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19. / 부활절 3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들녘의 푸른빛이 생기를 자랑하며,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때에,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저희 심령 속에 가득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환영합니다. 부활절 세 번째 주일에, 주님 앞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제 벚꽃이 다 떨어졌습니다. 엊그제 산수유가 봄을 알리는 것 같더니, 또 어제는 벚꽃이 만발한 것 같더니, 오늘은 꽃 진 자리만 남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은 철따라 이처럼 아름다운데, 세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 개인과 사회는 ‘꽃을 피울 수는 있는 것인가?’,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막연히 꽃이 피고, 피어날 것이라고 우리 인생을 말한다면, 어쩌면 미화시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헛된 희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아름다운 세계를 봅니다. 미화해서가 아닙니다. 현실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굳게 서는 것, 그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사회나 삶이 아무리 절망이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희망을 품고 인내하는 것,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꽃이 지고, 그 진자리를 푸른 나뭇잎들이 메우고 있습니다.
꽃은 지고, 인간의 희망과 소망이면 지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희망의 꽃, 소망의 꽃을 틔워본 사람은, 꽃이 진 것 같지만, 그 자리를 푸른 나뭇잎이 메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약속 있는 믿음 때문입니다.
부활절 3째 주일에 왜 오늘의 이 말씀을 주실까요? 오늘의 시편은 비탄함과 비통함으로부터 벗어나는 확신이 고백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경험임이 분명합니다.
(1)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 (4:1-3)
간구: 곤란 중에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
응답: 내가 그를 부를 때에 들으시리로다.(3)
(2) 주님에 대한 신뢰 (4:4-5)
권면: 범죄하지 말고 잠잠할지어다
권면: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3) 신뢰와 확신의 기도 (4:6-7)
신뢰: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주의 얼굴을 들어 비추소서.
확신: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것들이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4) 평안한 안식(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때문입니다.)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1절. 같이 읽겠습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구체적인 고난의 실체를 알 수 있는 특별한 소재가 없습니다. 사울 때문이라든지, 아들 압살롬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이간질 하는 자나 부하들 간의 알력다툼이라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왜 없을까요? 일반화 시켰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는 사람을 보면, 같은 말을 계속 되뇌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말합니다. 여기서 빨리 빠져나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보편화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어떤 한 가지 문제만이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누구나 어떤 문제로든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의연해질 수 있지요. 그래서 시인은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들아~” 무슨 의미입니까? ‘아이쿠, 인생들아!’ 우리가 이렇게 내뱉었을 때, 단순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어처구니 없지만 답답하고 한심한 인생의 모습을 한탄하는 것일 겁니다. “인생이란 무엇”이라는 나름의 통찰력! 그것을 얻기까지 그의 내면은 어땠을까요? 그것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그럽게 되었다’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고백 이면에는 이런 것이 있겠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개념 없는 멘탈을 말하는 것이 아닐테죠.
고난을 당하면서 잃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평안입니다. 마음의 평정이 깨지고, 불안이 찾아오고, 속상하고 화가 납니다. 자기를 괴롭히고 평안을 빼앗는 이들에 대한 원망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너그럽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평안, 평정심을 빼앗아간 이들, 그들은 어떤 이들입니까? 시인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힘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입니다. 그들은 헛된 것과 거짓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인생들아~’ 지금 그들은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다고 교만하고 자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릅니다. ‘인생의 어리석음’을 말입니다. 헛된 것과 거짓을 좋아함으로, 당장이야 이익이 되고 좋겠죠.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면 그에게도 닥칠 운명이 있습니다. 결국 그도 평안을 잃게 될 것입니다.
남의 평안을 빼앗음으로 자신의 평안을 일삼으려고 하는 자는, 결국 자신도 평안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어리석다는 것이죠. 이것을 생각하니 그가 너그럽게 되었습니다. 그가 너그럽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통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막연한 확신이나 개인적인 신념이 아닙니다.
3절을 보니까,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경건한 자’란 무엇일까요? 율법적인 흠없이 사는 사람입니까? 죄를 짓지 않고 존경받는 자입니까? 히브리어는 ‘하시드’입니다. 저랑 아모스 공부를 하면서 많이 들어보신 말과 음가가 비슷하죠? ‘헤세드’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그러니까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체험한 자”,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배운 자”라고 말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점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부어주십니다. ‘너희가 알지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랑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4절에서 5절로 이어지는 내용은 그래서 주님께 신뢰를 두라는 권면입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다윗을 괴롭히는 ‘인생들’일 수 있습니다. 혹은 ‘이편이냐, 저편이냐?’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당한 만큼 앙갚음 하려고 머릿속에 그 생각으로 꽉 찬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 vs 사람의 방법’, ‘악에 맞서는 악한 방법 vs 선한 방법’ 이런 갈등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다가도 회의적인 마음이 찾아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이런 회의적인 마음 때문에 괴롭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했는데, 정말 타당한 말씀인지, 하나님께서 정말 역사하시고 판단하실지 머리가 뒤죽박죽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폭력적인 힘과 눈에 보이지 않은 전능한 힘 사이에, 믿음을 굳건히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죠?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참는 것이 능사인가요?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쩔 도리가 없으니 참아야겠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멈추게 하셨던 분이 잠잠하시단 말입니까?! 악인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단 말입니까?
5절에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누구나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에 관한 수많은 축복의 메시지와 선한 메시지를 들었을 겁니다. 어려울 때 주님은 무엇을 하시는지, 어떻게 하시는지 들었습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3),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6)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삶의 문제, 고난, 어려움을 놓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원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특별한 해결책이나 별다른 이야기를 주지 못합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그가 제시하는 유일한 이 말은 어쩌면 식상하고 뻔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이 권면의 말을 조금 더 풀자면 이런 말이겠죠.
‘의의 제사’란 참된 회개와 신뢰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참된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인은 참된 회개와 신뢰로 하나님과 교제함을 통해, 참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반석 위에 선 경험을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고난의 구체적인 문제를 일반화시킨 이유는, 이런 것이겠죠.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내면에서부터 우리를 흔드는 의심의 소리를 극복해야 합니다. 시인은 곤란 중에 너그럽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너그럽게 하신 것’자체가 승리이고 응답이고 확신입니다. 그때 더 큰 믿음과 소망으로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4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마5:6)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 박해 받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더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시편 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아하. 곤란 중에 시인은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1) 처음에는 평강을 빼앗겼으나, 정작 평강을 빼앗기게 될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2) 인간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밤잠을 못자고 앙갚음을 할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주님은 그 얼굴을 비춰주셨습니다.
3) 손해를 봤을 때, 잃은 것이 많다고 생각 될 때, 그래서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것을 만회할 때의 기쁨과는 전혀 비교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한 기쁨이었습니다.
4) 그 기쁨을 알고 나니 그는 참 평강의 일체 비결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저는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이 믿음을 갖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 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시므이가 나와서 모욕감을 안겨주고, 저주를 쏟아 붓고,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아비새가 그를 당장 없애겠다고 하자, 다윗이 말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창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부모의 마음도 그 마음입니다.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아십니까? 때로 자연은 무정한 듯 흘러갑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도망을 가다가, 아직 강을 건너지도 못했는데, 피곤에 지쳤습니다. 날이 저물었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한 수’를 가졌다고 하는 모략꾼 아히도벨은 지금 당장 추격하자고 합니다. 그러면 끝이죠?! 그런데 후새가 침착하고 신중하자는 말 한 마디로,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산시켰습니다. 놀랍습니다. 이 한 마디에, 아히도벨의 모략이 무산되다니 말입니다. 그 밤에 즉각 추격당했더라면 어땠을까요? 후새가 그렇게 시간을 지연시키는 동안, 다윗의 일행은, 곧 힘을 되찾고, 서둘러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힘을 자랑하는 자의 악행을 꺾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갈등합니다. 그러나 작은 틈새에도 악행하는 자의 힘은 꺾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은 자 가운데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부활의 믿음을 얻어 참 평안의 확신을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모습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어느 무명 시인의 시입니다.
삶들이 온다 / 도화지 위에 머물렀던 시간위에 문 밖의 삶들이 쏟아진다
말문이 막히듯 / 연필이 멈췄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과 삶 / 무게를 휘청 두 팔로 받아든다
단번에 팔뚝 / 위에 삶의 무게가 들어차고 가슴 안에 / 사랑이 힘줄처럼 생긴다 다행이다 /
눈물에도 이제는 근육이 생겨 / 잘 버텨주는 나이가 된 것이
삶들이 온다. 쏟아진다. 말문이 막힙니다. 선택하지 않았던 길과 삶이 그 속에 있습니다.
연필이 멈췄다는 것은 자신의 스토리에서 차마 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연 때문이겠죠.
그런데 눈물에도 이제 근육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삶의 무게가 가슴 안에 들어차고, 그 근육이 생기게 한 힘이 있는데,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 힘줄처럼 생긴다 다행이다.’
사랑의 힘줄, 그 무엇도 끊은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힘줄로 세상에 나가 평안을 붙들어 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