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1. 18. / 주현절 후 둘째주일)
1. 시류 속의 성도의 모습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한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한가? 말할 것도 없는 질문 같다. 그러나 국민들의 선택은 먹고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잘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 불의하더라도 우선은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상광하지 않았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귀찮은 일처럼 여겼다. 물론 모든 것에 대해 자비와 긍휼은 없고 시시비비만 가려서 엄단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시시비비만 가리는 사람의 세상은 또한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불의한 힘과 권력이 횡포를 부려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것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IMF를 거쳐봤기 때문에, 더욱 이 문제는 중요하게 여겼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주전 8세기경 활동했던 아모스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풍년을 기약했지만 메뚜기 떼가 그 풍년을 먹어버렸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이 풍요와 번영을 바라지만 메뚜기 같은 사회적 곤충을 막지 못해서 오히려 빈곤에 처하고 황폐화 된다는 것이다.
경북 안동 한 초등학교 입학예비소집에서 주거형태에 따라 줄세워 : 이 시대의 차별과 편견의식이 얼마나 천박해졌는지를 보여준다. (일반아파트, 임대아파트, 주택 평수에 따라 줄을 세웠다고 함_어린이집 교사의 폭력만 학대가 아니라, 사회 전반이 폭력과 학대에 젖어있다.)
돈이며 다된다고 생각하고, 가격파괴와 저가의 무한경쟁 그리고 그 강요 속에 이 사회는 얼마나 저가로 천박하게 주저앉고 있는지 슬프게 바라보고 있다. 한편 사치와 낭비와 허영과 허세 속에 우리의 존재는 얼마나 속물로 변하고 있는지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은 불의한 권력의 횡포와 폭력을 싫어하신다. 사람이 돈과 권력으로 장난칠 수 있을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 불의함을 하나님께서 꺾으시고 막으시는 것을 우리는 또한 언론의 사회면과 정치면을 통해서 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여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일리라”(미가6:5)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은 ‘사람은 떡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떡은 없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겠다. 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은 받아먹는 삶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응당 그래야 한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물질 때문에 세상에 곪아 터지는 부분이 있지 않은지,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처럼 존재해야한다.
주현절 후 둘째 주일, 시류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나다나엘의 모습에 대한 주님의 말씀 때문이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도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이것은 하나님의 참백성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그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도다.’ 주님은 그를 좋게 보셨다.
주님을 만나기전 나다나엘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 성도들은 어떤 준비된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랐다. 주현절 둘째 주일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야 하고, 주님을 깨달아야 하는지, 모범적인 사례를 살펴보라. 오늘은 그 은혜를 나눠보자.
2. 이스라엘
여러분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첫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둘째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자 에서와 차자 야곱 중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됐는데, 그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나라를 이루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율법을 준수(안식일, 할례)했다.
주님께서 그에게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혈통으로나 윤리·도덕적으로, 그리고 율법적으로 완벽한 요건을 갖추었다는 의미일까?
나다나엘이 주님께 묻는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주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을 비유적으로 나타내주는 나무들이 있다. 포도나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이다. 포도나무는 주로 영적인 이스라엘을 말할 때, 감람나무는 종교적 이스라엘을 의미할 때,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신앙적 상태와 결실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주님께서 저주하셨다. 포도원에 3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는 비유를 하셨을 때도 등장한다. 이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의 나무를 붙들고 있던 나다나엘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잘못된 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인데, 주님께서 그를 건져주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 말이다.
나다나엘은 주님의 이 말씀만 듣고도,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고백한다.
이렇게 끊어 읽기보다는 문맥상, 별말이 오가지도 않는데, 일어난 일에서, 그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어떤 습관과 모습이었길래 그랬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더 좋다.
탈무드에 “무화과나무 아래에는 공부하기 좋은 곳”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둘째로 무화과나무 아래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뜨거운 지역에서 시원한 그 그늘로 피하면서 메시야의 도래가 이와 같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니까 그 아래에서 주로 성경이나 율법을 배우고 묵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을 보고 자연스레 ‘랍비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주님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도다.’ 말씀을 하신 것일까? 인간은 위선적이기 쉽다. 그러나 주님은 나다나엘의 진실한 중심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런데 이 말씀을 51절과 함께 읽으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누구인가? 야곱이다. 그는 간사했다. 야곱은 잘 아는 대로, 형에게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샀고,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그가 형을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다가 벧엘에서 노숙을 했다. 그 밤에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연결한 사다리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봤다.
요한이 주님의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백성됨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로마서가 그것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4:13)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롬2:29)고 말씀한다.
요한복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장의 맥락 속에 12-13절을 보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야곱이 복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꾀를 부렸다. 거짓과 속임수로 자신의 문제를 풀려고 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신앙인들이 꾀를 부린다. 그리고 자기 꾀에 빠진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방법을 택한다. 마지막에 믿음을 저버린다. 그런 속성을 가지고서, 모습을 가지고서는 참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일 수 없다.
3. 십자가 아래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추측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빠뜨릴 수 없는 것, 유력한 것이다.
나다나엘의 반응에 집중해보자. 주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는 주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한다. 단순히 ‘보았다’는 것 때문에, 이처럼 반응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통하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그는 빌립이 예수님을 증거할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단순히 ‘봤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인가?
영적으로 통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체험들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만 아는 경험, 나에게만 하시는 말씀, 그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나다나엘이 그랬다.
51절을 다시 보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시는가? 이런 경험은 기도할 때 알 수 있는 경험이라는 것을 말이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특별한 것은 이것이다.
그는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무화과를 보며 국가와 나라를 위해서, 그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장래 일을 염원하며, 주님이 오시기를 말이다. 말씀을 읽으며 실천하며 준행하며 살기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흔들려도, 아랑곳 하지 않고 본분을 지켜 살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여러분 십자가 아래에 있어보라.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 이 말씀이 얼마나 뜨거운 말씀인지 알 수 있다.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제목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이를 주님은 보고 계시다.
기억하라. 나다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하심 같이 십자가 아래에 있는 성도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조창환 선생님의 ‘수도원 가는 길’이라는 시집에서 ‘이슬’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이슬은 허공이 벗어 놓은 옷, 허공이 풀어 놓은 살, 허공이 남겨 놓은 그들인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슬 내린 풀밭이라는 말을 강하게 부정한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한다.
밤새 풀밭이 어둠을 끌어당겨 몸부림 친, 핏자국 같은 것
제 안의 물기 모두 품어 올려 적셔 놓은, 젖은 수건 같은 것
지친 눈물 자국 같은 것으로 풀밭은 쓰러져 있었다.
고단한 인생에 지친 이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서,
지상의 행복이란 모두 울다가 지친 흔적인 것을 알았다.
아침 해가 퍼지기 전, 황급히 풀밭이 이슬을 거두는 시간
부끄러운 속내를 들켜서 제 얼굴을 감싸는 것을 보았다
라고 매듭짓는다.
십자가 아래 너무 힘들다고 원망하지 말라. 혹 그렇다면 말이다. 인간을 저가로 전락시켜버리는 세상에 굴복하지도 말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 뒤에 하나님의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나타나면, 아침 해가 퍼지기도 전에 황급히 부끄럽게 얼굴을 감싸게 될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세상일들을 바라보며 단순히 분노만 하고 있을 수 없고 그렇다고 낙담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주님은 나다나엘과 같은 이들을 부르시고 찾으신다. 오늘 우리가 그 모습으로 주님 앞에 제자되기 위해 나아가길 원한다. 단순히 나만 잘되면 된다거나 나만 아니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염원하며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의 참 자녀로 서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을 바라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