안에는 희락과 평강과 소망의 큰 능력이 자리하게 된다. 요새, 반석, 피할 바위, 능력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여러분. 쓰러지신 주님,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 어떤 분이 진짜일까?

 

죽음의 큰 고통을 당하신 주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신다. 그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으면 좋겠다. 다윗이 환난과 어려운 가운데, 주님을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은 나의 큰 도우심이요, 힘이시요, 능력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음을 기억하면서 승리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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