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15. / 주현절 마직막주, 변화주일)
4장의 요나의 모습에서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요나는 속상하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받게 된 것을 보면서, ‘내 그럴줄 알았다.’는 마음이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1절을 보면, 그 얼굴에 속마음이 다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뜻대로 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힘들다. 도무지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 뜻대로 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모르실까? 요나에게 물으신다. ‘네가 지금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지금 화가 난 것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 역시 하나님께 대해서 화가 나고 속상할 때가 있다. 내 뜻대로 해주지 않으실 때 말이다. 교회에서도 신앙생활 할 때도 마찬가지다. 속상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이다.
우리는 누군가 자기의 문제를 객관화 시켜서 말할 때, 더 속이 상하는 경우가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혹은 그 말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그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불손할 때도 그렇다. 그러나 자기를 무조건 이해해주면서 맞장구쳐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를 좋게 보고 옳게 본다. ‘자신만의 생각’에 매몰 되어 있는 것을, ‘꽁’하다고 한다. 우리의 정신이 더 커지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생각과 경험을 객관화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는 하나님 입장에서 그 뜻과 생각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요나를 더 화가 나게 만든 일이 있다. 6절 말씀에서 이어지는 부분이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한 요나의 수작을 보라. 하나님께 성내고 화를 낸 후, 어떻게 하시나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 뜻대로 해주시는 지, 안 해주시는 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하필 초막을 지은 곳이 성읍 동편이었는데,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 곳이었다. 시위를 제대로 하려면 이왕 편안한 곳, 안성맞춤이 곳에서 해야 했는데,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 어쩌면 먼저 지쳐서 포기하기 쉬운 곳이었다. 육신적인 고통은 의지를 꺾을 수 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그래서 마음이 지치고 꺾인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시고 금방 자라나게 하셨다. 요나를 가릴 수 있게 해주셨다. 그늘 아래 요나가 쉴 수 있었고, 뙤약볕 뜨거운 고통에서 괴로움을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변화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나님께서 역시 자기를 위하시는가 보다.’, ‘기도에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나보다.’하는 마음이 들었다. ‘역시 하나님은 내편이시라고 생각했다.’
요나는 마냥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험에 들었다(v.7). 다음날 보니까, 밤새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 먹었다. 게다가 해가 뜰 때, 동풍에서 뜨거운 바람까지 불어왔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다시 뙤약볕이 내리 쬐이고, 요나는 혼미해졌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자기 뜻대로 해주시는 것 같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완전 속았다.’ 놀리시는 것 같았다. ‘박넝쿨로 위로하지나 마실 것이지’, 하나님이 정말 원망스럽고,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떤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들고, 원망과 불평에 휩싸인다. 신앙이 약해진다. 아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안 믿어!’, ‘안 섬길거야.’, ‘교회도 안나갈거야!’ 이런 자세다.
주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신다.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화를 내는 것)은 옳으냐?’ 객관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꽁하고 있는 요나는 뭐라 생각할 것 같은가? 대답은 이것이었다. “내가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무조건 자기가 옳다. 누군가 생각을 바꿔주려는 설득은 듣고 싶지도 않다.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지경이다.
하나님의 질문을 가져와보자. 성을 내는 것이 옳을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객관적으로만 듣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입장에서 주관적인 것을 고려하면서 듣기도 한다. 그 입장을 헤아리면서 이해는 되지만, 요나는 단단히 삐쳤다.
신앙적인 답을 우리가 알고 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보다 더 깊고 높으시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요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삐치고 나면 답이 없다.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 문제를 어떻게 푸실까? 아니 풀리기를 바라실까?
먼저 요나의 결론을 먼저 생각해보자. 그 삐친 마음이 풀렸을까? ‘죽기까지 옳다.’고 성냈던 요나의 마음이 제대로 돌아왔을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들려주신다. 10절 11절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의 마음이 풀렸을까? 안 풀렸을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은 요나의 마음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의 수수께끼는 우리가 풀어야 하고 결론을 내야 한다. 어떤 결론을 쓰겠는가? 아마 동일한 상황에서 내마음의 결정과 결단, 작정이 그 답을 줄 것이다. 좋은 결말을 쓰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보다보면 요나가 성내고 화내는 마음만 있는 게 아니다. 속좁고 못난 모습도 있다. 역으로 생각해봤다. 만약 하나님께서 요나를 책망하시고 화를 내시면, 그것은 어떨까? 옳을까? 그를까? 하나님은 요나를 책망하실 점이 없으실까? 문제 삼아보면 얼마든지 문제삼을 수 있다. 보자.
첫 번째는 하나님을 협박하는 마음이다. 3절에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좋겠다.”고한다.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일까? 5절을 보면 요나가 성읍 동쪽에 초막을 하나 짓고, 이상한 심보로 앉아 있다. 뭘 기대하고, 뭘 원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상대로한 협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는 정말 죽으려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나는 정말 그럴 마음이 있는 게 아니다.
요나시리즈 설교의 핵심을 자신을 요나에게 비춰보는 것이다.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그러겠다고 하는 것이 요나의 마음이다. 요나는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나는 마음이 다르다.
어제 어떤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이다. 젊은 목사님들이 목회를 잘할 수 있도록 그간의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좋은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게, 그 분의 사명 중 하나다. 어느 권사님이 왜 목회를 그렇게 하시냐고 따져 물었다. 교회 일에만 신경을 쓰셔야지, 그건 목회가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부정하는 말을 해서 목사님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런데, ‘목회는 다양한 면이 있는 거죠!’하고 부드럽게 넘겼다. 이 분의 말에 토를 달면,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고 한다. ‘목사님은 소통이 안된다.’고 교인들에게 흉을 보고, 나중에는 ‘목사님은 독단적이다.’고 없는 말을 퍼트려서 힘들게 한다. 인격적으로 보나, 섬김으로 보나 전혀 그런 분이 아니고 덕망이 있다. 툭하면 다른 교회로 옮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고 한다. 다른 교회에 있다가 오신 분인데, 그 교회 목사님이 자기가 옳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받아주지도 않고, 나중에는 이런 말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다.’ 만날 옮긴다 옮긴다 했는데, 막상 이 말을 들으니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여전히 지나온 교회 목사님들 험담을 하는 분이다. 뭐하는 것인가? 정말 옮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냥하면 좋은데, 협박하는 것, 시위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어제 세미나와 훈련의 주제는 ‘목회자의 인격’이라는 것이었는데,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고.’ 그러면서 목회자는 속이 문드러져 죽지만, 그 죽는 것이 목회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안에서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는다. 성숙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느 종교와 달리 우리 신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를 닮는 것이다. 변화되고 거듭나는 것이다.
두 번째 요나의 문제는 신앙의 변덕스러움이다. 성읍 동편에 초막을 짓고, 하나님이 박넝쿨로 뙤약볕을 덮어주시자. 좋았다. 왜 아니겠는가? 그런데 밤새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어, 시들어 버리니,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또다시 요나는 하나님께 8절 하반절에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간신히 말한다. ‘요나가 혼미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표현 때문에 간신히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헐리우드 액션인지도 모른다. 9절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박넝쿨 사건으로 ‘성내는 것이 옳으냐’ 말씀하실 때,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아직 그에게 이렇게 대들만한 힘이 남아 있다.
조금 잘되면 마냥 좋았다가, 또 조금 안되면 마냥 무너지고 만다. 어제는 확신에 찼더니, 오늘은 실족해 있다. 어제는 열정이 계속될 것 같더니, 오늘은 식어버렸다. ‘이랬다저랬다’, ‘울그락 불그락’, ‘개었다, 맑았다’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조금 맘에 안들면 불순종했다가, 또 조금 잘해주면 좋다고 하는 모습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는 한결 같이 변함없기를 바라신다. 우리를 그와 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가치가 절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의 반석 위에 서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길 바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 보다 높으시고, 선하신 계획과 섭리를 가지고 계시다. 더 큰 복을 알고 계시다. 한 길이 막히면 더 좋은 아홉 길을 예비하고 계시다. 그것을 모르기에 변덕스러운 것 아닌가?
요나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모습에서도 결정적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는 것이다. 요나가 박넝쿨이 말라버린 것을 보면서 속상해한다. 원래 그것은 자기에게 없던 것이다. 그것이 벌레와 바람에 스러짐에 대해 속상해하는데, 하나님은 11절 말씀처럼,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의 멸망에 대해서 얼마나 가슴아파하고 걱정하시고 염려하시겠는가. 물을 것도 없겠지만, 다시 한 번 결단을 위해 물을 것이 있다. 하나님이 옳은가? 요나가 옳은가? 왜 요나는 자기가 올하독 생각하는가? 무정한 마음 때문이다. 신앙의 옳고 그름은 경험했는데, 구원에 대한 확신까지 얻었는데, 더 깊은 하나님의 마음에 닿는 데는 실패했다. 그 마음이 어딘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세계가 어느 하나 멸망치 않기를 바라시는 긍휼하신 마음, 자비하신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요한복음3장 16절-17절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들려주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잊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우리가 이해하길 바라신다. 어느 누구의 영혼도 무너지거나 쓰러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 사랑을 믿고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고 담대하길 바라신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하나님의 큰 사랑 안에 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며 구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인물이 있다. 바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한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내가 본래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함이었고, 율법 없는 자에게, 그는 본래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함이라.”(고전9:19-21)고 말한다. 약한 자를 위해서 약한 자가 된 것도 마찬가지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몰라, 마음이 무정해졌다. 내 일이 아니라고 해서 타자의 고통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한 무정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 요나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듣고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무정했던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깨닫고, 생각을 돌이켰을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려면 하나님의 그 크신 마음, 긍휼과 자비에 잇대기로 우리의 새로운 결단이 필요로 하다.
저는 요나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전도하라는 사명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니느웨에 전해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다시스로 가기 위해 욥바항에서 세상의 기회와 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니느웨에 가서도 억지로 인색함으로 하다가 멈춰버리지는 않았는가?
이 시간 다시 한 번 결단하자. 요나가 변화됐는지 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우리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