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7.5. / 성령강림절 후 6주, 맥추감사주일)

 

 

1.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6주, 맥추감사주일이다. 이시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벌써 상반기가 지나고 하반기가 시작됐다. 올해 받은 말씀, 다들 기억하는가? 하나님께서 필요해서 주신 말씀일텐데, 스스로와 어떤 상관이 있다고 여기시는가? 하반기에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주시는 이유와 의미를 깨닫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2015년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의 임재가 여러분의 어디에 머물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시는가? 이시간 이 깨달음을 얻고 위로와 용기가 있기를 축원한다.

수요예배 때 말씀드렸지만, 그림을 보여드리지는 못했다. 지난 월요일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 그림을 봤다. 그 때는 핸드폰으로만 찍었었는데, 우리 모두와 은혜를 나누고자, 남학교회 임정빈 목사님께 부탁해서 이 그림을 받았다.

이 그림은 예루살렘 순례의 길, 제 3처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세 번 넘어지셨다고 전해진다. 그 중 첫 번째 넘어진 곳이다. 저는 이 그림을 보고 울컥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괴로우셨을까? 가시면류관에 백합화가 찔려있는 것 같기도 하고 피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고통당하심과 그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어남을 단순하면서도 명백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누구나 가장 아름답고 귀하나 연약한 부분이 찔리고 찢기며 상처받기 마련이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부분은 죄로 바뀌기 쉽다. 시비와 원망과 보복과 거짓과 위선이라는 수많은 모습으로 말이다.

군대에서 ‘본전 생각나다’라는 말이 있다. 고참들에게 구타를 많이 당하거나 갈취를 당하면, 그 본전이 생각나서 후임사병들에게 똑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한 단면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찔림, 상함, 채찍에 맞음! 이것들을 피하고자, 어떻게 하는가?! 비겁하고 미련하고 교만하고 바리새인처럼 의인행세를 하거나 외식하는 자와 같이 이중적이 모습을 갖는다. 자기편을 만들고 파당을 짓고 그 울타리 안에 자기를 감추려고 한다. (천천히)

 

그러나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생은 가시면류관 같은 고난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소망하시기 바란다. 가시에 찔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어나기도 한다.

 

예수님은 그 고초를 당하면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제자들은 두려워 도망을 갔다. 심지어 12제자들마저도 말이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조롱할 때, 침을 뱉고 욕을 할 때,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은 (아니 우리 역시도) 이것을 당할 때, 기분을 알면서도 말이다. 더군다나 예수님 좌우편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던 분이다. 아무 죄 없이 이런 모욕과 고초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해명이라도 하고 싶고… 이루 말 할 수 없다. 죄를 짓고도 모르쇠와 침묵을 일관하는 일은 참 뻔뻔스럽게 여겨지지만, 아무 죄 없으신 분이 침묵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이런 방증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에 대한 진리와 진실를 위해 증인이 되어줄 용기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마 만큼, 주님은 외롭고 쓸쓸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이 그림이 큰 감동이 되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5절에서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백하고 있다.

그는 타자에 대해서는 칭찬할 만한 것을 자랑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한다.

1-4 바울이 2절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이 세계를 넘어 있는 저 세계를 보는 환상을 체험했다. 달리 말하면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4년 간이나 살고 있다. 그것은 진짜 죽은 상태였는지, 아니면 살아있는 상태에서 본 환상과 계시인지 알 수는 없다. 괄호친 부분이 그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신앙의 신비와 체험과 경험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기뻐하며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도록 자랑한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약한 것을 자랑한다?”

여러분 혹 바울의 이런 모습을 약점으로 여기고 무시하지 않을까? 사이가 좋을 때에는 동정하고 위로하고 감싸주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헐뜯고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소재거리로 삼지는 않을까? 자기 자랑과 PR을 적당히 잘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않는다. 실재로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바울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분열과 미혹의 영으로 교회를 뒤엎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교인들을 사회 법정에 고소고발하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의 문제를 교회에 끌고 들어와 거룩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럽혀서도 안 되지만, 교회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는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 교회를 뒤엎어 놓겠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음부의 권세에 들어가 사탄의 편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을 하였느니라. 그들을 사탄에게 내준 것은 더 이상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19-20)고 쓰고 있다. 교회를 험담하고 욕하고, 서로 중보기도하는 성도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이간질 하며, 분열시키고 미혹케 하며, 거짓말을 하며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보호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더 이상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일을 차단해야 했다(고전5:6, 갈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약한 것들을 자랑하며, 그 외에는 자랑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바울이 이 사실을 모를 만큼 어리숙하고 세상물정을 몰랐을까? 아직은 젊고 어려서 순진하기만 했던 것일까?

고린도 교회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을 비교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 말이다. 바울과 아볼로를 비교하거나 바울과 다른 사도들을 비교했다. 남을 비교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비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11절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이력이나 자랑을 늘어놓아 다른 사람과 비교돼서 무시당하는 꼴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말하고 자랑치 않는 것은, 6절을 보라.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 까 두려워하여” 그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를 떠나면 지나치게 생각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을 할까 말까, 카톡을 보낼까 말까 하다가 지우는 심정, 왜 그런가? 괜히 생각이 넘칠 것 같아서 그렇다.

자기자랑을 할 수도 있다. 어리석지 않게 얼마든지 말이다. 혹 자기 약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약점을 말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부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자기 자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기 쉽다. 하지만 바울이 깨달은 것이 있다. 자기의 약함과 가시면류관에서, 피어나는 주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 연약한 부분을 오히려 크게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

 

바울의 약함은 무엇이었을까? 일차적인 것이 있다. 육체적인 것이다.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말한다. 그는 만성 말라리아를 앓고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 어릴 적부터 앓게 된 질병이다. 긴장하는 일, 어려움을 당할 때, 두려움이 몰려올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이 질병은 숨었다가 돋아나곤 했다. 마치 간질처럼 느닷없이 말이다.

진리와 복음의 중요한 사명과 일을 앞두고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의 대적자나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훼방을 놓는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손이 저려오고 고열이 나면서 무기력해진다면 얼마나 낭패인가?! 자기의 한계와 결정적인 순간의 약함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이차적인 약함으로 이어졌다. 10절,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 말이다. 조바심을 내게 될 때도 있었고, 참기 어려울 만큼 적신이나 환난이나 곤고함이 닥칠 때, 기가 차고 어이가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됐다. 또 그만 알고 있는 자기 열등감과 콤플렉스는 왜 없었겠는가?

아시는가? 이런 것들은 어쩌면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 험담하고 비난을 하고 오해를 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여러 차례 주님께 이것이 떠나가게 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자기에게 일어난 변화는 전혀 없었다. 다른 기도는 다 들어주실는지는 몰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 뿐, 해결에 대한 응답은 없으셨다.

 

이런 신앙사역과 생활의 문제에 대해 바울의 마음에 들려오는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계시와 신비와 능력과 역사를 많이 보고 경험하고 행했다. 하지만, 육체의 가시나 약함이 없으면 누구나 자만해지고 교만해지기 마련 아닌가?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주님께서 바울의 약함 가운데서 역사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바울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하되, 가장 약한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능히 하시겠다고 하신다. 나머지 약한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그 때 강함이 된다.

 

사람은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이 완벽하고 완결하다고 생각하고, 사람의 의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회개하려 들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주님이 자기 심령 가운데 깊이 찾아와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주시기며 도와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시지는 마시고 밖에서만 도와달라는 격이다. 참 인격적인 교제와 만남이 없다.

그러나 여러분, 처음 질문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어디에 머물기를 바라시는가? 우리 심령 깊은 곳에 찾아오셔서, 가장 약한 곳을 채우시고 힘이 되시며 능력되시기를 원하신다.

‘사람의 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앞에서 서서 주님을 누구보다, 무엇보다 더 사랑하며 마음의 중심에 모시기를 원하신다.

다윗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아시고 사무엘에게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그 하나님이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감찰하시는 것이다.

우리 중심에 계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아니 적어도 제 중심에 살아계셔서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며 사랑하신다고 말씀 들려주시는, 제 안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지 말라. 그래서 사람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시라. 각 사람을 보지 마시고,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을 보시고, 믿음이 부족한 이를 위해서는 기도하라.

 

9절을 보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맥추감사주일에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큰데,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데 묻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하나님을 위해,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는 하는 것인가? 주님께서 주신 직분에 감사하고 순종하면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에 머물기를 원하시는가? 기억하라. 여러분의 약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르게도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약함을 약점 삼고 비난하고 무시할 때, 주님은 바로 거기 계시겠다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약점을 멸시하면 결국 누구를 멸시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믿음으로 일어난다. 기억하라. 자신의 약함 가운데, 사랑의 주님 머물기를 바라신다.

 

  1. 앞에서 보여드렸던 그림이 큰 은혜가 됐던 진정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림을 다시 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걸어가시다가 넘어진 자리에, 보혈의 피가 묻어있다. 예수님은 다시 일어나 그 언덕을 오르신다. 그런데 수많은 제자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겠다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예수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을 위해 증인이 돼주는 사람도 없었다. 당국자에 매수된 거짓 고발자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난 삶의 현장, 고난의 자리에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베드로도 있다. 베드로 역시 연약한 사람이었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비겁했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도망갔던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약함 가운데 함께 하셨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주님 십자가 지고 가신 그 길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길 가겠다고 자기 십자가 지고 용기를 내어 주님을 따라나서는 신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약할 때 강함되시는 주님을 믿고 말이다.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함은 무엇인가? 스스로 완전한 자인가? 하나님을 필요로하고 맡기는 자인가?

설교준비를 하다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지기 위해 몰려들었던 제자들처럼, 저역시도 그런 결단을 갖고자 하는데, 그 마음에 용기를 주고 촉구하고, 결단하게 하는 영상이 있어 모두와 나누려고 한다.

 

주님 오실 그날까지 우리 십자가를 끝까지 붙들고 최후 승리의 날을 향해 믿음의 길 걸어가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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