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22. / 사순절 첫째주일)

 

오늘은 설을 지나고 첫 번째 맞는 주일이다. 교회력으로는 사순절 첫째주일이다. ‘첫 번째, 처음’이라는 것은 지향점을 재 조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저는 이 기간 우리 신앙공동체의 지향점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설에 ‘새해 복 많이 받기를 기원’하는 메시지가 문자나 카톡으로 오갔다.

양력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인사말을 나누면서도 좀 생뚱맞아하는 것 같다. 새해가 밝은지 벌써 몇 날이 지났는데, 새해 인사말인가, 하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약간은 억지스럽지만,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2015년이 진짜 실감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의미로서 ‘새해’라는 말이 와 닿는다고 말이다.

저는 탄천에 일어나고 있는 풍경을 보면서 ‘음력’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고 겨울이 남았는데, 새싹이 올라오고 있다. 입춘이 지났지만, 음력 정월 초하루는 봄의 기점을 알려주는 날처럼 여겨졌다. 자연은 올해도 새싹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내놓고 있다. 그래서 다른 말로 여러분에게 인사하고 싶다. ‘새 생명의 희망찬 복’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올 설에는 함께 떡국을 만들어 먹으며 아픔을 나누는 모습을 봤다. 그 빈자리가 떡국 한 그릇으로 채워질 수는 없겠지만, ‘함께’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연대의 힘과 그 능력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이겨내는 모습을 봤다.

70m 고공농성장에는 아내가 뽀얗게 끓인 떡국이 올라가는 모습도 봤다. 남편을 생각하며 그 떡국을 끓였을 아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아빠 설 전에 내려오면 안돼요?’라고 아이들이 썼다던 편지가 생각났다. ‘왜 내려오지 못한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성냥팔이 소녀’라는 동화가 다시 생각났다. 그 소녀의 죽음은 마지막 성냥을 켜고 성냥이 떨어져서 추위에 죽은 것이 아니다. 성냥을 많이 팔지 못한 가난한 영세업자여서가 아니다. 사태를 개인에게 돌리면,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무관심, 외면, 책임전가… 이런 것들이 마지막 성냥이 꺼지듯, 생명의 불꽃을 꺼뜨렸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어디여야 할까? 성공신화를 쓴 이들, 대박 터뜨린 어느 사업가 이야기?

 

몇 일 전, 손석희 앵커가 이들을 생각하며 시 한 편을 떠올리게 했다.

 

“밥상 한편에 식어가는 떡국 한 그릇, 어머니는 설날 아침 떡국을 뜨다 목이 메이신다.” (박남준 시인의 시 ‘떡국 한 그릇’)

 

올해도 고향을 찾지 못한, 형편 어려운 자식 생각하며, 함께하지 못해서 눈물 흘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표현 돼있다. 또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을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 하나님도 어쩌면, 설날 아침 떡국을 뜨다 목이 메이신 어머니처럼, 메인 목을 두드리시며 삼켜야만 하는 슬픔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못난 것 같으니라고 / 에미가 언제 돈보따리 싸들고 오길 바랬었나 /

일년에 몇 번 있는 것도 아니고 / 설날에 다들 모여 /

떡국이나 한 그릇 하자고 했더니 / 새끼들허고 떡국이나 해먹고 있는지 /

밥상 한편에 식어가는 떡국 한 그릇 / 어머니는 설날 아침 /

떡국을 뜨다 목이 메이신다 / 목이 메이신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매듭지었다. “한손 가득 선물이 없어도 두둑이 찔러 줄 세뱃돈이 없어도 가족끼리 둘러 앉아 따뜻한 떡국 한 그릇 나눠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설이 모두에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지금 하늘에 의탁한 고공 농성자들에게도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소원합니다.”

저는, 이 멘트 한 마디가 하박국을 통한 예언자의 기도처럼 들려왔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설이 지나자,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으면서, 서두를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설명절과 함께 시작한 사순절의 지향점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새 생명의 희망찬 복’이 단순히 감상적인 단어나 관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고통, 고난을 당하며 고생하는 많은 분들, 견디기 힘든 슬픔을 견뎌야 하는 분들, 세월호 유가족, 고공농성자, 실업난 속에 구직을 하고 있는 청년들, 비정규노동자들, 벼랑 끝에서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들, 사교육비로 고생하는 부모들, 어린이집 아이와 부모, 그리고 수고하는 교사들, 우리 사회의 일원들 모두에게 끝내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찬송이 부활절 아침에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 ‘떡국 한 그릇’ 편안히 나눌 수 있는,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처럼, 주님의 평화와 생명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원한다.

 

그러기에 저는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이것을 우리의 지향점으로 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그리고 희망이라는 주제로 순례 여행을 떠났으면 한다.

이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어떤 죄악이나 저주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운이 나쁘거나 재수가 없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의 이웃일 뿐이다. 아니, 이런 인식 자체가 무의미하다. 바로 우리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누구보다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소망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자고 말씀드리고 싶다. 기도야 말로, 이것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시작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 문을 닫고 / 은밀한 중에 계신 /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6a)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더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기도는 할 수 있다. 생각했던 인생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기도는 값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미래의 씨앗임만은 알아두라.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자 단순하고 분명한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일 먼저 기도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도하지 못해서 오히려 능히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다. 바울은 담임목회를 시작하는 디모데에게, 두려움과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제일 먼저 당부하는 말로,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왜일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얼마든지 의지가 꺾이고 마음이 녹아내릴 수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각대로 하다가 일을 그르치고, 캄캄한 상황에 처하거나 벽을 만나면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기도는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준다. 소망을 준다. 희망을 갖게 한다. 새 힘을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교통함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골방에 들어가라.’ 여기서, (이곳이)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곳이다. 문자적인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나와의 특별한 만남의 시간을 역설하는 것일 것이다. 외부적인 자극을 차단하고,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잠시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음의 고요를 경험한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의심을 극복하고 믿음이 생긴다. 평온이 찾아든다. 누구나 의심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인간적인 생각이 든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의심이 극복된다.

 

의심을 차단하고 막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라.

문을 닫고 폐쇄적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 보다 더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차단하라는 말일 것이다. 내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세상방법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좌절을 맛본다. 단 하나의 남은 방법이 수포로 돌아갈 때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상하게, 세상의 기회와 그 문은 닫혔지만, 아홉 길을 내신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게 하신다. 믿음의 눈을 뜨면 말이다.

‘문을 닫고’ 이 단어는 ‘클레이오’라는 단어인데, 신앙적으로만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다. 요한20:19에 이 단어가 쓰이고 있다. 누가 닫힌 문을 통과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 그런데 우리 주님만은 이 문을 통과하신다. 유대인이 두려워 문을 닫았더니예수님께서 오사’. ‘닫혔는데, 어떻게 들어오셨는가?’ 이게 신비이다. 문을 닫았더니 예수님께서 오셨다. 골방에 들어가 주님만 들어오실 수 있는, 그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다른 문들을 닫아야 한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역사하신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b)

 

은밀한 중에 비밀스러운 속닥거림은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그런 은밀함이 아니다. 남에게 자신의 전화통화 내용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다른 데서 받는, 그런 은밀함도 아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어느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들이 다섯 명이었다. 그 중 유독하게 병약하고 주눅 들어 있는 아들이 있었다. 그 모습에, 아버지는 늘 가슴이 아팠다.

어느 날, 다섯 그루의 묘목을 사왔다. 아들들에게 한 그루씩을 나누어 주면서 1년 동안 애써 가꾸게 했다. 나무를 가장 잘 키운 아들에게는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한 1년이 지났다. 놀랍게도 유독 한 그루 나무가 잎도 무성하고, 키도 크고, 엄청 잘 자라고 있었다. 바로 그 아들의 나무였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아버지는 그를 큰 소리로 칭찬하고 격려해주었다.

그는 그날 밤 아버지의 지지와 성취감에 고조되어 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새벽녘에 숲으로 달려갔다. 어스름한 안개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보였다. 아버지였다. 물조리개를 들고 자신의 묘목을 가꾸고 있었다. 그는 후에 미국 국민들의 가장 많은 신뢰와 지지를 얻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그 명성을 세상에 떨쳤다. 그 주인공이 바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밴드에서 인용)

 

차별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안타까워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갚으시리라.’ 주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성경에서 ‘이런 절묘함이 없다’ 싶은 장면이 떠올랐다. 우연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시는 내용이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난을 맞았다. 그 때문에 몸을 피하게 됐다. 감람산길로 도망을 가면서 맨발차림이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그 산을 올라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그가 하나님께 울면서 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다윗에게 두려운 인물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이 인물은 마음이 편칠 않았다. 어쩌면 압살롬 보다, 이 사람이 더 두려운 인물이었다.

“아히도벨” 그는 누구인가? 삼하16:23에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내놓은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도 같은 것이라.” 그마 만큼 도가 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짜낸, 계략을 알려준 것 같이, 그의 지략을 넘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작은 손짓 하나에도 다 이유가 있을 정도로 치밀하고, ‘위험한 칼’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압살롬과 함께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캄캄해졌다. ‘큰일이구나’, ‘끝장나겠구나’ 이게 지금 그의 상태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없다. 기도밖에 없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삼하15:31)

 

객관적으로 보면 그럴리는 없다. 아히도벨이 다음으로 내놓은 작전을 보라. ‘다윗왕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바로 뒤좇는다면 일망타진 할 수 있다.’고 다음의 군사작전을 말한다.

 

실재로 다윗 곁에는 이 난국을 헤쳐 나가게 해줄 사람이 없었다. 호위 요원들만으로는 압살롬의 군대를 당해낼 수 없다. 절친이었던 후새가 다윗의 소식을 듣고, 중간에서 다윗을 만났다. 그러나 다윗은 처지가 처지인지라, 그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챙길 수 없었다. 압살롬이 이 상태로 추격해오면 모든 것이 끝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시고 도우실까? 위기 앞에선 다윗 역시 답답하고, 괴롭고,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누가? 어떻게?

 

우연 중에서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그 기도 뒤에, 후새를 만나게 하신 게,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다. 누가 그럴 줄 알았겠는가? 후새를 데려갈 수 없으니, 성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서 압살롬에게 전향한 것으로 위장하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꺾었던 인물이 바로 후새이다. 결국 아히도벨은 자결하고 만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후새를 만나게 하셨고,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기 위해서 압살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안하신 것 같아도, 역사의 배후에서 섭리하고 인도하셨다.

 

여러분 지레 겁먹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를 도우신다.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방법을 알 수 없지만, 후새 같은 사람을 예비하심으로 주님은 이미 역사하고 계시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고통받고 위기에 처해, 힘겨워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크시다. 주님께서 도우시기에 희망을 놓지 말라.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관심 속으로 들어가,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 사순절 기간에 더욱 기도생활에 매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결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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