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5. / 부활주일, 선교주일)
부활절 아침 제자들이 겪었던 체험은 어떤 말로도 표현되지 않는다. 충격과 놀람 그 자체였다. 돌문이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다. 천사의 메시지는 엄청난 것이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24:5-6)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에서, 제자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어느 집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했던 어두웠던 눈이 열렸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던 귀가, ‘마리아야!’ 호명하는 소리에 열리자, 예수를 알아봤다.
갈릴리로 먼저 가셔서, 거기서 뵈오리라는 천사의 말처럼, 예수님은 갈릴리의 일상 가운데 나타나셨다.
부활의 체험은 단순히 신비만이 아니었다. 제자들에게,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는 모든 자에게 선물이었다. 무슨 선물이었는가?
바로 그것이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던 눈과 귀가 열렸다.
아시는가? 새로 봄과 새로 들음은 복음의 새 능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이 새로 봄이며, 새로 들음이다. 고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꽃필 것을 보게 된다는 것, 그것은 부활이 주는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할 수 있다. 바울은 그것을 보고 따르던 자이고, 다소 거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자기 자랑에 근거한 것이라면 교만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지 않다. 바로 부활의 영광과 능력에 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요, 바울을 따랐던 디모데에게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부활절을 맞는 우리에게 ‘새로 봄과 들음’의 선물이 임하길 원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로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 그는 이념적인 문제로 1849년 상트 뻬쩨르부르크 광장에서 사형집행이 예정돼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유언을 남기라고 했는데, 고개를 들자 십자가 첨탑을 바라보였다. 십자가에 비친 강렬한 햇빛이 그의 눈을 부시게 했다. 순간적으로 눈과 머리가 마비됐다. 무슨 유언을 남길지! 그 찰나였다. 전령이 형 집행을 멈추라는 황제의 영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날 동생 미하일에게 편지를 썼다.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얼마나 하찮은 일들에 시간을 낭비했는지, 쓸데없는 것들과 실수와 게으름과 무능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는지, 삶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는지, 내 마음과 영혼에 거슬리는 죄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를 깨닫는 순간 내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사유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내 마음에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삶은 선물이다. 삶은 매 순간이 행복이며, 또한 영원히 행복이 될 수 있다. Si la jeunesse savait (이 사실을 젊어서 알 수만 있다면).” Long Journey Home (p. 81) by Os Guinness / Trans by M. Lee
도스토예프스키 그는 새 눈을 떴다. 그 후에 그는 명작을 썼다. 이게 삶을 축복으로 만드는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기독교에서 부활절은 승리의 기쁨이 가장 큰 날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작년 고난주간에 우리는 팽목항에서 들려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이들의 절규와 죽음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부활절에는 혹 에어포켓에 있던 아이들이 단 한명이라도 살아오기를, 그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굳이 드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의 새소망을 누려야 하는데, 우리가 맞는 다른 현실들도 그렇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저는 저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다음의, 두 장의 사진을 담아두고 때때로 열어보곤 했다.
바로 이 사진이다. 이 땅의 라헬들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목회를 하면서 주님의 눈물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또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긍휼이 이와 같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남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예레미야는 목에 나무멍에를 메고 있었다. 피켓을 목에 맨 퍼포먼스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냐가 나타나더니 부서뜨렸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자청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그를 거짓 선지자, 어용선지자일 뿐으로 보고 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종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2천년이 넘도록 잊지 말자고 하면서 고작 1년 전의 일은 잊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으며 불온한 세력인 것처럼 오도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우는 자들고 함께 울라고 바울을 통해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냐가 나무로 된 멍에를 꺾었지만, 그 대가로 앞으로는 더 강하고 꺾을 수 없는 쇠멍에를 맬 것이라고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오히려 더 강한 쇠멍에를 메고 오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원외교의 손실액이 앞으로의 손실액까지 합치면 66조 정도 될 것이라는 감사원의 발표가 있었다. 회수율이 110%나 된다고 스스로 자평했는데, 그 말과는 너무나 달랐다. 4대강 사업비가 22조이고, 그것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66조면 어마어마하다. 무상급식, 유상급식의 논쟁으로 분열된 사회를 보며, 그 사이에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염려가 되기도 한다. 전세난으로 서민들의 고충이 가중되고, 엇그제는 영등포에 월세를 살던 세입자가 다섯 달째 월세를 밀리자, 집주인과 실랑이 끝에 방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그 행위야 정당화 될 수 없지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던 현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와중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64만원이 넘는 명품 책가방을 매고 등교한다고 한다. 다른 나라 이야기 같다. 사드 미사일 배치며, 차세대 전투기 사업으로 18조 예산이 들어갈 것이라는데, 또 다른 예산낭비는 아닐지, 결국 국민의 처참한 고통은 가중될텐데, 걱정이다. 이런 현실들을 마주하자니, 더 큰 쇠멍에를 짊어지게 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멍에를 쉽게 깨뜨리고 하나님의 뜻과 공의를 우롱했던 참담한 과를 맞는 것 같아서 말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시간은 멈춰있다. 이 시대는 쇠멍에를 지고 있다. 이것이 부활절을 맞는 우리의 현실이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 해보자. 우리는 소망으로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는가? 억지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활절 아침에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정말 부활이라고 하는 이 놀랍고 경이로운 사건을 진지하게 대하기 위함이다.
기쁨으로 부활절을 맞이할 수 없는, 어렵고 난해한 현실. 이것이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답답한 마음에 오늘의 말씀을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기쁨으로 부활을 맞이할 수 없는 현실 속에 찾아오셨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와 역사가 나타났다. 왜 인지 그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5절을 보라.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다. 그 대답은 ‘없나이다.’였다. 이 한 마디가 오늘 우리의 현실이자, 자화상이라 말할 수 있겠다.
때와 장소를 보라. 1절에 디베랴 호수, 2절에 갈릴리 가나. 황제의 이름을 딴 신도시와 생업을 이어오며 전통적인 방식을 지켜온 옛마을. 이 두 공간이 교차하고 있지만,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이전에 여러 차례 말했다. 여기서 다시 말할 시간이 없다. 다만 평화롭고 소박한 유대 땅, 갈릴리는 로마의 신질서체제로 바뀌어갔다. 겉은 실속있고 화려하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공동체의 붕괴 위기가 점차 커져갔다. ‘Pax Romana’(로마의 평화) 이면에,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눅23:28)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괴리된 현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없나이다.’ 오늘 부활절을 맞은 우리의 현실과 같다고 생각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주님의 동일한 물음 앞에 ‘없나이다.’라는 말밖에 드릴 대답이 없어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능력 밖의 현실,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 실망과 어려움이 가득한 현실, 답답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라. 부활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상황에도 주님은 찾아오셨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돌아온 곳은 갈릴리였다. 갈릴리는 그들의 생의 터전이요, 평범한 일상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던 곳이다. 3절은 그 평범한 일상이 어떤 것이었는 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뀐 게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게 그대로였다.
자주 빈 그물을 걷어 올리고, 뭔가 뚜렷한 결실이 없는 것은 여전했다.
소득은 없는데 과한 세금이 부과되는 민생들의 부조리한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주님께서 ‘고기가 있느냐?’ 물으실 때, ‘없나이다.’
아시는가? 낯설지도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이 그곳에 찾아오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줄로 깨닫길 바란다. 그런데 4절을 보라.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 아직 그들의 눈이 어둡다.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 함께 서계신 줄 믿고 눈을 뜨는 것이다. 눈을 떠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뭐 그저 그런, 우리 인생에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 길을 인도하시고 지도하신다.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 들어보라.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오른 편에 던지라’는 무슨 의미일까?
그전에 이것부터 생각해보자. 주님 말씀대로 했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 순종은 마침내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전에 생각해볼 것은 이것이다.
주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말씀하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무엇일까?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보라. 보니, 숯불이 피워있었다.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다. 주님은 애찬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 부르셨다. 그물을 내리는 동안, 애찬을 준비하고 계신 주님.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것이다. 이미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는데, 왜 주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을까?
여러분 주님의 식탁은 주님께서 준비하신 것도 있지만, 우리도 저마다 각자가 잡은 것을 기쁨으로 가져와 함께 어울어지는 것이다. 그게 교회이다. 오병이어로 수 천 명이 나눠먹었던 기적 같은 축제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에 또다시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교회는 파당짓고 갈등하고 싸우고 정죄하고 미워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가 돼서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헌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빛과 소금이다.
그렇다면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런 의미이다. 오른편이라는 그리스어는 ‘덱시오스’이다. 2차적인 의미가 있다. 행운이라는 뜻이다. 데코마이라는 말에서 유래 됐는데, 취하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복이 오는 쪽’을 선택하라는 말씀이다. 성도들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오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조리한 현실 속에 있지만, 이 시간 바라시는 것은, 복이 오는 곳을 선택하길 원하신다.
일류세프와 같은 정성으로 음식을 준비해놓고 ‘조반을 들자’시며, 방금 막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는 말씀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오른쪽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결실없던 이들이 ‘가지려 하는 것’은 세상이 바라는 복이다. 그러나 결실 없던 이들이 ‘나누게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이요, 은혜이다. 정말 행복한 쪽은 어느쪽일까?
12절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시대야 말로, 앞에서 제가 조금 어둡게 이야기 했으나, 이 시대야 말로, 하나님의 복이 오는 편을 택하여, 나눔과 참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153마리의 물고기를 끌어올리고,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53은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온전한 수를 의미한다. 계시록에서 14만 4천명이 숫자가 아니라 상징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그 물고기들이 세월호 희생자였으면, 단원고 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편향적이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던 주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절망도, 죽음도, 고통도 모두 이겨내고 승리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멈췄던 시간은 다시 흐르고, 새로 봄과 들음에 우리 삶의 의미가 달라지며, 식었떤 우리 가슴이 뜨거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