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4. / 성령강림절 및 요한웨슬리회심기념주일)
오늘은 성령강림절이자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웨슬리의 회심기념주일이다. 회심은 성령의 중요한 역사이다. 그 기점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고 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는 우리 삶의 더할 나위없는 귀한 선물이다. 오늘 이 은혜와 역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오늘 그런 점에서 지난주에 이어 모세의 이야기를 은혜로 나눠보고자 한다.
- 고목 같은 모세를 깨우시는 하나님
모세는 놀랐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계획 때문도 아니었다. ?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을 듣고, 구원을 계획하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들려주셨다. 여기까지는 흥분이다. 그런데 그가 놀란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에게 그 임무를 맡기겠다는 것이다.
‘아~?’ 우리는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어찌 되든 상관없는데, ‘나’이면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자기 이익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은 안되는데, ‘나’여야만 한다고 욕심을 부릴 때도 있다.
“애굽왕 바로에게 가라.” ‘말이 안 된다.’, ‘믿을 수 없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에게 위임하셨을까? 모세는 특별한 사람이요, 선택받은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고 주인공처럼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다. 모세는 특별한 탄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평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과거는 잎이 무성하고 화려한 나무 같았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나뭇잎 다 떨어지고 인생의 주름을 드러내는 고목 같이 되었다.
예화. 나이별로 평등해지는 것이 있다.
40대는 지식의 평등 : 좋은 대학을 나왔건 그렇지 않건, 세상사는 지식은 비슷해진다.
50대는 외모의 평등 : 50대가 되면 모두 둥글넓적해져서 미운 것도 예쁜 것도 없어진다.
60대는 남녀의 평등 : 힘도 비슷해지고, 하는 행동도 비슷해진다.
70대는 건강의 평등 : 아픈 사람이나 안 아픈 사람이나 비슷해진다.
80대는 재물의 평등 :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쓸데가 없다.
90대는 생사의 평등 : 살아 있으나 죽어있으나 마찬가지이다.
모세도 세월을 겪으면서 평범해졌다. 아니 이젠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
이렇게 보니까, 성경이 보여주는 공통점들이 보인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 연약한 사람, 부족한 사람을 들어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브라함을 보자.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거주하며 살 때, 불우했던 가정환경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형제였던 하란은 먼저 죽었고, 자식을 우르에 묻어둔 채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런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그곳에 묻어둔 채, 조카 롯과 단출하게 그곳을 떠났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를 축적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남겨둘 것이 애당초 없었다. 하란에서 그런 기대가 있었지만 우리지 못했다. 그 아쉬움을 버려두고 떠나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인도하셨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만 봐도 그렇다. 계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노키오처럼 여러 번 거짓말을 했다. 그 손자 야곱은 형을 속였고 아버지에게 거짓을 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도 사기를 당하는가 하면, 삼촌의 눈을 속여 재물을 빼앗았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정욕에 눈이 멀어 매춘부와 계약을 맺었다. 그 매춘부가 며느리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다윗과 밧세바의 스캔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라합은 기생이었으며, 롯은 이스라엘이 싫어하는 모압 사람 이방인이었다. 므낫세는 아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했고, 아몬은 하나님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보에 이름이 올랐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누구도 죄인 아닌 사람 없었고, 완벽하고 특별한 사람이 없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힘과 능력이 되어주신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연약하고 부족하고 인간적인 기준에 들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만 특별히 위하심이 아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안에 있다.
우리가 얼마 전 김영석 목사를 통해 로마서의 말씀을 들은 바 있지만, 바로왕까지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로마서 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말씀한다.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를 루하마, 암미 긍휼히 여기다, 내 백성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신다.
-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이야기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럼 왜 모세만 이렇게 기록되었는가? 모세만 이렇게 특별하게 부르셨는가? 하나님은 여전히 선택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사람에게만 복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이 아닌가?
토인비라는 역사연구가가 있다. 그는 역사발전을 도전과 응전으로 설명한다. 자연적, 사회적 도전에 인간은 응전을 하면서 역사를 발전시켰다. 거기에 ‘창조적 소수자’라는 중요한 개념이 나온다. 역사의 변곡점에 창조적 소수자가 나와서 위기 상황에 영웅적으로 응전을 하면서 새 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모세도 창조적 소수자이다.
그래서 그를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그렇다면 아론은 누구이며, 미리암은 누구이고, 출애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성경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성경은 달리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14절을 보라.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니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성경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준비시키셨다는 것이다. 아론도 준비시키셨고, 훌도 준비시키셨다. 여호수아도 갈렙도, 수많은 이들을 하나님은 이미 준비시키셨다.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지 않고, 애굽 안에서 바로의 백성으로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하심으로 출애굽을 준비시키셨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각각 준비시키시고 훈련시키신 것이지, 모세가 한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버리라. ‘누구만’,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사람은 자기만 성숙하고 남은 옛날 모습 그대로 일거라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 얼마나 오만한가? 엘리야는 자신만 ‘열심’이 특심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를 바꾸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에 자기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부족을 느끼고 실족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사, 예후, 하사엘을 준비시켜 놓으시고 심지어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천 용사를 준비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무수히 많은 각각의 이야기를 다 기록할 수 없으니, 대표적인 것을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일일이 다 기록한다면, 찬송가 가서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잘 구분하라.
모세오경은 모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세를 쓰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 각자를 주인공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 왜인줄 아는가?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엘리야도 하나님 역사의 일부일 뿐이다. 모세도 그 일부이다. 우리도 그 일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모두에게 자비와 은총으로 나타나다.
단! 훈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과정을 거치고 있다. 결국 승리할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 이것을 믿으라.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감당할 힘과 능력을 주신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감당할 힘과 능력을 주신다.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다.
- 힘과 용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가지 이적을 보여주신다. 능력이 임하는 징표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더 큰 것도 보여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지팡이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던지라 하실 때, 그것이 뱀이 되어 모세가 그 뱀을 피했다. 다시 꼬리를 잡으라 했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6절에 손을 품에 넣으라 하셨을 때, 나병이 생겼다. 그러나 다시 품에 넣었다가 뺐을 때, 본래의 살이 돌아왔다.
두 번째 이적부터 설명한다. 무슨 의미일까? 이 두 번째 이적은 한국교회 강단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현실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모른다. 나병은 굉장히 수치스러운 질병이었다. 그 병에 걸렸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접촉하려 하지 않고, 꺼릴 것이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대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왕 앞에 서야 하는 모세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문둥병자와 같은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애굽왕 앞에 서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의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을 때, 손이 본래 살로 되돌아오게 하셨다. 모세가 바로 왕 앞에 당당히 서도 절대 나병환자와 같은 수치와 혐오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대면할 용기를 주신 이적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과거, 실패, 초라함 때문에 사람 앞에 서기를 꺼릴 때가 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격지심 때문에 내가 먼저 그렇게 나를 여긴다. 사람들이 욕할까봐 두렵고, 나를 험담할까봐 두렵고, 나를 벌레 보듯 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두려워한다. 그런데 기억하라. 나의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 신경쓰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나의 과거, 실패, 초라함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떠날 때 문제가 된다. 심지어 하나님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편견도 제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용기를 더하셨다.
여러분 사람들 앞에서, 없다고 부족하다고 못배웠다고, 창피한 일을 겪고 있다고 위축되지 말고, 더욱 용기를 내라 당당하라. 자신감을 가지라.
첫 번째 이적에 주목해보자. 17절에 하나님은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말씀하셨다. 그 지팡이는 모세의 것이었다. 멋있게 번역해서 지팡이이지, 실상은 양을 칠 때도 사용할 수 있는 다용도 막대기와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하시고 함께 하시자, 그 막대기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를 인도하는 막대기로 삼으셨다. 양을 인도할 때 쓰이던 막대기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막대기로 사용하셨다. 이게 하나님께서 쓰시는 원리이다. 내게 없는 요술지팡이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에 능력을 부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으셔서 귀하게 사용하신다.
잘 아는 분의 이야기 이다. 사업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늘 부모 의존적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가 사업자금을 대주곤 했는데, 오래 견디지 못하고 사업을 말아먹곤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자존심 상하는 일에 대해 인내하지 못했고, 마음이 약해서 쉽게 포기하곤 했다. 더 이상 어머니가 도와줄 자금이 없었다.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경제문제로 이혼의 위기도 찾아왔다. 어느 렌탈회사에 지인의 소개로 들어갔는데, 분당으로 배정을 받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거기에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 두려웠다. 그래서 괴로웠다. 체면 깎이는 일이라 생각했고, 그런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못할 거라 생각했다.
3,4년이 지났다. 어떻게 됐을까? 아는 사람이 많은 분당에 배정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창피하게 여겨졌던, 지인에 대한 리스트 주소록이 오히려 그의 가정을 지키고 삶을 지키는 지팡이가 됐다. 아는 사람이 많으니, 소개, 소개로 렌탈 실적이 상당히 높게 됐던 것이다. 지금 벌이가 개인사업할 때보다 꽤 된단다. 지인의 리스트를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집어 들었을 때, 능력이 됐다.
하나님은 다른 것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손에 있는 것으로 기적 같은 일을 이루시겠다고 한다. 그 백성을 구해내겠다고 하신다. 인도해 내시겠다고 하신다.
여러분, 아시는가?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능력주시는 분 때문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돼서 말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영상을 하나 보자.
4.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박완서의 소설 [나목]에, 이경이라는 사람이 젊은 날 우연히 옥희도라는 사람을 찾아갔다가 캔버스에 [고목]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발(극심한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고목을 보면서 “그렇다면 잔인한 태양의 광선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태양이 없는 한발… 만일 그런 게 있다면, 짙은 안개 속의 한 발……무채색의 오톨도톨한 화면이 마치 짙은 안개 같았다.”고 느낌을 말한다. 아마도 안개와 미궁 같은 인생 속에 고목이 돼버린 것 같은 인생이라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핑계 거리는 변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뒤 이경은 우연히 옥희도의 유작전에 가서, 예전에 자기가 본 그림은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목이란 겨울을 나기 위해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말한다. 벌거벗은 나무들은 죽어가는 고목이 아니라 모진 추위를 견디며 새 봄을 준비하는 겨울 나무였던 것이다.
여러분 모세가 고목이 아니라 나목 같은 사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목은 실록의 계절 5월처럼 봄을 만나고 여름이 오면 무성한 잎을 뽐낸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에게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됐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고목 같았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풍성하게 될 줄 믿으라.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을 붙여주셨던 하나님께서 나목에 하나님 영광의 불이 발하도록 하실 것이다. 열매 맺게 될 줄 믿으라.
하나님이 명령하신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삶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