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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5일 주일예배설교
- 배경적 의미
이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빈다.
오늘의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알아둘 일이 있다. 다니엘서는 주전 6세기 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경연구가 오늘 만큼 미치지 못했을 때의 일이다. 많은 연구의 축적과 과학적인 방법들이 발달했다. 그래서 다니엘서는 주전 2세기 경에 쓰여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다니엘이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맞다.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해전에서 왜구를 물리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은 맞지만, 명량해전을 소재로 한 ‘명량’ 영화는 2014년에 만들어졌다. 우리에게 재해석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처럼 다니엘서는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 신앙과 믿음 그리고 소신을 지키기 어려웠던 세상 속에서 다니엘이 그것을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을 교훈 삼아, 힘겹고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주전 2세기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 무렵 쓰여진 또 다른 책이 있다. 마카베오라는 책이 있다. 당시의 많은 역사적인 정보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런데 성경과 메시야 운동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 마케베오서는 정치적 메시야 추종했다. 기독교 신앙은 그와는 정 반대이다.
마카베오는 “유대인들에게 헬레니즘이 강요되는 것을 막았으며 유대인의 종교를 보존했다. 안티오코스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 종교를 강요하려 하자 이에 반항하여 산으로 올라 갔던 늙은 성직자 마타시아스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은 뒤 반란군을 이끌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셀레우코스의 4개 군단을 격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다. 그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유대 민족이 자유롭기를 원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했다. 그는 비록 2년 후에 살해되었지만, 동생들이 싸움을 계승하여 잠시나마 유대의 독립을 이루어냈다.”(다음백과, 마카베오)
다니엘서는 시각을 달리한다. 다니엘11:34절에 ‘조금의 도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다니엘서의 저자는 마카베오 혁명의 놀라운 결과와 승리를 알고 있었다. – 이것만으로도 저작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 그런데 회의적이었다. 그 이면에는 기대했던 것과 같은 결과가 꼭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인위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군사적 저항, 물리적 힘의 개입과 작전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직관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장투쟁과 혁명은 ‘조금의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또 다른 폭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참 평화의 왕인 메시야와는 거리가 멀다고 내다봤던 것이다. 다니엘서가 마카베오를 알고 있다는 것으로도 그 저작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가 드러내려고 하는 시대적 상황이 있다. 네 마리의 짐승에 대한 환상이 있다.
첫째는 사자와 같은 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나중에는 뽑혔다.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 입에 세 갈빗대를 물고 있다.
셋째는 표범 같은데, 등에 새의 날개가 넷이 있고, 머리가 넷이 있다.
네 번째로 본 짐승에 대한 환상(이게 바로 다니엘서가 드러내려고 하는 시대상황이다.) 그 짐승은 “무섭고 / 놀라우며, / 또 매우 강하며, / 쇠로 된 큰 이가 있어서 / 먹고 / 부서뜨리고 /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 열 뿔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난 작은 뿔이 / 있었다.”(다니엘7:7-8)고 설명하고 있다.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의 우화로 공산당에 대한 풍자를 했는데, 이처럼 여기서 ①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는 바벨론, ② 곰은 메대, ③ 표범은 페르시아, ④ 철의 이를 가진 짐승은 (현재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더 대왕 내지는 그리스, ⑤ 열 개의 뿔은 10명의 프톨레미 지배자와 셀류키드 지배자들, ⑥ 1개의 뿔은 아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를 말한다. 제국의 패권을 다투었던 나라와 왕에 대한 암시다.
특별히 네 번째 짐승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다니엘7:19에는 “그것은 모든 짐승과 달라서 심히 무섭더라. 그 이는 쇠요, 그 발톱은 놋이니 먹고 부서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더라.”고 증거한다.
사실 세상은 바뀌고 있었고 발전하고 있었다. 제도들은 정교해지고, 건축, 문학, 철학, 과학, 수학 등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면은 그렇게 밝은 게 아니었다. 실물경제체제가 화폐경제체제로 바뀌면서, 문명의 전환사적 시점과 같은 충격적인 변화들을 경험했다. ‘충격적’이라는 이유는 변화의 속도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하거나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빈곤, 생계의 어려움, 제국주의와 힘을 가진 자들의 횡포는 점차 일상이 되어갔다.
다니엘서 기자의 눈에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암흑기가 가장 큰 문제였다. 시대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가 사라지고, 그릇된 길을 걸으며 비틀거리면서도, 그것을 위험하게 느끼지 못하고 경각심을 갖지 못하는 게 문제이다. 이데올로기와 우상화에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은
오늘 말씀은 다니엘서가 요청하고 있는 깨어있는 삶의 결론과도 같은 말씀이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며 희게 할 것이나.”
- 믿음을 지켜야 한다.
회의감과 의심을 이겨내고 안될 것 같아 보이고 안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되도록 만드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영적인 암흑기에 회의감과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바로왕에게 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로왕이 이스라엘을 내보내도록 허락할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로왕은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 말한다. 돌아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 괴롭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기 위해 건지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협조하고 뜻을 모을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게 하는도다.”(출5:21) 돌아온 것은 백성들의 원망과 질타 뿐이었다.
모세에게도 실족하는 마음이 찾아왔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출5:22-23)
시쳇말로 모세의 현타였다. 하나님께서 헛된 기대를 갖게 하시고 책임지지 못할 비전과 계획을 시행하게 하시고, 오히려 낙망하고 실망하고 괴롭게 하시는 것 같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 신앙의 문제들인가? 그러나 구원과 복을 언약하시는 하나님은 그 계획과 섭리를 철회하지 않으신다.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출6;1)
믿음의 눈이 없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지 못하고 섭리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그릇된 길로 갈 뿐, 믿음을 지키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언약이 이루어질 줄로 믿으시라.
지혜서가 말씀하고 있다. 애굽의 사람들은 배고플 때 먹을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내리신 생물들의 역겨운 꼴을 보고 식욕이 싹 가셔 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잠시 동안 굶주리기는 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차지하게 되었다.”(지혜서16:1) 애굽의 재앙과 광야의 메추라기를 비교한 말씀이다. 애굽에 떨어진 번개와 우박 그리고 광야의 만나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먼저 애굽에 대해서 “주님께서 양식으로 주신 눈과 얼음은 불을 견디고 녹지 않았다.”(지혜서16:22)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해서 “한편 주님의 백성들은 천사들의 양식으로 먹여 살리셨다. 주님께서는 미리 준비하신 빵을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꾸준히 내리셨다.”(지혜서16:20)
주님께서 마태복음5:45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말씀하신다.
지혜서의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애굽에는 악인을 벌하는데 사용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자비로운 일에 사용하셨다.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다니엘12:10하반부)
- 어려움에서 지켜주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다니엘서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어떤 것들인가? 다니엘의 친구들이 신앙적 타협을 버리고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살아남은 이야기, 다니엘이 신앙적 위협과 고난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굴하지 않다가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살아남은 이야기들이다.
다른 문서들에서는 이런 자세한 내용들이 들어있다.
세 친구들이 형을 집행하는 사람까지도 불태울 정도로 맹렬히 타는 엄하고 심히 뜨거운, 근처에 있기만 해도 타죽는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왕이 다른 한 사람을 보았다고 한다. 다니엘3:24-25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그의 이름은 아자리야이다. 70인역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3:24 “그들은 불길 가운데를 걸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찬미를 드렸다.” 3:51 “그 때에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입을 모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는 노래를 이렇게 불렀다.”
상상해보라. 맹렬한 풀무불 속에서 천사를 따라 다니엘의 친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미하고 노래를 부른다.
천사가 부른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며 공경하올 주님, 찬미 받으소서.”(3:26) 세친구들이 함께 입을 모아 찬양을 드린다. “우리 조상들의 주 하나님, 찬미받으소서. 영원무궁토록 주님을 높이 받들며 찬양합니다.” 제가 짧게 소개하지만, 실상 풀무불 속에서 내내 서로 찬양을 부른다.
우리의 상황이 풀무불에 던져지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섭리는 신비하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 70인 역은 이런 내용을 추가하고 있다.
그 굴 속에는 사자 일곱 마리가 있었는데 매일 죽은 사람 둘과 양 두 마리를 먹이로 주곤하였다. 그런데 그 때는 엿새동안 사자들을 꼬박 굶겨, 틀림없이 다니엘을 잡아 먹게 하였다.(14:32)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다에 하박국이라는 예언자를 시켜서 그 안에 넣어줄 음식을 준비하게 한다. 하박국이 나는 바벨론에 가본적도 없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그를 번쩍 들어서 바벨론에 보내셔서, 사자굴 가장자리에 내려놓게 하셨다. 그리고는 즉시 하박국을 제나라로 옮기셨다.
위협이 있더라도 그 위협이 꼭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안전한 방법으로 지키시기 때문이다.
- 지혜는 우리 모두를 깨어있게 한다.
이 당시는 영적으로 보면 술 취한 사람 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우리 시대가 아무리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해도 과연 다를까? 70인역에만 나와 있는 다니엘서를 보면 수산나라는 선한 여자를 음흉한 두 노인의 말만 듣고,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죽이라’ 한다. 다니엘 한 사람이 깨어 지혜롭게 사실관계를 밝힌다. 두 노인이 수산나를 겁탈하라고 하다가 수산나가 소리를 질러 미수에 그친다. 그러자 수산나가 다른 남자와 정분을 나누는 것을 봤다고 거짓 증거를 한다. 노인들이 그랬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때 다니엘이 이 저주는 자기와 상관없다고 말을 내뱉더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자, 두 노인을 따로 떼어 놓고 각각의 노인에게 묻는다. ‘어디서 봤느냐?’ 한 노인은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봤다고 하고, 또 다른 노인은 떡갈나무 밑에서 봤다고 한다. 두 사람의 증언이 다른 것이다. 사람들의 이성이 돌아왔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진정으로 깨어서 참고 인내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학자들은 11-12의 말씀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1290일(3년 7개월)과 1335일(3년 8개월 반)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날’에 대한 시간이 거듭 수정되고 있는 것으로, 기대가 빗나갔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만약 이 시간들이 아사(餓死) 직전까지 이른 시간이라면 얼마나 힘들고 절망스러웠을까? 낙심된 일들이 반복되고, 고통이 지속되고, 절망이 커져갔을 때 –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우상의 표요, 짐승의 표나 그 이름의 수(666)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 이처럼 믿음의 난파선을 타게 된다.
그런데 저는 연속적으로 날짜가 수정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저자의 꺼지지 않는 믿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