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1.25. / 주현절 후 3주 )

 

 

  1. fade in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1)

하나님은 예언자를 그 뜻과 명령을 전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신다. 예언자는 때로는 쓴소리로, 혹은 단소리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그 말을 주의깊게 듣고, 희망찬 대안을 찾는 데까지 힘써야 한다.

요나가 활동하던 때는 언제인가? 열왕기하14장을 보면, 여로보암2세 때였다. 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었다.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고, 악행을 범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이때 제 2의 전성기나 나름 없는 시기를 맞았다. ‘왜그랬을까~?’

통념상, 하나님께 범죄한 시대는 궁핍하고 어려운 시대를 맞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다.’(열하14:25) 그마 만큼, 번영과 성장을 거듭하며 국가를 확장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히스기야 때와 비교해보면 태평성대를 누리며 백성들이 잘 산 것은 아니다. 아모스 선지자나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면 이렇다.

 

“사람들은 법정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너희가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그들에게서 곡물세를 착취하니, 너희들이 저지른 무수한 범죄와 엄청난 죄악을 나는 다 알고 있다.”(암5:10~12)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진다.”(호4:7)

 

‘도덕적 해이’, ‘강자들의 횡포’, 그리고 ‘부한 자들의 악행’ 번영과 확장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아니 그것을 인정한다면, 모두가 나누며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국가의 장밋빛 청사진과 번영에도 백성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더 힘들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5:24)

이것이 그 시대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히려 사회가 곪고, 그것은 언젠가는 터지고 만다. 이에 대한 것을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다. 아무튼.

 

이 번영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긍휼하신 하나님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기 때문”(열하14:26)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쓴소리로, 단소리로 전달한 사람이, ‘요나를 통하여’, 바로 요나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에게 임한 말씀은 무엇인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그 성읍의 악독을 보셨다”는 것을 외치라는 것이었다.

어머나! 3절 말씀은 충격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고 있다. 아니, ‘피하려고’ 하고 있다. ‘피하려고’,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라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어쩌다가 전화를 못받은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전화를 안 받은 것이다.

놀라운 이유는 무엇인가? ‘감히 그래도 되는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말이다.

 

 

  1. 요나의 항명사건에 대한 전말

여러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하기 싫은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는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그렇지 않은 것은 듣지 않는 것, 이것은 순종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는 것, 이것 역시 순종이 아니다. 순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순종은 내 뜻과 의지와 상관없이, 명령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다. 충성은 무엇인가? 충성은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열과 성의를 다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순종하는 자인가? 충성하고 있는가? 요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여러분 너무나 쉽게, 요나에 대해 불순종적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가 이것을 몰랐을까?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쓴소리든, 단소리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시면, 그 말을 대언했다. 좋든 싫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을 다하여 전하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열왕기하(14:25)의 말씀은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여러분 사람을 설득시키는 일은 참 힘든 일이다. 거절과 외면을 당하면서까지, 아니 그것을 이겨내면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일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분, 그런데 왜 그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기위하여 욥바항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욥바에서 배삯을 주고 배에 오르기 전에, 그는 다시 한 번 갈등한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이대로 배에 오르면 그만인데, 정말 그만인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한 것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렇게 하기로 다짐하고 배에 올랐다. 그마 만큼 신중했다. 감정적으로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12절에 보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렇게 말하는데, 무엇을 방증하는가? 그것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따를 수 없는 일,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무엇인가?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이다. 큰 도시였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에 망했다. 그리고 그 망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다. 단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노략질’, 수탈을 당했다. 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삼킬 수 있는 위험한 나라였다. 무리한 조공 때문에 백성들은 늘 어려웠다. 번영에도 불구하고, 그 조공을 위한 세금은 (짐작하는가?) 늘 약자들의 몫이었다. 강자와 강대국의 횡포를 생각하면, 의협심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온 몸이 진토가 되더라도, 부서져서라도 맞서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싫은가? ‘심판과 저주’를 외치는 것인데 말이다. 4장 2절에 답이 있다. 망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데, 하나님의 경고를 전함으로 니느웨가 정신을 차리면, 그것은 요나 입장에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여러분, 요나는 여태껏 하나님께 순종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앞에서 말한 대로 요나를 쓰셨겠는가?

요나가 앗수르의 니느웨로 가야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단순히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충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이정도면 용인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가게 된다면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 가까운 장래에 수탈과 노략질을 당할 지도 모른다.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라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뜻을 바꾸심이 어떨지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 우리도 이럴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정도는 하나님도 봐주시겠지. 이해하시겠지!’ 하고 말이다.

 

 

  1. 풍랑을 맞은 화물여객선

큰 일 났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중간에 폭풍을 만났다. 거기에는 요나도 타고 있었다. 이내 가라앉지 않을까 했는데, 점점 거세지는가 싶더니, 배가 파선될 지경이었다.

파도가 배 안으로 심하게 들이치자, 사공들이 각자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다. 그래도 별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요, 창조주 한 분 뿐이시다.

그러자 일단 무게가 나가는 것부터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각자 자기가 믿는 신에게 계속 기도했다. 그런데 요나를 주목해보라.

그때 선장이 선실 밑에서 이상한 사람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요나다. 지금 이지경인데,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깊이 잠이 든지라’ 말씀한다.

 

선장은 ‘어찌 자고 있느냐’고 그를 깨우면서 그도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한다.

 

그 잠이 ‘깊다’고 말하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때로 잠은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를 비유한다. 영적인 잠에 빠져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 영적인 잠에 빠지는 경우는 어떨 때 있는가? 세상이 너무나 좋아서 신나게 놀다가 지쳐 잠이 드는 경우가 있다. 영적인 상처와 시험으로 인한 것도 있다.

그런데 저는 요나에게서 고도의 심리전술을 발견했다. 전화가 울려도 일부러 안받는 경우가 있는데, 요나는 안받기 위해서 일부러 꺼놓은 격이다. 무슨 말인가? 요나에게 속아서는 안된다. 하나님도 속으실리 없다.

그가 바로 앞에 있다면 묻고 싶다.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답이 없다. 이젠 아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일부러 자고 있는 것이다. 물건이 부딪치고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아우성이다. 그런데도 잘 수 있었다? 말이 안된다. 그런데 선장이 깨우니까 일어났다. 무엇을 말하는가? 일부러 깊은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 속셈을 알아챘는가? 누구 닮지 않았는가? 요 ‘나’ 말이다.

 

왜 폭풍이 일어났는가? 선원 중에 어떤 사람이 ‘제비를 뽑아 보자.’고 제안했다. 혹시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지도 모르니까, 조사해보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말이 안된다. 누가 뽑힌다고 하더라도 폭풍을 만난 게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모든 일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요나가 뽑힌다고 하더라도, 요나 때문이라고 모든 것을 그에게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고 사고방식인가?

 

그런데 여러분 ‘뜨끔’해보신 적이 있는가? 제비를 뽑자, 요나가 뽑혔다.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영적으로는 아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일에 뜨끔해 할 수 있다면, 감사하게 여겨라. 그것도 믿음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엡4:30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말씀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붙들고 계시기에, 우리에 대해서 성령이 근심하는지 아닌지를, 우리의 속사람이 아는 것이다.

제비에 요나가 뽑히자, 그는 알았다. v.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말이다. 자기는 아는 것입니다. 일부러 자고 있었던 것을 말이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일들을 ‘나 때문’(‘내 탓이오’)이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크리스찬이 응당 가져야할 책임의식이다. 남 탓이 아니라 바로 내 탓 말이다.

 

한 가지 놀라운 발견은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9절 말씀을 보라.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10절에는 그 전후사정을 들은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 하나님을 경외하다는 말이 두려워할 줄 안다는 말이다.

 

그런데 11절에서 뜻밖의 내용이 전개된다.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정말 요나 때문이었다면, 요나가 그것을 이미 시인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바다는 잠잠해지고, 그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로 서원하도록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바다 상태가 더 심해졌다.

그런데 선장의 입장에서는 요나 때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자기 때문에 폭풍을 만난 줄 알고, 그렇게 되면 바다가 잔잔해지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나의 말만 듣고, 자기 배에 승선한 사람을 정말 바다에 던질 수 없었다. 승객의 생명을 함부로 바다에 희생제물로 바칠 수 없었던 것이다. 13절에 최대한 힘써 노를 저었다. 가까운 육지에 배를 대고자 했으나 성경은 바다가 더욱 흉용해졌다고 말한다.

 

여러분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더 심한 징벌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면 다시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벌을 받게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비신앙적인 것이다. 특별히 타인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해서도 안된다. 그에게 그가 달게 받는 형벌은 당연한 것이라고,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12절,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여러분,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꼭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명을 위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마음도 주신다.

이 세상의 문제, 고난, 환난… 나 때문인가? 왜 나때문인가?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나 때문’인 것이다.

 

‘폭풍’은 요나를 벌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바로 잡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나의 문제는 이유와 변명 거리가 있었다. 고집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순종의 정당한 명분이나, 꺼리가 되지 못했다. 저는 우리의 가정, 직장, 교회, 속해있는 모든 공동체를 생각해봤다. 그것은 모두 항해하는 배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자기만 아는 ‘불순종의 제목’이 있지는 않은가? 내가 깨닫지 못한 명령이나, 깊은 잠에 취해서 알지 못하는 명령이 아니라, 내가 이런 저런 이유와 명분으로 외면하고, 피해버리고, 일부러 잠을 자는 주님의 명령은 없는가? 자기는 아는 것이다.

순종은 자동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어떤 목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님은 그것을 바로 잡길 원하신다. 이유 없는 고난도 분명히 있다. 모든 것을 인과응보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뜨끔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돌아서기로 결단해보자.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15절, 바다가 잔잔해졌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던져지셨다. 또한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우리 안에, 가정에, 교회에 사시는 것이 돼야한다. 그럴 때, 누리는 잔잔한 평화를 얻길 축원한다. 그것을 결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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