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8. / 주현절 후 5주)
남자분들 아내가 식사를 차릴 때, 어떤가?
① 밥상을 다 차려 놓고, 와서 먹기만 하면 될 때가 가장 좋다. 그런데 ② 차려놓지도 않고, 밥 다 됐으니 와서 앉으라고 부르면 어떤가? 밥이라도 푸고 수저라도 놓으면 되겠지만, 왠지 싫다. 밥차려 놓지도 않고, 다됐다고 자꾸 부르면, 남자들은 차라리 밖에서 먹고 들어오고 싶은 심정이다. ③ 어떤 사람은 밥 준비가 돼있어야 할 때, 안 돼 있으면 화가 나는 사람도 있다. 여자분들은 이점을 잘 헤아리시라.
여자분들, 남편이 모처럼 설거지를 해준다. 제일 좋을 때가 언제인가?
① 자원하는 마음으로, 뒤처리까지 확실하게,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군소리 없이’.
② 자원하는 마음으로, 군소리 없는 것까지는 좋은데, 뒤처리를 하지 않아서 결국은 아내가 다시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남편이 생색을 내면, 해놓고도 욕먹는다.
③ 이런 경우도 있다. 자청해서 해주는 것까지는 고맙고, 뒤처리도 깔끔하다. 그런데 말없이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그러면 안해주느니만 못하다.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거다. 뒤처리도 안했으면서 이러면 부부싸움일어난다.
남편분들은 이점을 잘 헤아려서 이왕이면 1번과 같이 할 수 있기를 바란다.
④ 마지못해 해주면서, 뒤처리가 엉망인데다가, 잔소리까지 하면 어떨까? 이런 사람이 오늘 성경에서 등장한다. 물론 요나다. 이 경우가 아니라면, 칭찬해주고, 고맙다고 말해주라.
위 두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다. 완전한 배려가 없을 때,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어느 목사님께서 잠을 청하기 위해 아내보다 먼저 침상에 누웠다. 어쩌다 방문을 닫지 않은 채 잠을 청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아내가 내는 소음이 들려왔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물소리, 수세미로 그릇을 훔치는 소리, 작은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 그릇 정리하는 소리. 어땠을까?!
시끄럽다는 생각보다는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아내의 동작을 하나하나 그려봤다. 참 고마운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고요한 시간, 일상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그 삶이 고마움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고 고백한다.
고마움을 알아줌만으로도 해주지 않고 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반대로 해놓고도 왜 욕먹는가? 혹 우리는 이 경우를 자청하며 살지는 않는가? 요나가 그런 사람이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재차 받고 니느웨로 갔다. 어떤 마음으로 갔을까? 바다에서 죽을 뻔했지만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났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인간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나의 고백의 마지막 부분이자 하이라이트는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ㅇ르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였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가! 이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이것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공통적인 마음이다.
요나도 동일하지 않았을까? 자, 요나는 어땠는지 살펴보자.
3장을 읽다보면 이상하다. 의구심이 든다. 요나의,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태도와 자세는 어떻다고 보시는가?
요나의 회개가 일시적이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된다.
어느 부분에서인가? 니느웨 성읍은 3일 동안 부지런히 다녀야 하는 직경을 가진 도시이다.
(정수복, ‘파리를 생각하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어땠는가? 하루 동안만 다니며 외쳤다.
물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몇 날 며칠 니느웨 큰 성읍을 다 돌면서 전하지 않아도 소문이야 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이 굳이 3일이나 걸리는 도시에 하루밖에 사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슬며시 암시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그는 하루 이상은 다녀야 했다. 3일 이상은 족히 걸린다. 서울시에서, 차도 없는데, 걸어서, 요나처럼 해본다고 생각해보라.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할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게, 하루 만에 가능할까? 몇 날 며칠을 혼신의 힘을 다해 전해도 깨우치게 하기 힘들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은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성경은 사흘거리의 성읍에서 하루 동안 말씀을 전한 요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굳이 비율로 말하자면, 1/3만큼만 일을 해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셨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마지못해 하는 요나의 모습을 말이다.
자 오늘 본문에서 요나의 모습과 영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1) 주님의 일은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해서는 안된다. 자원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요나의 문제는 억지로, 인색함으로 주의 일을 했다.
우리의 모습이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마지못해서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불평이 있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기쁨이 없고 은혜가 안되는 것은 아닌가?
주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바울을 통해 주님은 말씀하신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물론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을 모으는 데에 한 말씀이다. 그러나 주님의 일에 대한 모든 원리가 같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넉넉함으로 하는 것이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곡식가루와 기름을 인색한 마음이나 억지로 주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주었던 것일까? 자신이 가진, 전부였던, 두렙돈을 헌금한 과부가 억지로 인색함으로 주님께 드렸을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나온 아이의 섬김은 어땠을까?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삭개오는 어땠을까? 루디아, 아굴라와 부리스길라는?
다들 여건이 어렵고 힘들다고 이유를 댈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다. 인생길이나 마찬가지인 광야 위에 있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는가? 성막을 지을 때,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 물품이 넘치고 은혜가 넘쳤다. 더 이상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가지고 왔다.
주의 역사는 물질로, 기도로, 몸으로, 모든 섬김과 봉사와 수고의 방법으로 자원하는 마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감당할 때, 은혜가 크다.
바울이 각자 정한 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 전에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심는 것들이, 인내와 오래 참음, 연단이라는 시간을 거쳐 결실을 맺게 될 줄로 믿으라.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으니, 울면서도 씨를 뿌리라. 시편126:6 “반드시”(이게 중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말씀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5천 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다. 그 남은 몫은 누구의 것일까? 어린이에게 돌아갈 선물 아니겠는가? 응당 어린이의 몫이 돼야 하지 않을까? 저 같았으면 이 어린이에게 칭찬 선물로 줬을 것 같다.
가정, 직장, 교회에서, 어디에서건, 늘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할.
(저 개인적으로 여러분께 이런 감사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더 열심히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기를 빈다.)
(2) 두 번째 요나의 문제는 일시적인 회개였다. 회개를 하지만, 위기와 상황에서 벗어나면, 감사와 찬양을 잃어버리고, 하기는 하는데, 형식적이었다.
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어려울 때에는 주님께 목숨까지 감사하면서 서원하고 약속하지만, 위기가 끝나고 나면 또다시 원위치이다.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누가 사망에서 이 몸을 건져내랴?’ 바울의 이 탄식에는 일시적인 회개에 대한 자기 통찰이 깊에 박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지고, 회개도 일시적인 회개에 머물고 다시 불순종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쉽다. “몸이 약해서”(개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그래서 ‘믿음의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으나”, “그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빌2:6-8)
왜 예수를 바라봐야 하는가?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이 되셨다.
롬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9절 “한 사람이 순종 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있지만 주님을 바라볼 때, 순종의 모범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왕이 되신다. 그리고 영생에 이르도록 도우시고 능력이 되어주신다. 이것을 잊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라.
바울이 은혜와 의의 넘치게 받는 선물을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에 “그 앞에 있는 기쁨”(히12:2b)이 있다고 말씀한다. 지금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지만, 그 앞에 있는 기쁨과 하나님의 약속 있는 선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반드시,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믿기를 바라신다. 확신하길 원하신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일시적인 회개가 아니라 참된 순종과 믿음을 결단하라.
(3)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놀라움을 발견한다. 설령 요나가 억지로 인색함으로, 일시적인 회개 가운데, 그의 사역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큰 일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요나의 선포는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니느웨 왕에게까지 들렸다. 성경의 증거는 무엇인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 심지어 금식을 선포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학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나의 태도와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요나는 억지로 인색함으로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는 억지로 하거나 누가 시켜서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누가 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니느웨 왕에게까지 이 소식이 들렸고, 백성들의 기층에서부터 일어난 이 일이 왕을 움직였다. 왕은 보좌에서 내려와 왕복을 벗었다. 대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철저한 회개이다. 조서를 내려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무것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했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 8절 중반절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자”고 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지 누가 알겠느냐?”는 간절함과 진솔함은 10절 하반절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임할 것이라고 했던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고 증거한다.
요나와 비교되는 점은 무엇인가? 형식적이거나, 면피용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회개였다.
하나님의 가장 부드럽고 깊은 마음이 무엇인줄 아는가?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다. 진실함은, 그 간절함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게 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거나 서원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자기가 불행하게 될까봐, 자기 염려와 걱정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것은 저울질 하는 신앙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독생자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기까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가장 긍휼하시고 자비하신 그 부드러운 마음을 우리가 얻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오늘의 은혜는 무엇인가? 요나는 불만 붙였는데, 그것을 번지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도 은혜와 사랑, 구원의 불이 붙길 원한다.
억지로라도, 인색함으로라도 하라. 시작은 그렇게 하지만, 그 마음을 넘어 섰으면 좋겠다. 우리가 처음에는 그 마음으로 할지라도, 하다보면 은혜를 받게 되고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얻게 된다. 그 마음이 자원하는 마음과 헌신과 충성, 그리고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전도도, 선교도, 교육과 봉사도 말이다. 특히 전도에 열심을 내자.
시작은 우리가 하지만 그것을 이루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라.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했다. 저와 여러분 안에 그 주님이 계신가? 왕으로 마음에 자리하고 계신가? 주님께서 그 자리에 대신 하길 원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