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17. / 승천주일)
1.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여수 다녀오다가, 멋진 광경을 봤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지리산 자락에 핀 철쭉입니다. 순천만을 거쳐 구례를 지나면서였는데,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더 가까이에서는 어땠을까요? 환상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모세는 하나님의 산이라고 하는 호렙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이집트의 왕자로 40년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명분이야 어땠든,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났습니다. 약 여든 쯤 되는 나이입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았습니다. 참 수수께끼 같은 내용인데, 저는 이 풍경을 보면서 어쩌면 이와 같은 광경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이게 호렙산 떨기나무입니다. 이 사진은 그 화려한 모습입니다.)
어느날 모세는 장인이었던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몰고 광야 서쪽에 있었던 호렙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곤 하는 곳이었는데, 산신령이 나타나듯, 하나님이 있는 곳이라는 주술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맘때쯤이면, 양떼의 풀을 넉넉히 뜯게 할 수 있고, 산 빛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순천만은 가을에 갈대가 정말 멋지다고 하는데,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들의 최고 감탄사는 조물주, 창조주를 예찬하는 것입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2)고 말합니다.
모세는 신비감에 휩싸였습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보았습니다. 불꽃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그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보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의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이 장면이 처음 본 장면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모세만 본 장면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보는 장면을 무심코 넘겨서 그게 뭔지 모르는 때가 있죠?! 그동안 어쩌면 이 장면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광야로 피신했던 40년간 적어도 매년, 숱하게 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3절의 말씀에서처럼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했을까요?
게다가 거기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다른 목자들이 있다면 똑같이 봤을 법한 장면입니다. 4절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가 그 광경에 사로잡혀 속히 달려가 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의 신앙적인 과정도 이와 같을 때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간증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흘려듣거나 귀담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과의 만남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왜 이제서야 하나님을 만나게 됐을까, 이전에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진작 알았더라면 우리 인생이 더 의미있고 행복하고 좋았을텐데, 왜 이제 알았을까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여러 차례 하나님을 만날 기회와 신앙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쳤습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도 마주하는 인생이지만 나에게 더 특별하게 와 닿는 순간이 일어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모두가 똑 같이 이 자리에 와 있지만, 어느 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이도 있고, 그냥 앉아 있는 분도 있고, 딴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죠?!
이왕이면 여러분 모세가 3절에서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했던 것처럼, 적극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간 여러분을 불러주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다시 한 번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에 영접하고 모시는 것입니다.
5절에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여러분이 벗어야 할 신은 무엇입니까? 불신앙과 영적 태만의 신을 신고 있었다면 그것을 벗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2. 자기를 위한 오감과 하나님을 위한 오감
여수 갈릴리교회는 참 이름에 걸 맞는 교회였습니다. 갈릴리처럼 교회 앞에 동쪽 해가 떠오르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못 오신 분들, 같이 왔으면 참 좋았겠다.’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사가자고 했어요. 여러분을 한 분도 마음에서 빠뜨릴 수 없습니다. 아무튼.
밖에서 보는 교회도 참 아름다웠지만, 교회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어요. 비밀의 정원 같았습니다. 김순현 목사님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곤 합니다. 손수 정원을 정성스럽게 성실하게 가꾸면서 생명에 대한 감성과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손수 번역하신 책을, 한 권 선물받았습니다. (사진)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겠지만, 다 할 수 없는데, 이 책 한권에 어느 정도 메시지가 들어있던 거겠죠?! 책제목은 이렇습니다. ‘정원에서 하나님을 만나다'(비겐 구로얀)
그는 정원에서 꽃들, 나무들,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아름다운 손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로얀은 오감에 대해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이 오감이야 말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아는 중요한 감각기관이라고 말입니다. 오감은 무시한 채 영감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옳다. 맞다.’ 무릎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 사건을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도 공중의 새와 들의 핀 꽃을 보시면서 동일한 경험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죠. 예수님이야 말로 오감을 통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구로얀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오감은 젊은 시절에는 멋대로 날뛰고, 장년 시절에는 무시를 당하거나 홀대를 당한다.”
나이가 들면 오감은 무뎌지죠? 감각이 둔해집니다. 그런데 또다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층 보강된 오감은 새로운 경이감을 가지고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행동이 느려지는 우리 같은 나이 든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아닐까 싶다.”
무슨 말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오감이 타락해있을 때는 오직 자기 쾌락을 위해 있습니다. 자신의 쾌감을 위한 것만 느끼고 즐기려고 합니다. 더 맛있는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즐길 수 있는 무엇을 찾습니다. 자극에 익숙해지고 나면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서 오감은 닳게 되는 것이죠.
전도서 기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6:7,9)
자신의 쾌감을 위한 것 말고도 우리가 느껴야할 수만은 것들이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층 보강된 오감이란, 그것들에 눈뜨게 되는 것일 겁니다. 가족의 존재를 감사히 알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하는 것.
갈릴리 교회에서 정원을 즐기고 계신 전도사님의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장채식 할머니께서 쑥을 캐시면서 그 쑥이 얼마나 좋은지 좋아하시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박영숙 권사님도, 오영림 권사님도, 함께 하셨던 분이 모두 저마다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습이야 말로 쾌감을 위해 오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통해 좋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3. 고통을 분명히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그러고 보니까, 중요한 신앙의 변곡점도 여기서 나타납니다. 자신의 쾌감을 위해 신앙생활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느냐, 말입니다.
나의 유익과 쾌감을 위한 것이 아니면 그냥 지나쳤던 오감이, 나의 쾌감을 만족시킬 수 없을만큼 무뎌지자, 역으로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을 마주하고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과 눈길과 마음이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월을 알아가면서,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낍니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느꼈던 일들이,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서, 그 고통을 공감하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부산에서 일가족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 동네와 아주 가까운 내곡동에서는 총기난사사건이 있었습니다. 네팔에서는 두 번 씩이나 큰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마주하고 있다보니,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입니다. 무관심한 신을 벗고 보니, 하나님의 심장과 가슴이 뛰고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7절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거룩한 땅에서 신을 벗은 모세에게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제 가라 명하십니다.
그보다 앞서 2;23-25에는 애굽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탄식과 고통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됐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기억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한 없이 긍휼하신 분입니다. 상처를 당하는 이들에게 한 없이 부드러운 분이십니다. 상처를 싸매시고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인스턴트 음식과 문화에 길들여져서 우리의 오감이 오염됐습니다. 우리 신앙이 자기만족과 유익에만 머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하나님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듣는 게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모세도 이랬던 것이 아닐까요? 자기만족을 위한 오감은 무뎌졌지만, 하나님을 위한 오감은 예리해졌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한 힘이 있습니다. 맛있는 거 다 먹어봤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맛있는 게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화려한 것, 눈에 보기에 좋은 것, 안목의 정욕을 채워봤기에, 더 이상 화려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비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좋은 말 좋은 소리 다 들어봤지만, 주님의 음성만한 울림이 없습니다. 온갖 냄새를 다 맡아 봤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만한 냄새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만져봤지만 하나님의 긍휼만한 부드러움이 없습니다.
신앙의 단계가 이렇게 성숙해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4. 나를 위한 신앙생활, 하나님을 위한 신앙생활
‘모세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으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징표로 할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마음의 할례입니다. 모세는 거룩한 하나님의 현존 앞에, 네 신을 벗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을 벗으라’는 뜻은 유대인의 사고방식에 더러운 부분이기에, 죄악을 벗어버리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노예 신분에 있는 사람들은 신을 신을 수 없었기에 ‘신을 벗으라’는 것은 자기 권리를 내려놓으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얼굴을 뵙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우리에게 나타나심을 깨닫는데 방해되고 가로막는 것을 벗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감에 적용해보십시오. 왜곡된 오감, 오염된 오감, 자기 쾌락을 위한 오감을 비롯한 것들, 이시간 다 벗어버릴 수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자기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있을 때에, 하나님은 의심의 대상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덜 채우시는 부족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나에 대한 것은 무뎌지고 하나님에 대한 것이 예리해졌을 때, 아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깨닫고 나면 얻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명입니다. 요단강가에서 세례요한이 그랬습니다. 주님을 만난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모세를 필요로 하셨습니. 하나님께서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곳에서 ‘나의 신’을 벗을 때, 그 어느 곳이든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구원의 역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자기만족과 쾌감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다가, 언제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까? 언제 주님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를 사랑할 것입니까? 언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며 헌신 할 것입니까? 언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죽도록 충성할 것입니까?
이제 나의 쾌감을 위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한 거룩한 삶으로 결단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