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21. / 성령강림절 후 4주)

  • 그의 목숨을 노리시다니

출애굽기에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다. 4:24-26이다. 성서학자들도 해결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건져내도록 명령하셨다. 그 명령을 받아,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족 모두와 함께 갈 채비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한다. 왜? 4:19에 보면 모세의 목숨을 노린 자들이 다 죽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했을까? 큰일을 앞두고, 그것을 계획하시고 지시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실까?

 

그러고 보니까, 우리 인생에서 좋은 일을 앞두고 고난과 어려움, 눈물골짜기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를 종종 봤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생각해보라. 철옹성 같다고 하는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았다. 이것은 일대격전을 앞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외동딸 디나를 욕보였을 때, 시므온과 레위는 그 곳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지 않으면 혼인을 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할례를 받았더니, 남자들을 모두 몰살시켰다. 세겜 남자들은 아파서 싸울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하기 직전, 할례의 고통에 놓이게 됐다.

여리고를 차지할 백성들에게 못 올라 갈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는 이야기 아닌가? 출애굽의 명령을 받은 모세에게, 가지 말라는 것 아닌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너희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말씀하셨다.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려면,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무너뜨리게 하시려면, 이런 심정으로 도우셔야지, 왜 죽이려 하시고, 고난을 자초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여러분! 이 본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복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런데 그 과정 가운데에 죽음과 사고의 위협과, 고난과 눈물의 골짜기를 만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특별히 듣고, 이 점에서 은혜와 믿음이 있기를 축원한다. 시험과 환난과 고통을 믿음으로 이기고, 지혜와 용기를 더하여, 믿음으로 승리하면 하나님은 분명코 예상치도 못한 더 좋은 것을 주신다.

 

이런 신앙의 감각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오늘 본문은 용맹한 다윗이 골리앗과 이겨 승리한 영웅기사가 아니다. 인생에서 골리앗을 만났을 때, 어떻게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들려주는 그 신앙적 비법이 있다.

 

 

  • 왕이 될 다윗에게

1)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무엘조차 보지 못한 것을 보시며 말씀하신다.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울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변심했음을 알자, 사울은 괴로웠다. 그가 앞으로 자행할 일들을 보면, 필시 이스라엘 공동체와 백성들을 위험케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윤리적, 도덕적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 모르는 백성이 되게 만들 지도자와 그 말로 때문이었다. 이게 정말 위험한 것이다.

좋은 사람을 찾지 못하고 신실한 이를 만나기 어려운 때에, 하나님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다윗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인생의 미래와 앞날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를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다윗의 어떤 점을 보고 하나님께서 왕을 보셨는지는, 이전에 말씀드렸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는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다림추로 재어보신다.

우리 역시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각자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기를 바라신다. 선하신 계획과 좋으신 섭리를 가지고 우리의 중심에 찾아와 계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바울이 말한 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게으름과 방종이 있지는 않은가? 혹 시편의 고백대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처럼 경망스럽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렘4:1)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렘4:2)

하나님께로 돌아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믿는 자에게는 복과 은혜를 부어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염려와 두려움과 부정적인 마음이 든다면, 기억하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복되게 하시고 자신은 복주시지 않을 것 같은 마음도 하나님을 중심에 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이니”(딤후1:7)

 

히브리서 기자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바라시는 말씀이다. 할렐루야!

 

2) 다윗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어느 날, 왕이 보낸 전령들이 찾아왔다. 왕궁으로 들라는 것이었다. 성경은 사울의 신하들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삼상16:18)

 

요셉도 애굽에 팔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시고 함께 하시니, 바로 왕이 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총리의 역할을 맡게 됐다. 하나님의 때가 어느 날 찾아온다.

 

사울에게 자꾸만 편두통이 찾아오고 악령에 사로잡혀 번뇌하자, 음악치료처럼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찾았다. 그 중에 다윗이 발탁되었다. 들에서 양을 치던 사람이 왕궁에 들어가서, 사울의 총애를 받게 됐다. 이 정도면 경사(慶事)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앞으로 왕이 될 텐데,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이다.

 

3)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전하는 말씀은, 다윗이 우연치 않게 골리앗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맞서 싸우거나 상대하기를 꺼려하는 적군의 장수였다.

그 과정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에 보내졌다. 형들의 안부를 확인코자 했다. 거기에 골리앗이 있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있었다.

우리가 인생을 놓고 보자면, 어쩔 수 없이 골리앗을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보다 더 적극적으로 골리앗과 맞서는 경우도 있다. 아니 어쩔 수 없이 골리앗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모습을 본받기를 바란다.

성경은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 때문에 그곳에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성경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진의는 무엇인가? 그가 만나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과 위기와 어려움을 능히 이겨낸 전주곡 같은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왕이 될지도 모르고, 이제 막 왕궁에 들어갈 기회를 얻게 됐는데,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만났다.

꼭 기억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이 성취되는 길을 갈 때, 쉽고 편안한 일만,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거기에는 고난과 눈물골짜기와 골리앗이 있을 수 있다.

 

 

  • 골리앗을 이기는 방법

골리앗은 4절에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전투방식이 어땠는지, 에누마 엘리쉬라고 하는 유명한 바벨론의 고대 자료를 보니까, 일대 일 전투를 벌이고, 곧 정규군의 백병전을 벌였다. 분명 초반의 기(氣)싸움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 대 일의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백병전을 통해서 실재 전력에 의해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 난다. 그런데 골리앗은 이 일대 일 결투로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자며 이스라엘의 사기를 꺾고 있다.

그 키는 270은 족히 되는 거구였다. 머리에는 놋투구, 몸에는 비늘 갑옷, 다리에는 놋 각반을 차고, 베틀 채 같은 창 자루와 그 날이 굉장히 예리한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싸움을 돋우는 자’라는 표현으로 봐서, 그는 당시 일 대 일 결투에 최강자였다.

 

어떻게 싸워야 할까?

① 힘이나 창과 방패로는 싸울 수 없다. 모세가 바로 왕 앞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싸워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여리고성을 차지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임이 불보듯뻔하다.

사울은 자기의 군복과 전투 장비 일체를 다윗에게 입혀주었다. 칼을 차고 걸어보다가 곧 이대로 싸울 수 없음을 알았다. 이대로 싸움에 나갔다가는 골리앗의 단칼에 끝장나고 만다.

②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도 이길 수가 없다. 다윗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택했다. 40절에 한 손에는 막대기와 또 다른 한 손에는 물매였다. 그것은 무엇인가? 들에서 양을 지킬 때, 맹수로부터 그가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③ 물론 두려움을 가지고서도 이길 수 없다. 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겁을 내면 여우가 더 크게 보인다.” 인도 설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마술사 한 사람이 쥐 한 마리를 관찰하는데, 이 쥐가 얼마나 고양이를 두려워하는지 벌벌 떤다. 그래서 마술사를 불쌍한 마음으로 쥐를 고양이가 되게 했다. 그런데 변신한 고양이는 또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개다. 더 불쌍하게 느낀 마술사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사용해서 이 고양이를 개가 되게 했다. 그런데 개가 된 이 고양이는 또 다시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호랑이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또다시 마술사는 개를 호랑이로 변신시켜 줬다. 이번에는 어땠을까? 호랑이는 또 두려워한다. 이번에는 사냥꾼의 엽총이다. 그래서 이 마술사는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해봤자 이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별 수 없는 쥐새끼다. 다시 쥐로 돌아가라.” 그래서 다시 쥐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이 우화는 우리의 삶의 장에서 끊임없이 엄습해 오는 두려움 앞에 피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하나의 상징을 말해주는 것일 테다.

 

  • 이렇게 싸우라

다윗이 골리앗에게 다가가자, 골리앗은 어이가 없었다. 맨몸으로 막대기와 물매를 들고 오는 다윗을 보니, 기가 찼다. 다윗을 업신여기며, 자기를 개로 여기느냐고 성을 냈다.

다윗은 용기 있게 골리앗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골리앗도 다윗을 향해 마주하며 달려오고 있다. 막대기를 든 다윗의 행동이 한눈에 들어오는 듯 했다. 단칼이면 된다.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것은 순식간에 벌어질 일이다. 칼집에서 칼을 뺄 채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퍽”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는 곧 쓰러지고 말았다. 불과 몇미터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골리앗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멩이를 꺼내더니 물매에 걸어 순식간에 골리앗에게 날렸다. 평소 맹수를 물리칠 때의 실력대로 그 돌은 번개처럼 골리앗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명중됐다.

골리앗이 어떻게 죽었는가? 돌에 맞고 죽은 것이 아니다. 정신을 잃었다. 다윗은 곧바로 골리앗을 밟고 그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 그를 죽이고 머리를 벴다. 기가 막힌 장면이다.

너무 방심했던 것일까? 다윗을 너무 얕잡아본 것일까? 골리앗이 정말 무시하고 비웃고 깔봤던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윗이 아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47)

 

승리를 가능케 하시는 이름, 구원을 허락하시는 이름, 우리의 참 하나님! 그 이름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믿고 있는가? 신뢰하고 있는가? 골리앗이 무시한 이름, 얕잡아보고 비웃었던 이름인데, 여러분의 마음에서는 어떠한가? 그 구원에 능하신 이름이 인생의 골리앗을 맡서는 진정한 힘이다.

 

좋은 일을 앞두고, 큰일을 앞두고 어려운 일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고, 눈물 골짜기를 만났을 때, 주님을 믿고 담대함과 용기로, 적극적인 믿음으로 승리하길 바란다.

 

주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염려, 근심, 걱정이 있어야 할까? 없어야 할까? 너무 단순한 질문인가? 그런데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우리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겨내려고 안간힘 쓴다.

너무 많은 것도 탈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의지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지혜와 용기를 선물로 받지도 못한다.

기도하라. 믿음과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드는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하라.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채워지는 지혜와 용기가 생겨난다. 담대함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공급받는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셨다는 것은 굉장한 역설이다. 그의 아내(모세를 죽음에서 건져낸 여인들 중 하나)가 아들의 할례를 통해 모세를 살렸고, 피남편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끊어지지 않고 구속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큰일을 앞두고 더욱 하나님의 구속과 구원하심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약속받는 사건이었다. 여리고를 차지하기 전에 받은 할례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을 의미하는 용기와 담대한 신앙의 모습이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때, 물을 만났지만, 그곳은 마라였다. 마라의 쓴물이라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에 하나님은 엘림이라고 하는 좋은 곳을 예비해 두셨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움 뒤에 분명코 큰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승리하는 믿음을 주신다.

 

전도서 기자의 말을 들어보라.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전9:11)

 

구원은 칼과 창과 같은 세상적인 방법이나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께 있다. 소망을 주께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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