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4.12. / 부활절 2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 모든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따스한 햇살 가운데 불어오는 바람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고, 초록으로 덮인 대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계절에, 성령의 바람으로 치유함을 얻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머리 숙인 저희에게 평강과 소망으로 채워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부활절 둘째 주일,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창립 5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대한, 절실한 바람을 한 가지 생각해본다. 누차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 교회를 통해,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다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것이 교회론의 핵심이다. 저를 비롯한 우리 개개인에 대해서도 기대가 있다. 우리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졌으면 좋겠다.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이루더라도, 결국에는 나는 냄새가 있다. 흩어지는 안개나 시든 풀냄새 말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닮고자 하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제목이다.
불러드릴 수는 없지만 잠시 들어보자.
그러려면 어떤 목표와 목적을 삼느냐는 청사진이 중요하겠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두 가지 청사진을 받아 내려왔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것이었는데, 하나는 율법이고, 하나는 성막이다. 다윗은 왕위가 영원히 견고케 되는 왕정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받았는데, 이것이다. ‘하나님의 법도와 말씀’을 청종하고 경외하라는 것이었다.
청사진은 그마 만큼 중요하다. 무슨 말인가?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한참 유행하던 교회의 청사진은 ‘구원의 방주’였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교회에 들어오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진정한 영혼구원의 청사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까, 교회는 세속화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대형 괴물’이 되었다는 지탄을 받게 되었다.
저는 이런 청사진을 그려본다. 대사관의 모델이다. 대사관은 본토와 대상이 되는 나라와 관계를 원활이 하면서, 자국의 메시지와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미국대사관을 보면서 미국이 보여야지, 영국이 보여서는 안 된다.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영국대사관을 보면서 영국이 보여야지 미국이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해야 할까?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 나라가 보여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으로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지, 교회를 보면서 대기업이 보이고, 교회를 보면서 CEO 같은 인기 있는 목회자가 보인다면 어떻겠는가? 여러분 우리가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규모가 크고 작음은 문제되지 않는다. 얼마만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그 시대와 지역과 삶에 감당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말 우리 교회를 통해서, 작지만 하나님 나라가 보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보이며, 사랑의 능력이 보였으면 좋겠다. 강대국의 대사관은 아무리 작더라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이기에,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해하지 못하도록 그 역할에 충실해야한다. 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 땅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능히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늘의 말씀은,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되는 청사진과도 같은 말씀이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국 교회도 성령이 임했을 때, 이런 모습으로 교회가 일어나고 부흥했다. 오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건축헌금을 내고, 성전을 짓기 위해, 작정하고 헌신했다. 그 결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여러 악용의 소지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소유의 특별한 주장과 구분이 없다는 점, 재물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다는 점,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이념(理念)이나 사상(思想)의 문제를 낳기도 했고. 또 이단, 사이비에서 재물을 갖다 바치도록 악용하기도 했던 본문이다. 더군다나 그 뒤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오늘의 본문 내용에 반하는 것이다. 위로의 아들이라 불렸던 바나바는 그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두었다. 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달랐다. 이들은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에게 가져왔다. 이 때문에, 무엇을 맞았는가? 차례로 죽음을 맞았다. 자기를 속이고 사도들을 속이면, 그 대가로 이런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두려움과 공포심을 심어주고, 오인하게 만들었다. 나쁘게 적용하기 좋은 대목이다.
이 논리대로 읽는다면, v.35을 보라. ‘필요에 따라 나누어줌이라.’ 여기에는 문제가 없을까? 이 뒤에, 6장을 보면 구제의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 헬라파와 유대파 사이에서 벌어졌다. 헬라파 사람들이 구제의 문제가 유대파에게만 쏠린다고 하여 불공평하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갈등과 분쟁을 일으켰던 사도들의 미련함에 대해서도 목회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은 어떤 책임을 물으셨어야 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단순히 양심을 속이고 사도들을 속인 결과로발생한 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읽는다면 표면적인 내용만 취하는 것이다. 그 행간에 감추어져 있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자 그것을 밝혀보려고 한다.
이 대목은 누가의 신학 속에 이해해야 한다. ① 누가가 쓴 첫 번째 책이 누가복음이고, 두 번째 쓴 책이 사도행전이다. ② 누가복음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의 이야기를 예수 중심으로 썼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이방과 로마까지의 이야기를 사도를 중심으로 썼다. ③ 누가복음이 부활이전의 예수님의 활동과 사역에 대해서 기록한다면, 사도행전은 예수부활이후의 사도들의 활동과 사역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비교해서 읽으면 상응하는 부분이 많다.
① 데오빌로에 대한 헌정사로 시작, ② 예수님과 교회활동이 성령을 받은 이후라는 점, ③ 예수와 교회활동의 준비 기간이 40일이라는 점, ④ 예수님과 베드로의 유사성 (공생애 초기의 성령체험-오순절성령체험 / 나사렛 첫 설교로 공생애 시작-예루살렘 첫 설교로 시작 / 중풍병자 고침 – 성전 미문의 중풍병자 고침 / 백부장의 초청 – 백부장 고넬로의 초대) ; 흡사 예수님처럼 되었다. ⑤ 바울과의 유사성 (마지막 부분에서 산헤드린, 헤롯,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음-마지막 부분에서 산헤드린, 헤롯, 아그립바, 베릭스와 베스도에게 심문을 받음 / 빌라도에 의한 3번 무죄 선언-루시아/베스도/아그립바에 의해 3번 무죄 선언) ; 여기서도 흡사 예수님처럼 되었다. ⑥ 스데반도 마찬가지이다. (장로, 대제사장, 율법학자들 앞에서 심문받음, 거짓 증인들의 등장, 운명시에 영혼을 맡기는 기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_행7:59, 자신을 처형하는 자들,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한 기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_행7:60)
누가가 전하고 싶은 깊은 이야기의 골자는 무엇일까? 첫 번째, 부활 이전이나 이후라도 예수님은 함께 하신다. 두 번째, 예수님의 사역과 능력이 성도들을 비롯한 사도들의 사역과 능력을 통해서 그대로 재현되고 일어난다. 곧 성도들과 사도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32절, 첫 구절을 보자.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 부분에 해당하는 누가복음의 본문이 있다.
누가복음 12:13이하에 보면, 형제가 유산 문제로 분쟁을 겪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한 가족이요 형제임에도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재물을 나누게 해달라고 한다. 주님은 이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을 주시고자,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이런 내용이다.
한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여, 작은 곳간을 헐고 새 곳간을 크게 지었다. 그리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두고, 자만에 빠져다. 스스로에게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흡족해한다. 주님은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하겠느냐는 것이다. 주님은 그러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말씀하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어쩌면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 속이고 감추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유가 아니다. 예수님 비유의 의미를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것이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재산다툼을 하는 형제는 아무리 많이 그 몫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는 부요할 수 없다. 탐욕이나 욕심의 속성이 그렇다. 그렇다면 진정한 부요함이란 무엇인가? 나를 부요케 하고 우리를 부요케 하며, 진정으로 부요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달리 생각해보면 누가는 그 공동체와 교회를 통해서 참된 부요함을 경험했다는 말일 것이다. 어떤 물질적인 필요를 충분히 채워서가 아니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그런데 행간의 감춰진 이야기를 좀 더 찾아보겠다. 32절은 33-37까지의 말씀을 한 절로 요약해주는 것이다. 새롭게 던져볼 물음이 있는데, 이것이다. 32절로 요약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냥 이렇게 됐겠는가? 의무, 순종, 충성으로 이렇게 됐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행간에는 성령이 주신 영혼사랑의 진정한 마음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감춰져 있다.
33절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큰 은혜를 받아”
여러분 어떤 게 ‘큰 은혜와 감동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마음이 흡족했다는 말일까? 위로와 힘이 됐다는 말인가? 성공, 출세, 기복의 욕망에 불이 붙었기 때문일까? 여러분이 큰 은혜를 받을 때는 언제인가? 그런데 성경이 증언하는 놓칠 수 없는 은혜가 있다.
행3:11-26을 보면, 부활을 증거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자세히 볼 수 있다. v.15 “생명의 주를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v.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하나의 핵심은 v.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를 죽였지만, – 그는 생명의 주요 그리스도였다. –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파생되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될까? 예수님의 보복일까? 아니다. 이것부터 큰 은혜가 된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를 없이 하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한 우리가 복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을 증거로 나타난 은혜이다. 즉 구원의 확신과 감격과 기쁨과 믿음.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인가?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여전히 ‘나는 저주 받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불안을 가지고 있다면, 아직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저주와 사망과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부활영광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집과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온 것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복 받기 위해서인가? 당연히 아니다. 아니면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보답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 행간에서 더 큰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바로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이다.
이단을 비롯해 잘못된 신앙과 믿음은 굉장히 이기적이고 기복적이다. 자기를 위해 남을 미혹하거나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불쌍하다. 왜냐하면 참 구원에 대한 믿음과 감격과는 거리가 멀 때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과 감격은, 복된 소식을 전하하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놀라우신 경륜과 사랑, 그리고 섭리에 놀라운 신비를 깨닫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들 앞에 자기 소유를 가지고 와서 내려놓은 것은, 교주에게 바치는 것도 아니고, 저주가 두려워서도 아니다. 기복적인 믿음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이루며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제사업을 행했다. 5장에는 표적도 행한다. 병자가 낫고 정신병자가 온전해진다. 그 교회를 통해 다시 복음이 증거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 목적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구원의 소식이 선포되고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교회의 청사진은 무엇일까?
제가 이 번 주에 주목한 그림이 있다. 바로 이 그림이다.
이번 주에도 몇몇 성도들과 또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바라는 몇몇 지인을 위해, 이 그림처럼 애타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서 건지시는 주님께, 소망을 두고 낙심하지 않고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시는가? 주님께서 이런 심정으로 여러분을 건지시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교회가 이런 열정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혼구원과 부활신앙의 증거 말이다.
톨스토이의 작품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바 있다. 엣살핫돈의 이야기이다. 그는 라이리에 왕을 사로잡았다. 적의 왕이니 어떻게 효과적으로 처형할까 생각 중이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상한 경험을 하게 했다. 자기가 하는 일을 고스란히 자기가 당하는 것이다. 자기가 당나귀가 되어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데, 화살이 날라 와 자기에게 꽂혔다. 새끼들을 빨리 떼어내고 달아나게 했다. 그런데, 자기가 보는 앞에서 새끼들이 차례로 화살에 맞았다. 화살촉이 목을 뚫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슬퍼하며 몸부림치는데 꿈이었다.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해보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처참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타자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평화를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그리고 구원하고자 하는 긍휼의 마음이 생긴다.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것을 아셨고, 죄로 인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아셨다. 우리의 절망을 아셨고, 멸망을 아셨다. 우리의 저주와 그 운명을 아셨고, ‘오호라, 곤고한 자라, 누가 사망에서 건져내랴?’ 우리가 스스로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아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했던 것이다.
세월호의 희생자도, 그 유족도 다 우리이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절망 가운데 울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생각해보라. 우리이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길 원하는가? 윤리도덕이 아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구원코자 용서하시고 시랑하는 마음 말이다.
우리 교회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대사관 같은 영혼 구원의 열정을 가진 교회였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