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1. / 주현절 후 4번째 주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다시스로 향했다. 그는 불순종했다. 그러나 스스로 이유가 있고,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보기에도, 얼핏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 하나님의 명령은 ‘앗수르를 위한 것이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거부했다.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따르지 않겠다고 결론짓고, 향한 곳이 바로 다시스다. 다시스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듣지 않고 향하는 불신앙의 세계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역시 그 다시스로 향하고 있는 사람은 아닌가?

 

지난주에 ‘요나가 문제입니다.’ 연속설교 1탄 “요나가 잠든 진짜 이유”에 대한 말씀을 드렸다.

 

그 배에 풍랑이 일었다. 하나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재앙이나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시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요나는 바다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거기에는 고의성이 깊었다고 말씀드렸다. 이 풍랑은 자기와 상관이 없다는 식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깨우셨다. 선장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에게 바로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풍파를 만난다. 이유가 있는 풍파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풍랑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랑 이 풍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왜 풍랑이 나와 상관이 없는가? 내가 이유는 아니라고(나 때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와 상관이 있는 이유는, 그 풍랑 때문에 자신의 목숨과 삶이 위기에 처했다고 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 풍랑을 통해서, 깊이 잠든 우리의 심령이 깨어나기를 바라신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요나가 문제입니다.’ 2탄, “바다에 던지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 큰 풍랑을 만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요나가 뽑혔다. 우연 같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요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명령을 듣지 않고 다시스로 향하고 있는,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자고 있을 땐, 이것을 몰랐습니다. 풍랑은 큰 위협을 알리는 하나님의 신호였다.

단순히 배에 승선한 이들에 대한 지엽적인 것만이 아니다. 더 크게 보면, 요나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생명과 삶이 위태롭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다시스’가 아니라 ‘니느웨’로 가야하는 하나님의 이유와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선원들이 바다 속으로 요나를 던졌다.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던지신 것이다.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바닷배 속에서’와 ‘물고기 뱃속에서’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그러기 위해서 이런 물음을 가져보자.

① 요나 2장의 주제가 무엇일까? 구원을 위해 주님께 드린 요나의 간구? 구원에 대한 감사와 확신? 어느 것에 속할까?

② 그렇다면 물고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은혜를 받는 과정의 고통? 고통으로부터의 구원과 은혜?

③ 요나 1장~2장은 7가지의 기적이 기록되고 있다. 1) 풍랑을 일으키심, 2) 제비가 요나에게 뽑히게 하심, 3) 바다를 잔잔케 하심, 4)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심, 5)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안전하게 하심, 6)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마른 땅에 토하게 하심. 그렇다면 그 7번째 기적은 무엇일까?

 

 

오늘 말씀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내용을 조금 더 관찰하며 살펴보자. 근본적인 두 가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이다.

첫 번째 그는 죽음에 대한 경험을 했다.

3절의 고백을 살펴보자.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어떤 경험을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죽음,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근본적인 경험이 되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5) 좌절, 절망. 인생에서 만났던 캄캄한 순간을 떠올려보라. 이제 죽음이 완전히 그를 둘러 더 이상 도와줄 손이나 손 쓸 방도가 없다.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악재를 만났다. 그 머리채를 붙잡아 잡아끄는 곳이 있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니”(6a)

무엇에 대한 묘사인가? 바닷속 무덤에 대한 묘사이다.

 

그는 바다뱃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 때, 죽음을 몰랐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서 깨어있을 때, 죽음을 알았다. 니느웨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재앙과 악재 속에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될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심지어 원수일지라도, 그 고통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타자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다른 생명인가? 기억하라. 그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데서부터 평화는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요즘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을 보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절박함과 고통을 깨닫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화가 벌어진다. 남의 입장만 잘 헤아려도 이 세상은 훨씬 평화롭고 살기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험을 통해 그가 깨닫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있다. 단순히 묘사와 푸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다에 던져지고 지중해의 조류가 그를 삼켜버렸다. 그러자 바다는 잔잔해졌고, 동시에 알게 된 것이 있다. 물결과 파도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를 죽음으로 삼키고 있는 그것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죽음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주관해서 우리를 사망과 죽음에 빠뜨리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건져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 없는 우연’ 생각해보라. 이것은 정말 대책과 소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 없는 우연’이 아니라, ‘우연 같은 하나님의 필연’을 발견한 것이다. 바다뱃속에서 잠자고 있을 때는 진짜 하나님을 몰랐다. 그러나 물고기뱃속에서 진짜 하나님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나 위기와 환난을 만나면, 재수나 운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인 것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스로 향하는 배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던 그는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물고기뱃속에서 하나님의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역시 세상의 고통을 하나님 없는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필연이라 생각하며 오히려 소망을 갖길 바란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버림받음’에 대한 고통이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4a) 그는 선원들의 손에 의해 바다에 던져짐에 대한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원적인 버림받음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음에 대한 것이다. 2절의 ‘스올의 뱃속’ ‘스올’은 구덩이, 무덤, 음부의 세계를 뜻하는 말인데, 절망과 고통, 어둠, 사망으로 인식되는 말이다.

 

사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버림받음’이다. 사람들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외면한다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나를 외면하시고 싫어하신다고 생각해보라. 그 저주 때문에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모 항공사 사무장이 이 고통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을 보면서, 이 고통이 얼마나 심한 고통인지 알 수 있다.

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 죽음을 선택할 정도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놓고도 버림받은 경험 때문에 죽기도 한다. 그러나 죽었지만, 버림받지 않고 누군가에게 받아졌다는 경험 때문에 일어설 수 있고, 살아나기도 한다.

 

우리는 최근에 세상에서 매장당하는 일이 얼마나 비극적인 지를 보고 있다. 이 사회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언론을 통해 매장시키는 고도의 치졸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는 세상의 악마성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를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욕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품어주는 교회가 됐으면 좋겠다. 설 땅을 잃은 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죽고, 어느 누구하나 예외없이 사랑하고 존중받는 교회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바다뱃속의 요나는 자기가 버림받음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물고기뱃속에서 요나는 바로 자신도 그럴 수 있고, 또 그렇게 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는 죽음과 버림받음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체험을 했다. 세 번째의 체험이다. 무엇인가?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한 구원에 대한 체험이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6b)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체험했다. 시편의 다윗도 고백한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2) 기가 막히다 말할 만큼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서 나올 길이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또한 놀랍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를 끌어올리셨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주님의 은총이다.

 

4절,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7절,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어떤 주석가는 4절의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는 것이고 7절의 성전은 하늘 성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2절에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이 말씀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으시는데, 4절의 “내가 말하기를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하였나이다.” 요나의 회개와 결단을 통한 간구였다. 그 음성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그것이 바로 7절과 연결되는 것이다.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즉 요나는 이미 하나님의 응답과 확신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회개와 새로워진 믿음으로 하나님을 다시 만났다.

바다뱃속에서 잠자고 있을 때, 그는 회개와 용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물고기뱃속에서 그가 깨어있을 때, 회개와 용서의 은총이 바로 요나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응답받았고 확신에 이르렀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확신이 있길 바란다. 이 믿음과 구원의 새로운 감격이 있길 바란다. 주님께서 지금, 이것을, 우리가, 깨닫길, 바라신다.

 

8절-9절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8절,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 누구인가? 요나는 빼고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요나였다. 바다뱃속에서 잠을 자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저와 여러분도 이와 같다는 것을 잊지 말라.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바다뱃속은 세상이다. 물고기뱃속은 주님의 은혜와 접하는 곳이다.

① 구원을 위해 주님께 드린 요나의 간구? 구원에 대한 감사와 확신? 어느 것에 속할까? 오늘 말씀은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가 어려운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며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주님의 도움을 위해 기도한다. 그런데 ‘이것’ 하나가 전제 되었다면, 확신을 가지라. 분명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도우신다. 이제 하나님께 그 확신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이것이 무엇인가? 회개이다. 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② 물고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은혜를 받는 과정의 고통? 고통으로부터의 구원과 은혜? 물고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유치한 것이다. 상징적인 것이다. 바닷 속은 죽음의 장소였고, 버림의 장소였으며, 무덤이었다. 1장 17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주님은 물고기를 통해서 그를 보호하시고 목숨을 지키시며 돌보셨다. 마치 노아 홍수 때의 방주처럼 말이다. 급한 바람이 지나갈 때 바위틈에 숨었다가, 하나님의 등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손으로 그 틈을 덮으신 은총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날개로 품으시고 생명싸개로 감싸시고, 우리를 구원의 손으로 감싸신다. ‘이것’이 전제된 이에게 말이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③ 요나 1장~2장은 7가지의 기적이 기록되고 있다. 1) 풍랑을 일으키심 ~ 6)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마른 땅에 토하게 하심. 그렇다면 그 7번째 기적은 무엇일까? 불순종하던 요나였다. 자신의 의와 고집이 강하던 요나였다. 그렇기에 변할 수 없었던 요나였다. 그런데 그가 변했다. 그가 순종의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구원의 섭리를 알게 되었다. 이것이 기적이다.

 

어제 한 친구를 만났다. 학원을 운영하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현실주의자이기에 학생에게, 그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어디인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전략을 갖도록 해준다고 했다.

‘목사는 어떻게 할까?’ 제가 물었다. ‘기도하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해주어야 할까?’

저는 희망주의자라고 했다. 그 성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갈 수는 없지만, 그 대학에 간다고 해도 인생을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도록 가르칠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 현실일지 모르지만, 성경은 말씀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셨다.”

여러분 아직도 바다뱃속에서(세상속에서) 잠자고 있는가? 깨어나라. 물고기뱃속에서(주님의 은총안에서) 주님의 사명을 들으라.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세상속으로 내보내시는 이유를 되새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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