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31. / 성령강림절후 1주 및 삼위일체주일)

* 목회로 세우신 일에 대한 감사

 

하늘의 영역이 선지자의 경험세계에 들어온 중요사건이다.(×2)

 

스랍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 스랍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복종하는 천사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과 신하의 회의장면처럼, 하나님과 천사들의 회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장면은 성경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욥기에서, 스가랴에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그런데 차이점은 욥기나 스가랴에서는 사탄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비판한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인 의심이나 항변을 대변해주는 내용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거룩하신 주님의 보좌와 일하심을 무한히 찬양한다. 최후승리의 영광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 그런데 이사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소명사건과 연결지었다.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물으셨을 때, 이사야가 하나님께 자원하며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고백한다. 참 감동적이다. 이 고백과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길 빈다.

 

그런데 의아해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이상하지 않은가? 전능하신 주님이신데, 왜 이런 탄식을 내뱉으셨을까? 하나님 곁에는 무수히 많은 천사들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따져보자면, 엘리야가 자기만 ‘열심’이 특심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엘리사와 하사엘과 예후와 아직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천명의 용사를 준비하셨다. 그런데, 아무도 보낼 사람없어 애타게 찾으시는 주님의 모습은, 왠지 이상하다.

 

그런데 이 본문을 마주하면서 저의 눈앞에 보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예루살렘 왕궁에서는 긴급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7장 2절을 보면, 아하스 왕에게, 한 소식이 들려온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려 한다. 6절,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쓰러뜨리고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자” 그러면 시급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무엇인가? 국가재난안전을 위한 긴급회의 소집이다. 이 일을 어찌 할지, 의논한다. 그런데 솔직히 답이 없다.

또 한 장면이 있는데, 히스기야 때이다. 예루살렘이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했다. 남왕국 유다의 모든 성읍은 점령당했고, 이제 예루살렘 한 곳 남았다. 성경이 전하는 그날의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앗수르의 참모총장 격인 랍사게가 예루살렘주민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히스기야와 하나님을 조롱한다. 가망이 없다. 역시 국가재난안전을 위한 긴급회의가 소집되고 관료들을 발 빠르게 움직인다. 그런데 뾰족한 수가 없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옷을 찢을 만큼 절박하다.

 

두 상황 모두다 누가 나가서 맞서 싸울 장수가 없다. 모략가도 없다. 도울만한 우방국가도 없다. 누가 이들을 위해서 싸워줄 수 있을까? 한마디로 끝이다.

 

이렇게 눈앞에 펼쳐진 답답하고 어려운 현실 앞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바로 천상의 회의의 모습이다. 스랍들이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3박자에 맞춰 찬양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고 아름다운 찬송의 소리를 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낼 만한 자를 찾기 위한 안건을 꺼내 놓으신다.

이런 장면은 긴급회의를 해야 하는 예루살렘의 현실과 굉장히 괴리된 모습이다. 하지만 아시는가? 이것이 우리가 뜨기를 원하는 믿음의 눈이라는 것을 말이다. 모두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눈을 열어주신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인간사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천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회의장면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뭔 줄 아는가?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4:8-9)고 했다. 왜? 질그릇 같이 깨지기 쉬운 우리의 존재가 ‘주님’이라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기 때문인데,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가? 인생의 벽에 갇혀있거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는가?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우리에게 있지 않다. 지금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것을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믿음의 눈이 우리에게 열리기를 바란다. 아람 군대(군사, 말, 병거)가 엘리사를 에워싸고 포위했을 때, 낙심한 게하시를 위해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기도하자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있는 것을 보았다. 야곱이 그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길은 괴롭고 힘든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 가는 중에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의 눈을 뜨게 됨으로 안심할 수 있고,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믿기를 원하신다. 확신하기를 바라신다.

 

2.

앞에서, 궁금케 했던 대목,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찾으셨을까? 이 고민은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아람군대와 에브라임의 연합군에 둘러싸인 아하스의 고민이기도 하고,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히스기야의 고민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왜 고민하시는가?

물론 이렇게 생각해야 옳다. 하나님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씨줄과 날줄이 만나 비단을 이루고 무늬를 이루는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에 동참할 수 있는 이를 찾으신다고 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와 ‘우리가 찾는 이’가 다르다. 우리가 찾는 자는 누구인가? 문제 해결자다. 그 능력을 가진 자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자를 찾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본문은 도저히 우리 믿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찾으실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스랍들의 찬송에 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리고 13절에는 ‘거룩한 씨’에 대한 언급도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이를 찾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이를 찾으신다. 레위기19장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1절을 보면 높이 들린 주의 보좌에 주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 3절에 주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고 고백된다. 4절에 성전에는 주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연기가 충만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거룩과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다. 또한 주님은 온 세상, 아니 우리의 삶의 자리,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그 영광이 가득하길 원하신다. 그 성전에서 본 환상과 비전을 일상의 삶의 자리에 가지고 갈 만한 자, 그래서 ‘거룩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 그를 찾으시는 것이다. “주의 은혜로 소망을 안고 세상에 찾아가 빛을 비추는 교회!”

 

그런데 이것을 깨닫고 나니까, 어떠한가? 사실 더 큰 실망이 찾아온다. 그 자격과 기준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어떻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가당치도 않다. 아무 생각 없이 의욕만 앞서서 감정적으로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했던 사람에게는 막상 맡겨주신 일을 현실로 닥치면 후회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시는가? 이사야도 똑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사야의 탄식을 들어보라. 5절에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 만군의 왕이신 여호와를 뵈었다고, ‘화를 당할 것이라’고 한다. 2절에 스랍들이 여섯날개를 가졌는데, 한 쌍은 얼굴을 가렸고, 또 한 쌍은 발을 가렸으며, 마지막 한 쌍으로 날고 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함부로 뵐 수 없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의 수치스러움과 욕망을 가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의와 욕망을 드러내서는 태도는 바르지 못하다.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는 어떠한가? 자신의 의를 앞세우지 않는가?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가?

 

천사들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하는데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무방비 상태로 선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된 것이다. ‘화로다.’ 그런데 그때 스랍 중의 하나가 제단 숯불을 부젓가락으로 집어서 이사야의 입술에 댔다. 그리고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 음성을 들려준다.

 

‘오! 놀랍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이사야는 정화되는 사건을 체험하게 됐다. 자격 없던 자가 자격을 부여 받는 체험, 기준 미달자가 그 기준을 넘어서는 체험. 용서와 구원체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앞에서 정화되는 체험을 허락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 뜨거운 감격과 기쁨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여러분 이 시간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기를 축원한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태워주심을 믿음으로 받으며 감사하시길 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진정한 회개가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를 찾으시기 위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르셨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했다.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셨다. 이 베드로의 각오와 결단이 진심이었을까? 거짓이었을까? 분명히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부인했는가? 베드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 자신도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한 없이 비겁하고, 용기를 잃고,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베드로 자신이 굳게 장담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을 때, 그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내 뱉은 말 때문에 얼마나 참담한지 모른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미리 아시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앞서 말씀 하신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아는가?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경험했기에, 돌이킨 후에는, 연약한 형제의 믿음을 도울 수 있다.

 

이사야도, 이런 것 아닐까? 하나님의 현존하심 앞에 자신의 추함과 부정함을 깨닫고, 그 참담함을 경험했다. 그래서 ‘화로다!’ 말했지만, 하나님의 용서와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체험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담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주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신 구원의 은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하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를 밀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주님은 여러분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신다. 그 마음을 깨닫고 돌이키길 원하신다.

그리고 “네 형제를 굳게 하라.”신다. 이사야의 소명과 사명도 바로 이런 맥락이었다. 이런 이를 찾으셨다. 완벽하고, 문제없고, 자격과 조건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밑바닥과 추함과 연약한 모습을 발견했지만, 주님의 자비를 얻은 자 알이다. “주님 나를 보내소서.”

 

여러분, 그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 가서 하는 하는 말을 들어보라. 아람과 에브라임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위협하지만, 7장 7절을 보라.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그러니 호들갑 떨지말고 “삼가 조용하며”(4절a),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4절c) 9절에서는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주님을 굳게 믿도록 격려한다.

히스기야 왕 때는 어땠을까? 랍사게의 조롱하는 말을 듣고 긴급회의를 소집했지만 아무 소용없는 상황에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가서 그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열왕기와 역대기가 전하는 내용은 어떠한가? 이사야의 격려와 권면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고, 앗수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에 좋은 것들을 떼어다가 앗수르에게 바쳤다. 게다가 더 참담한 것은 다메섹(아람)의 신들을 들여와 제사한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소용없었다는 것이다. 돕는 것 같았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니 도울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외국군대의 괴롭힘만 당할 뿐,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대하28:21) 이것이 성경의 적나라한 고발이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의 말을 들으시고 꾸짖을 듯하니, 기도하소서.” 말한다. 히스기야가 그대로 했다. 그럴 때, 랍사게의 조롱과 위협은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히스기야가 앗수르 측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 본 후에, 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일까?

아시는가? 협박하는 사람에게는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소원을 들어주면 그칠 것 같지만 아니다. 좀 전에, 앗수르가 아하스 때 한 일을 보라. 처음부터 이득을 취하려 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협박에 넘어가면 죽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항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성전에 올라갔다. 그리고 기도했다. 이처럼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길이 열리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펴 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이르되(19:14b-15a),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19:19)하니라.

다음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산헤립 군대가 철수해 있었고, 시체가 성 밖에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의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왕하19:35) 쳤다고 말한다.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본토에서 내전이 일어나, 산헤립에서 에살핫돈이 대신 왕이 되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놀랍다. 누구도 그 방법을 예측할 수 없고, 섭리를 측량할 수 없다.

 

우리의 모습은 어느쪽에 서있는가? 세상적인 방법과 그 유혹을 끊지 못하고 여전히 불신앙의 길로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지는 않는가? 보니까, 불신앙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뜻대로 생각대로 한다. 그러나 승리하는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우리 여기, 어렵고 가장 힘들 때, 하나님을 믿음으로 굳건히 서기를 축원한다.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를 찾으시는가? 부르시는가? 능력자나 해결자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며, 그 믿음을 굳게 할 자인가? 다시 한 번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자. “돌이켜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여러분 여러분의 형제, 자매, 이웃에게 복음이 되라.

긴급회의 속에 답이 없고 막혔을 때, 천상회의의 비밀이 우리의 믿음세게로 들어오길 축원한다. 그리고 이사야가 긴급회의에도 답을 찾지 못하는 자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고 전했던 것처럼, 이웃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그 믿음을 전하는 이들이 되라.

아하스는 옆에서 돕는 이사야의 권면의 말에도 불구하고 자기 길로 행했지만, 히스기야는 기도했다. 그처럼, 우리 역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거룩하신 주님의 영광을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담아 승리할 수 있기를 빈다.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 그러기에 내 믿음, 내 능력, 내 의를 가지고 갈 것이 아니라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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