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1. 11. / 주현절 제1주, 세례주일)
1. 주현절 설명
지난 6일은 주현절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맞는 주일이다. 주현절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현존)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통찰을 통해, 인간의 무지와 어둠이 밝아진다.
또한 오늘은 세례주일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음성이 들렸다. 세례는 주님의 현존하심을 체험하고 깨닫는 중요한 계기임은 분명하다.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면밀히 살폈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 부끄러운 자랑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을 때가 있고, 그 때는 이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후회하는 것도 있다. 그마 만큼 인간이 무지하고 어리석다. 그러기에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한다. 지혜가 밝아져야 한다. 주님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우리 삶의 등불이다. 우리의 인생과 길을 잘 아시고 밝히실 주님의 등불을 들고 걷는다면 결코 후회함이 없다.
2. 요한의 세례
주중에 40대 중반의 어느 분을 만났다. 그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다시 나가기 시작한 지가 5-6년 가까이 됐다. 젊었을 때 열심히 했는데, 시험에 들고 상처를 받아 자연히 교회와 멀어졌다. 그러다가 인생이 자기 맘 같지 않았다.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했다.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됐다. 죄도 씻기는 것 같고, 마음도 정화하고, 새롭게 힘을 충전할 수 있었다.
교회에서 어떤 섬김과 봉사를 하고 있는 지 물었다. 특별한 것은 하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고 오는 것에 만족했다. 교회에서 뭔가 활동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지만’ 귀찮게 여겨졌다. 교회 일을 하다가 상처를 받아 신앙이 떨어지느니, 개인신앙을 지키며, 이 선에서 만족하고 머물자는 생각을 했다.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에 나가는 것은 불편하고, 신앙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내비쳤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확신이 있다고는 대답했다. 그런데 표정은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확인하며 물었다.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것인지,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는 지 말이다.
여러분 이 차이를 알겠는가?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과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다는 것에 대한 확신’
그의 속마음에는 이런 것이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을 알기는 아는데, 만나봤으면 좋겠다, 체험했으면 좋겠다, 믿기는 믿는데, 체험이 없다, 그 확신과 감격이 없다.’
신앙생활하면 인생에 도움이 되고 좋은 것은 누구나 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이들이 체험과 확신을 갈급해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주현절은, 그 체험과 확신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고 깨닫게 하는 절기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한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주님을 체험한다. 어떤 이들은 실패와 절망에서 주님을 만나 재기에 성공하기도 한다.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은총으로 얻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인가? 고난과 환난과 불행을 통해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없으면 안되는 것인가,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고난, 환난, 만나는 불행… 이런 것들은 분명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봤다. 곧 그 때가 지나면 그 눈이 다시 감기기도 한다. 그때는 주님을 의지하고 만났다가도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신앙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이 봤다. 무슨 말인가? 그것이 곧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결정적인 열쇠는 못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3. 성령세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도착했다. 이미 아볼로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한 바 있다. 아볼로는 언변이 뛰어나고 성경에도 능통했다(행18:24). 성경에 대한 해석만으로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힘있게 증거했다(18:28).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어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예수에 대한 가르침과 교훈에 대해서 듣고 배운 사람들이다. 예수님에 대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고, 믿고 본받으려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 제자들을 만났다. 그런데, 한 가지 그들 속에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엇일까?
톨스토이 작품 중에 이런 작품이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도다.’
어떤 작은 도시에 마틴이라는 구두수선공이 살았다. 지하 작은 방에 살았고, 작업장이었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람의 구두가 없었다. 그는 지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만 보면 그가 누군지 알 정도였다. 그의 아내는 세 살베기를 남겨놓고 일찍 죽었고, 아이들은 어느 정도 성장하자, 병으로 죽었다. 마틴은 자신 역시 죽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 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신앙과는 멀어졌다.
어느 날, 이 근처에 한 노인이 지나갔는데, 그에게 그의 비애에 대해 말했다. 그런 뒤에 그 노인은 그에게 글을 읽을 줄 안다면 복음서를 읽을 것을 권했다. 마틴은 복음서를 읽었다. 그 동안 많은 힘이 됐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들 마다 은혜가 됐다.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도 돌려주고, 겉옷을 빼앗으면 속옷까지 내주고, 5리를 가고자 하면 10리를 가주어라.’ 등등 귀한 말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 날, 꿈에 주님이 나타나셨다. ‘내일 찾아갈 것이니, 거리를 내다보라’고 말씀해주셨다. 꿈이었지만, 정말 주님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다음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아마도 톨스토이는 주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신앙인들의 열망을 이런 방법으로 제시했을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묻는다. 2절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노라.” 왜 이렇게 묻는가? 에베소 교인들은 주님에 대해 듣고 알았지만, 만나고 싶은 열망 또한 컸다. 체험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의 신앙적인 갈급함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좋은 비결 또한 알고 있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니라.”
여러분 요한의 세례에 해당하는 신앙단계가 있다.
요한의 세례라고 하는 것은, 물로 하는 세례다. 회개와 씻음을 통한 정결을 상징한다. 개인적인 결단과 의지를 요구한다. 누구나 새로운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고, 그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한다. 죄 가운데 있다가 회개하고 다시 새롭게 의로워지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영화롭고 행복하게 만들고자 한다. 요한의 세례는 거기까지는 미칠 수 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도 이 단계까지는 누구보다 자신 있게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며 금식함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 이들도 있다고 주님은 설명하셨다.
4절-5절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무엇일까? 세례요한은 복음서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여담이지만,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물을 뿌리거나 얹느냐, 담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수함을 통해 성령이 임하기를 축원하고 기원하며,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령과 불로 임하시는 세례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무엇인가?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믿는 것이다. 의로워서가 아니다.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법과 사망의 법이 자기 지체 안에서 크게 갈등하는 것을 보았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제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 사망의 몸에서 구원받을 수 없음을 통탄했다. 그러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는 것’을 체험했다.
여러분, 내 생각과 내 이성과 상식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딱 거기까지이다. 그런데 성령이 여러분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 시인하게 하신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성령이 증거하신다. 이시간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 우리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시간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고 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고 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을 두드리고 계시다. 그 주님을 영접하라. 여러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자칫 우리의 믿음이 요한의 세례에 머물 수 있다.
4. 성령이 머무는 곳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실까? 주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말씀하셨다.
톨스토이 작품으로 넘어가보자. 주님은 마틴에게 ‘오늘 찾아오겠다’고 하셨다. 마틴은 평소보다 더 많이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보이지도 않았다. 창 밖에 눈을 치우고 있는 노인뿐이었다. 좀 지루해지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어서, 그를 불러 따뜻한 차를 나눠마셨다. 마틴은 계속 창밖을 지켜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지나갔다. 어떤 초라한 행색으로 아기를 팔에 안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따뜻하게 덮어 줄 것이 없어, 아기는 계속 울어대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꿈은 꿈이련가 생각하며, 그를 불쌍히 여겨 방으로 불렀다. 따뜻한 난로 곁에서 몸을 녹이고 음식을 주며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했다. 여인은 아무도 자기에게 동정을 베풀어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마틴은 자기가 왜 그렇게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는지 설명했다. 그리스도가 찾아오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일이 없었더라면 자기도 그 여인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고 도와줄 수 없었을 거라고 겸양을 떨었다.
한참 뒤에 사과를 팔고 있는 노파가 보였다. 한 소년이 사과를 훔치려다가 붙잡혔다. 그리고 경찰에 넘기겠다고 했다. 마틴은 재빨리 달려가 그 소년을 용서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비용은 자기가 대겠다고 했다. 돌봐줄 부모가 없어 배고파 사과를 훔쳐야 했던 그였다. 자식을 잃은 그로서는 그 아이가 불쌍했다. 그러는 동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오시겠다고 했던 주님,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그래서 실망감이 컸다.
7절 말씀을 보라.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열두 사람 쯤’ 무엇이 보이는가?
12 사람만 보여서는 안된다.
6절에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12명의 사도들과 함께 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던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하심이 12명의 제자들 사이에 성령을 통해 계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믿을 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원한다.”
그 12명의 모습은 어땠을까?
교제를 나누고 신앙공동체를 섬김과 봉사와 사랑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의 현존하심이 나타났다. 에베소 교회에 주님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했던 첫 사랑, 첫 마음의 씨앗이 됐다.
톨스토이의 작품은 어떻게 끝나는가?
날이 저물어 어둑해졌다. 일과를 마치고 성경을 읽으려고 접었던 부분을 펼쳤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나였느니라.” 눈을 쓸던 노인의 모습이 지나갔다. 또다시 목소리는 “나였느니라.” 말했다. 그리고는 아기를 팔에 안은 여인의 모습이 지나갔다. 다시 목소리는 “나였느니라.” 울렸다. 노파와 사과를 든 소년이 걸어 나와 미소를 짓더니 또한 사라졌다.
마틴은 그제서야 주님이 오시겠다는 약속이 정말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이었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봐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니라.”(25:31-40참조)
-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맹신이나 자기 최면과 다른 점이 무엇인줄 아는가? 봉사와 섬김과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눈을 뜬다는 점이 다르다.
환난과 시험과 불행을 겪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오해를 버리라. 오히려 그래놓고도 어리석음 그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우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은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내신다. 12명의 제자를 통해서 또한 주님의 현존이 드러났다.
섬김과 봉사와 그 수고와 십자가를 감당하는 제자도의 삶을 통해서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봉사, 섬김, 경건의 훈련과 연습이 없으면 실천력도 약하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를 거부하고 외면하면 밖에 나가서도 그러기 쉽다. 교회 안에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훈련의 힘과 능력이 세상에 나가서도 그렇게 만드는 것 아닌가?
개인의 행복과 평안에 머문 신앙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요한의 세례에 머문 신앙의 단계이다. 자신의 의로움과 안위만 생각하는 신앙이 아니라, 헌신과 수고와 봉사의 의무를 능히 감당하면서 주님의 세례를 받는 단계의 신앙, 성령이 충만한 신앙이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