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5.6.28. /성령강림절 후 5주)
사람의 의 앞에, 하나님의 의 앞에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사람의 의’ 앞에 서는 것과 ‘하나님의 의’ 앞에 서는 것은 다르다고 말씀 드렸다. ‘하나님의 의’ 앞에 서 보지 못한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다.
신현정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하느님 놀다가세요>
하느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 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느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첫대목을 읽으며 ‘큭큭’ 거렸다. 누구나 이런 모습 한번쯤 경험해봤을 법하다. 나중에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모습인데, 그러고 살 때가 많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내세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다가 뿔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좁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린 인간에 대해서 시인은 유쾌하게 딴지를 거는 것이다(고진하). 그런데 반면에 ‘뭉게구름’, ‘들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염소’ 이런 심상들은 하나님을 광활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하느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시고, ‘정 그렇다면 하느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이렇게 노래한다. 광대하신 하나님께로의 초대문구라고 말할 수 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고서 자결을 택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그 목숨을 선교하고 복음을 전하는 예수를 위해 바쳤다. 유다는 사람의 ‘의’ 앞에 서려했던 사람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의 앞에 섰던 사람이다. 그러니 유다는 참 안된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다. 유다 같은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구원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도 사람의 의가 너무 강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은 자기 뜻대로 한다. 그러나 베드로 같은 사람은 잘못을 통회하지만 주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다. 그리고 복음을 믿고, 구원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자 한다.
‘사람의 의’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진정한 책망과 훈계를 견뎌내지 못한다. 분내고 성낸다. 대신에 끊임없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자기를 자랑하거나, 남을 비난하는 방법을 택한다. 자신의 의를 드러낼 만한 것이 없을 때, 찾아오는 자괴감은 자신을 망친다. 그리고 남에 대한 비난거리를 찾지 못할 때, 자신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늘 부정적으로 말해야 한다. 행복할까? 나중에 자기가 말한 대로, 똑같이 부정적인 일로, 불행한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주님 없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 앞에 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를 달게 받는다. 자신의 죄인됨을 믿음과 용기로 고백한다. 대신에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 관대하고 너그럽다. 자랑거리가 없어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 진정한 소망으로 충성하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의 곤고한 현실 앞에 주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고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며 긍정적으로 인생을 대한다. 어느새 주님의 나라와 역사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온 까닭은 인간의 의로움 앞에 서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서기 위함이다. 인간의 의로움이란 한마디로 율법주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뜻이다.
오늘 말씀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는 이 신앙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더 나아가 공동체와 나라와 국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임을 알았다.
2.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당하는 영적갈등
1-2에서 시인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어려운 현실을 하나님께 토로한다.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깊은 곳이란 스올이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어떻게 다른가? 우울증은 살기 싫고 죽고 싶은 정신적인 병이다. 공황장애는 살고는 싶은데, 죽을 것만 같은 공포와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시인은 고통받고 있다. 자기 인생에 위험이 닥치고 위기가 찾아왔다. 고통스러운 현실 때문에 염려와 걱정이 앞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자기를 오해하거나 미워하기도 한다. 자기에 대해 수군수군 대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 대도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2절에서 주님께 간절히 간구한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나님 밖에는 그 누구도 이 문제에 응답하실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주님께 기도한다. 어쩌면 주님께서 듣지 않고 계신 것은 아닌지, 답답함을 토대로 주님께 애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곤고한 인생 속에 하나님께 애원하고 간구하며, 절박함 심정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바란다. 주님은 문제들을 물리치지 않으신다. 주님의 응답하실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겪는 영적인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를 회피하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고 만다. 과연 어떤 문제이길래 그럴까? 죄의 문제이다.
3절,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사람은 누구나 죄 때문에 괴로워한다. 죄는 사람을 괴롭게 한다. 착한 일 하면서 괴로워하는 것 봤는가? 십자가를 감당하면서 괴로워하는 것 봤는가? 아니다. 순전히 죄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죄는 도덕적, 윤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하나님의 뜻을 피해 달음질 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괴로워한다. 혹 뚜렷하게 생각나지는 않더라도 부지중에 저지른 죄가 있는 것은 아닐지, 근심한다. 아니 사실 자기가 자기를 잘 안다. 자기가 남이 보는 데서와는 달리,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거짓되고 영적으로 게으르고 방종한지를 말이다. 성령충만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죄 때문에 하나님 얼굴을 볼 수 없는 가인이 자기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 오락가락 하는 모습의 자신을 자기가 잘 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죄가 고통과 불행과 환난 중에 느껴져, 평소에는 갖지도 않았던 죄책감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본다.
‘사람의 의’ 앞에 서려고 하는 자는 바로 이 지점을 넘지 못한다. 참 안타깝다. ‘죄악을 달아보시는 주님 앞에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하나님의 의’ 앞에서 서는 자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4절을 보라.
“그러나 사유하심이” 용서하심을 뜻한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인에게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만난 가장 큰 이득과 복이라면 무엇일까? 기복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곧 응답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가슴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한 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는 자만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용서하심에 대한 체험이다. 바꿔 말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다. 하나님은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고백한다는 일이 쉬운 일인가? 고해성사를 생각해보라. 쉽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것, 가벼운 것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 바라보기도 싫은 죄, 기억하기도 싫은 죄, 감추고 싶은 죄의 문제들은 하나님께 조차도 두렵고 떨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와는 달리 하나님의 의는 바로 그 지점을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고치시고 치유하시기 위해 오늘 우리를 불러주셨다.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이유가, 사람의 의 앞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앞에 서기 위함이다. 그로 인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누가 강요하고 정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자복하게 되는 것이다. 죄책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인위적인 자기반성과 참회개의 다른 점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자기 반성은 그 부분을 누가 건드렸을 때, 예민해진다. 그러나 참 회개는 자유함을 느끼게 되고, 더 새로워지고자 오히려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자에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줄 아는가? 예배하고 기도했더니, 곧 문제가 해결됐다고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곧 문제가 해결되거나 눈으로 보이는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을 부인하기까지 한다. 자기의 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에는 자기 방식대로 미련하게 행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섭리가 선하다는 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 때문에,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고, 그것을 기대로 삼는 사람에게는 용기와 지혜와 인내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케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이 찾아오셔서 터치해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바로 오늘 이 시간 그 역사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하신다.
5절~6절을 보라.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용서를 받고, 은총을 받고, 의심과 답답함을 시원한 마음의 확신으로 바꿀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주의 말씀을 바라게 된다.
6절에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리는 것이 더 간절하다고 고백한다.
그 기다림은 오히려 즐거움이 되고, 소망이 된다. 은혜가 된다.
성전에 나아온 이는 어떤 은혜가 있었는가?
삶의 고통과 괴로움과 문제를 주님께 들고 나아와, 하나님과 만나면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체험한 뒤에, 소망과 기대에 대한 확신으로, 믿음과 용기로 돌아가는 특별하신 은총이 내려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길 축원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 개인에게 일어나는 문제를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도 적용하며 7-8에서 말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메르스는 이슬람교인들이나 동성애자들 때문이라고 말하는 보수적인 교계지도자들이 있다. 문제를 오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구 때문이라고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책임을 전가한다. 분명코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들이다.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파괴하고 괴롭히며 돌보지 않은 결과이다. 또한 세월호 때와 같이 국가의 초기대응이 부족했고 골든타임을 놓친 결과이다. 때만 되면 대책을 세우겠다고 면피용을 말하는 것에 대해 쉽게 면죄부를 주고 말아버리는 망각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 깊은 의식 속에는 물질우상의 논리로 ‘나만 아니면 돼’, ‘나는 아니겠지’ 하는 이기적인 본성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사태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뒤집어씌우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기 어렵다.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라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