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07. / 성령강림절 후 2주, 평신도주일)
참 어중간 해 보인다. 이 본문을 택하려고 택한 것은 아닌데, 이 번 주 성서일과는 이 말씀을 우리가 받아야 할 말씀으로 주고 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 후 2주이며, 평신도 주일이다. 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은 너무 중요하다. 그것을 기억하라고 제정된 날일 것이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요, 우리는 각 지체다.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한 몸을 이룬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믿음을, 병고치는 은사를 능력 행함을… 한분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전12:8-11) 했다. 저마다 은사와 달란트가 다르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이룬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모두가 나와 같은 사람만 있으면 어쩌겠는가? 다 눈이면, 무엇으로 들으며, 다 귀면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못하는 것, 나의 약한 부분은 누가 감당해 줄 수 있는가? 나보다 연약한 사람이 없다면 나의 강점과 장점, 나의 역할은 어떻게 드러나겠는가? 한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연합하며, 하나의 띠를 이룰 때,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도 능력이 되며,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관계와 코이노니아(교제)가 참 중요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불완전하고 미완의 존재인 우리가 영원을 지향하며 완성에 이를 수 있다. 여러분 주의 사랑에 순종하라.
고린도교회는 내홍을 겪고 있었다. 바울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이렇게 네 개의 파당으로 나뉘어 분쟁을 겪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 그 이유가 뭔줄 아는가?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말하지만, 자기 잘 못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이 있을 수도 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이 아니라 과장과 축소도 갈등 속에서는 거짓말이나 마찬가지이다.
또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기를 일삼는 사람들의 습관은 별일 아닌 것도 크게 만든다. 말이 퍼지면서 와전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한다. 거기에 어떤 말 한 마디가 큰 불씨가 돼서 온 집안과 공동체를 태우기도 한다. “혀는 곧 불이요,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야고보서 3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그렇지 못했다. 말이 분쟁을 일으키고 일파만파 퍼졌다. 교우들의 분쟁은 사회의 법정에 고소하는 일로 비화됐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교회가 다툼과 분쟁으로 시끄러웠다. ;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그 제자 디모데에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이 갈등들은 바울에게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어디나 남 핑계를 대고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이 역시 따지고 보면 사소한 말 때문이었다.
바울에 대해 이상한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울이 약속을 안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돼보지 못하고 편안한 자리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로 했으면서 방문하지 않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시나리오도 이상하게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들이 보낸 구제헌금 사용문제와 연결지었다. 베베 꼬인 생각만으로, 엉뚱하게 쓰고 있기에 안온다고, 사실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증거를 보여줘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이렇다. 심지어 약속 안지키는 바울의 신학과 가르침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부추겼다. 바울의 방문을 정말 반기고 학수고대하는 사람이 그랬다면 그럴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오는 것을 반겼던 사람도 아니었다. 뭔가 이슈를 만들어서 중심축에 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하는데 있는 것이다.
아시는가? 이런 사람들은 어느 누구라도 똑같은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삐딱한 은사를 가진 사람 같다.
아볼로에게도 큰 상처를 주었다. 큰 상처를 받고 고린도 교회를 떠난 아볼로에게, 바울은 여러 방식으로 고린도교회에 다시 가라고 권했는데, “전혀 갈 뜻이 없다”고 했다.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면 그랬겠는가? 아볼로와 바울을 비교해서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바울도 상처였지만, 아볼로도 그랬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잘 못된 생각이다. 저마다 은사와 목적과 역할이 다르다. 똑 같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바로잡고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니라.”
그런데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울에게도, 아볼로에게도 상처였지만 사실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였는줄 아는가? 당사자들이다. 은혜 받지 못하는 신앙생활, 힘을 엉뚱한 데 쏟는 신앙생활, 그 모습이,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잘되게 하거나 행복하게 했을리 만무하다. 결국 교회는 쇠퇴하고 말씀의 능력은 사라지고, 인생은 시들게 된다. 우리의 겉사람도 속사람도 후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궁여지책으로 새롭게 출발하고 시작할 곳을 찾는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과 장소와 기회가 새로워지면 새로워지는 것일까? 도무지 자기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 특별히 사람 관계에서는, 관계가 어긋나고 오해가 증폭되기만 할 때, 사람들과 절교를 하고, 새로운 사람과 기회를 찾는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새롭게 되고 변화되는 데 성공했는가? 정말, 진정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 고린도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을까? 관계가 회복되고 은혜와 평강을 되찾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고린도 교회는 성공했다. 승리했다.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은 바울은 괴로웠다. 그래서 간곡한 심정으로 디도를 통해 편지를 보낸다. 디도가 답신을 가지고 왔는데, 고린도후서는 바로 그 답신에 대한 재답신으로 쓰여진 서신이다.
먼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엿보자.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바울에게 전도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못했다. 편지를 들고간 디도가 늦어지고, ‘편지 보낸, 소식’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전도의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로 간다. 디도가 오는 길목에서 그를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날 밤의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고후7:5)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무엇이 더 문제였을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그동안 바울은 이미 숱한 어려움과 환난을 당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믿음과 소망으로 이겨내며 담대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인해, 안으로 낙심된 마음이 찾아왔다. 이렇게 되고 나니까, 드로아에서 문이 열렸다고 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마게도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낙심된 마음을 만나면 이겨내야 한다. 주님은 그러길 바라신다. 아시는가? 그러는 중에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주님은 예수 안에서 십자가를 붙드는 자에게는 힘과 능력도 주신다. 그 와중에 위로도 주시고, 소망도 주신다. 이 시간 주님은 그 힘과 용기를 다시 한 번 주 안에서 충만히 채우길 원하신다.
누군가 그 밤에 문을 노크한다. 디도가 도착했다. 방문이 열리자 순간 숨이 멈췄다. 시간도 멈췄다. 그 짧은 순간, 눈빛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됐다.’, 빛을 경험했다. 감사와 찬송과 기쁨의 눈물이 터졌다. 고린도 교회가 다행히 회개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하는 소식을 전했다. 성령이 돕지 않으시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성령이 도우시기에 회개와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난다. 고린도 교회의 승리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 말씀 13절에도 표현돼 있는 것이다.
앞에서 남의 처지와 형편이 돼보지 않고 편안한 자리에서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방문하기로 계획했다가 계획을 변경한 것은 임의로 한 것이 아니다. 아시아에서 환난을 당하고 심한 고난을 당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만났기 때문이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 없이 맞았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다.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기도 했다. 그 상태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면, 교회에 누가 되고 해가 될까봐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 오해는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풀면 된다. 그 의지와 믿음을 가지면 풀릴 수 있다. 이해 + 이해? “사랑해!”이다. 이해에 이해를 더해서 사랑해하면 오해는 풀린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직분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의 맥락에 있다. 3장 1절을 보면 디도가 가져온 소식에 그 문제가 중요한 이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자신들의 과오를 생각하니,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내려오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것이 맞을까? 잘 못을 저지른 사람을 직분의 자리에 앉혀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사람들로 재구성해야 할까? 자신이 염치없게 느껴져서 자리를 떠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자신의 염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만족이 중요하다(고후3:5). 자신의 염치를 위해서 그만둔다는 것은 또 다른 불순종이다.
지난주에 말씀했던 것처럼, 자신의 참담함을 경험하고 돌이킨 사람에게는 “형제를 굳게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라야 또한 자신의 의나 율법으로 대하지 않고 긍휼한 마음으로 나락에 떨어지고 낙심한 이를 다시 세워줄 수 있는 것이다.
디도의 보고는 고린도의 교인들과 직분자들이 자신의 참담함을 경험하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분자들은, 성도들은 빚진 마음으로 더 사랑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형제를 굳게 하는 신앙적 결의가 있어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 이렇게 이겨내고 순종하고 따르다보면 어느새 은혜와 형통케 되는 복이 넘친다.
바울의 경험을 보라. 그는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괴수 중의 괴수였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참담함에 눈이 가려졌으나,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복음의 새일꾼이 되었다.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었을 때, 그 발단은 마가를 2차선교여행에 동행하느냐 였지만, 실질적인 문제는 바나바에 대한 낙심된 마음 때문이었다. 바나바가 음식 문제로 외식하는 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자신이 바나바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마음에는 한 영혼이라도 실족케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며 판단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4:2) 이 말의 진의는 바울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왔다.
우리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서면, 자기 의라고 하는 것 앞에 서는 것과 다른 것이 있다. 무엇이 다른가? “양심을 가지고” 자기 의 앞에 서면 염치없는 모습에 괴롭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면, 그 긍휼하심 때문에 오히려 감사가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소망이 생긴다. 자기 의 앞에 서면, 자유함이 없고, 괴롭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자유함이 있다. 그 때문에 형제를 사랑으로 굳게 하는 사명을 진정으로 사모하게 된다. 우리가 정말 회개하고 주님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 때에는, 남들이 비방하고 욕을 해도 마음의 평강이 있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남들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뭐라고 하지 않아도 평강이 없다.
13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이 말씀은 시편 116의 말씀에 대한 인용이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나는 박해를 당했지만 믿었고, 많은 환난을 당했다.” 고통을 당할 때,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고통이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지만 주님께서 도우시고 함께 하심을 믿기에, 그 순간이 어렵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획이 선하시고 인도하심을 믿기에, 염려와 걱정을 떨쳐 버리고 넉넉히 승리할 수 있었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말이다. 믿음은 이겨내는 열쇠였다.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이 믿음의 원리는 곳곳에 적용된다. 자신의 인생에서 고통을 당할 때,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 가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믿음이 있기에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관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오해의 고통도, 미안함도, 그로 인한 환난도 믿음이 있기에 이겨낼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아는가?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라는 것을 말이다.
14절을 보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예수와 함께 죽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함으로 떠나거나 포기하거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을 내는 것이다.
이것을 이겨내고 나면, 부활의 영광을 얻는 것이다. 15절에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그가 깨달은 감사와 은혜는 이것이다. “변화와 새로움”, “새로운 변화의 선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였다. 그 속사람의 변화와 새로움이 우리의 가정을 새롭게 한다. 교회를 새롭게 한다. 이웃을 새롭게 한다. 자녀를 새롭게 한다. 형제를 새롭게 한다. 변화되는 선물을 삶의 자리에 들여 놓게 된다. 저는 평신도 주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공동체인 교회의 온전한 연합과 사랑과 하나님 속에 이런 복과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한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붙들어주고 기도하자. 넘치는 사랑과 은총으로 사랑 넘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16절에 겉사람은 낡아지나, 나이 든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 시달리고 , 시들어진 인생이요, 가정이요, 공동체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은 무엇인가? 어려움과 문제를 경험삼고 교훈 삼아, 더 좋은 공동체와 교회와 가정, 사회를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과 장소와 시간이 새로워져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져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기회와 시간과 장소는 과오의 반복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말라. 그래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