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14. / 성령강림절 후 3주 및 환경선교주일)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

참고 인내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낙심된 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어 순종하는 중에 주님께서 도우신다.

시험이 오나 믿음 잃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고 감사할 때 도우신다.

괴로움도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체험신앙은 바로 이런 신비들을 경험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 하신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 씨가 나서 자라되 / 어떻게 그리 되는지 알지 못하느니라.”(마가복음4:27)

 

정말 그렇다. 아이들이 맨날 그 모습인 것 같은데, 어느새 자라서 성장한다. 매일매일을 생각하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아니다. 어느새 추수 때가 이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임하고 현실화 된다고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고 계신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 결국 추수 때가 이른다. 그런데 쉽게 낙심하고, 포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러나 여러분, 부지중에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역사하신다는 믿음에 위로와 용기가 되시기를 바란다.

 

시인 김지하가 ‘님’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던 대목이 생각났다.

가랑잎 한 잎 /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 님 오신다 하소서 //

개미 한 마리 / 마루 밑에 기어와도 / 님 오신다 하소서 //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 사람 짐승 풀 벌레 /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

다 함께 지어 놓은 밥 //

아침저녁 / 밥그릇 앞에 /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

손님 오시거든 / 마루 끝에서 문간까지도 /

마음에 능라 비단도 / 널찍이 펼치소서. //

 

이 시가 떠올랐던 이유가 뭘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 성실하신 주님, 그분의 섭리와 경륜 말이다.

가랑 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님 오신다 하소서.” 시인은 그 작은 미물이나 움직임 속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기척을 느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 함께 지어 놓은 밥”을 생각해보자. ‘사람 짐승 풀 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 달과 별’ 우리가 이유를 알지 못하는 미세한 움직임과 활동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기에 가랑 잎 한 잎도, 기어오는 개미 한 마리도, 모두 다 하나님의 기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의 다음 대목인 “아침저녁 / 밥그릇 앞에 /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이 구절을 접하자니, 중세기 수도자였던 미이스터 엑카르트의 경구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만물을 사랑하시되 피조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으로 여겨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실 때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를 너무너무 귀하게 여기시기에 도우시고, 부지중에 자라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지어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주의 공력으로 지어진 밥 한 그릇이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욕심이다. 시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아침저녁 밥그릇 앞에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기원하고 있다.

나만을 위한 밥그릇이 아니기에 타인을 위해서도 “하나님으로 여겨” “능라 비단을 널찍이 펼치는 마음의 정성과 준비”야 말로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오만과 욕심 속에서 벗어나 자연질서를 보라. 그러면 보이는 분의 모습이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

 

 

2.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위력

저는 오늘 말씀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위력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이거구나!’, ‘이거다! 이거!’

 

여러분, “내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신뢰하면 그 나라는 성장하고 자라서, 도래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는 성장을 멈추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여러분,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고 약속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광야를 잘 걸어오던 사람이다. 거의 막바지에서 백성들과 다투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을 정탐하고 와서, 믿음으로 보고를 했다. 그리고 승리의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현실적인 보고를 했고,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에 불안과 어둠을 메르스처럼 확산시켰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 어떤 사람에게 도래하고 임하는 것인가?

 

28절을 보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스스로’라는 말은 ‘인간의 노력 없이도’ 일어나는 일임을 뜻한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공로와 노력이 있어야, 그 대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씨뿌린 사람, 농부를 ‘예수님’이라고 적용해서 해석하려고 했다.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서, 주님을 신뢰하고 믿는 노력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해석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반론이 남는다. 무엇인가?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주님이 어찌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역시 27절의 말씀에 걸린다. 그러니 인위적으로 억지로 해석하면 안된다. 말씀을 선별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다. 믿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믿으려는 것이다.

 

농부의 노력은 씨앗이 성장하고 자라는데 완전히 무관하지 않겠지만, 굉장히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다. 매일 얼마만큼 자라도록 농부가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쉽게 말해보자. 요즘 매우 가물어서 농부들이 농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느 분이 집 베란다에다가 방울토마토를 심었다고 한다. 꽃은 피는데, 열매가 맺히지 않더란다. 어느 분이 조언하기를 붓 같은 것으로 꽃을 문질러 주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얼마 후 방울토마토가 맺혔다. 벌이나 나비가, 바람이 수분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속에 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진의는 ‘인간의 노력’이 중요하냐? ‘하나님의 역할’이 더 큰가? 하는 것을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밤낮 자고 깨는 중에,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지 못하는 중에, 누구에게나 어떤 공로와 상관없이 도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본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바라서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다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간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기에 매우 강력한 임재를 뜻한다. 여름도 마찬가지이다. 가을도, 겨울도, 그리고 봄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와 약속이 분명코 이루어 질 때가 올 줄로 믿으라. 29절에 “열매가 익으며 곧 낫을 대다니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임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것에 동참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까? 비결이 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 때가 분명히 올 것을 믿고, 오늘 우리의 삶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인내하며 견뎌내라. 연단이라 생각하고 소망을 품으라.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알게 모르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마침내 추수의 좋은 때가 온다. 여기서 추수의 때란 문맥상 심판의 때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약속이 성취되는 선한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 때가 분명히 온다.

 

 

3. 영적 무지를 벗으라.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약속이 성취 될 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온다는 말에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딸 아이의 배터리 이야기)

마가복음을 생각할 때, 내게 떠오르는 단어는 “무지”이다. 여기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마가공동체의 신앙적인 문제는 ‘무지’, ‘영적 오해’, ‘불신앙’이었다는 것을 이전에 간간히 이야기 드린 바 있다. 주후 70년경 로마와의 전쟁을 겪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폐허가 된 상처의 현장에서 희망과 소망을 갖기 어려운 이들의 상황을 염두에 두자. 그럴수록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4장에서만도 주님께서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 불신앙을 얼마나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4장 1-9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13절을 보라.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무지를 지적하셨다. 그리고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 바로 뒤에 주님은 등경위에 등불을 두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그 뒤에, 오늘의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다. 자라나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 말이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 주님께서 비유로 하시는 말씀을 깨닫고 믿으라는 것이다.

무지란 무엇인가? 우리는 많이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오면서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신문과 TV를 통해서는 또 얼마나 많이 배우는가? 언제든 인터넷을 검색하면, 지식과 정보들을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무지한 것인가? 무지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알면서도 바보짓 하는 어리석음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지한 것은 아닌가? 지식은 넘쳐나고, 방법론은 무수히 많지만, 너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지한 것은 아닐까? 신앙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기도하고, 주님께 의뢰하고, 참고 인내하고 견디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못한다. 조금 어려운 일을 만나, 믿음 없이, 불안해하고 조급해하면서 무너지고 불신앙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의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이나, 자기 방법 내지는 인간의 성정으로 하려고 한다. 신앙적인 권면과 주님께서 내게 직접하시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응답과 음성을 버린다. 귀를 막아버린다.

 

그러니 이 시간 우리가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깨닫고 믿으라.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다. 주님께서 도우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와 약속에 대한 성취가 완성된 최종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면 아무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쉽게 놓치고 만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도 마찬가지이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 확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아무도 놓칠 사람이 없다. 이것이 우리를 무지하게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시간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는 바로 그 믿음의 눈을 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기억하면서 인내와 소망의 양 눈을 믿음으로 열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주님은 심겨진 씨앗이 자라 열매가 익어 추수 때가 오는 것처럼 믿음으로 붙들길 바라신다. 이시간 우리에게 그 믿음을 부어주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과 다투어 분노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져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갔다. 10명의 정탐꾼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모세는 어디 있으며, 그 정탐꾼들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그 나라가 임할 때, 모세와 정탐꾼들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몰랐을까? 알았다. 하지만 주님을 의지하며 그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거나 주님께 맡기지 않았다. 자기가 그 복을 차버린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러분, 우리는 어떤가? 혹 우리의 무지 때문에 우리도 이런 과오를 비슷하게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알지만 믿지 못하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약속과 나라는 분명히 임하지만, 우리가 복을 차버린 사람처럼, 그 은혜를 뛰쳐나간 사람이 되어, 믿음 없는 탕자의 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여러분 시험에 들어도 낙심하지 말고, 어려움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말고, 시련이 와도 믿음 잃지 말라. 오히려 더 굳건히 견디며 이기며 승리하라.

신앙은 안되고 안되고 안되는 것 같아보여도, 결국에는 잘 돼있는 것이 신앙이다.

불신앙은 잘 되고 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흩어지는 안개요 시들어버릴 꽃에 불과하다.

그러니 시험이 오더라도,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견디며,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를 믿으라. 그 믿음으로 더욱 인내하며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12)

 

 

4. 대반전의 역사

여러분, 기억하라. 우리 삶에 조용히 찾아오는 대반전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는 우리의 실존하는 현장을 말한다. 씨앗이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에 떨어졌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했다. 늘 실패와 손해를 반복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이요, 손해가 막심한 우리의 처지라 여겨진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더러는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도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이 자라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말이다.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길 때에는 세상의 모든 것보다 작은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것이었고, 먼지처럼 하나하나 셀 수 없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자 커지며 큰 가지를 내며,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고 말이다.

농부도 모르는 사이에,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어느새 추수 때가 이르는 것이다.

말씀을 매듭짓기 위해 다시 야고보서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마음에 확신과 다짐이 있기를 바란다.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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