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고린도후서12:7-10)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고린도후서12:7-10)

 

 

2020년 10월 18일 주일예배설교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주의 보좌 앞에 온 몸으로 달려나와 하나님을 예배함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고통 가운데에서도 헛된 일로 분주하기만 하던 삶을 멈추고 주님 앞에 나왔아오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예수님을 따라 참된 믿음과 행함 가운데 서게 하여 주옵소서. 쉼 없이 섭리하시며 보호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헤를 사모하오니,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과 온유한 손길로 위로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겔47:12)

 

 

  1. 인사

1) 2개월 여 만에 대면예배를 드린다. 참 반갑다. 늘 주어질 때는 몰랐다가, 이렇게 주어지니까, 다시 한 번 소중하다는 걸 느낀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길 빈다.

 

2) 첫째 아이의 학교 수업에서 이런 토론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고속도로에서 속도제한 카메라가 있는데, 요즘은 네비게이션에서 미리 알려준다. 과속을 하다가도 그 구간에서만 속도를 줄인다. 실제 과속방지의 실효성이 있을까, 토론을 하고, 대안을 생각해내는 것이었다.

 

아마 얼굴을 보면 아는 분들도 있을텐데, 정**라는 아이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다.

“고속도로 단속카메라 밑에 과속방지턱을 설치한다.”

 

반 아이들이 ‘빵’ 터졌다고 한다.

 

3) 속도중독 사회다. 거침없이 달려가기만 한다. 성과를 내야하고, 결과치를 극대화 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의 존재를 평가하도록 길들여진다. 여유 없이,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바삐바삐 숨 가쁘게 움직이며 살아간다. 이스라엘의 격언(집회서6:8)에 “어떤 친구는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때에만 우정을 보이고 네가 불행하게 되면 너를 버린다.”는 말이 있다. 속도에 중독된 마음도 비슷한 마음과 삶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 심지어 그 마음에 절제가 없고,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4) COVID-19가 지속돼서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을 조금 늦추고 이럴수록 소중하고 귀한 보배들을 되찾을 수 있는 지혜를 모아보기를 바란다.

 

 

  1. 인생은 십자가 곁에

1) 우리에게는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제2 정경 집회서 42:9-10

 

“딸은 아비에게 남모르는 근심거리여서 딸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적도 많다. 딸이 젊을 때는 시집을 못 갈까 걱정이고, 시집을 가면, 소박을 맞을까 근심이다. 처녀 때에는 혹시 유혹에 빠질까 걱정, 출가 전에는 아기를 가질까 걱정, 출가 후에는 빗나갈까 걱정, 시집가서도 자식을 못낳을까 근심한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근심, 걱정, 염려를 안고 살아간다. 요즘은 주택난, 취직난, 경제난, 자녀교육난을 겪고 있다. 환경의 재앙은 우리를 더 위협하고, 미래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건강의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고,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있고. 이처럼 괴로움과 시림을 안고 살아간다. 따지고 보면 우리 생 자체가 고통이다.

 

2) 집회서40:4, “왕의 옷을 입고 왕관을 쓴 자로부터 누더기를 걸친 사람에 이르기까지, 인생은 분노와 시기, 고난과 불안, 죽음의 공포와 원한, 그리고 싸움 뿐이다.”

 

참 공감되는 말씀이다. 솔로몬에 대해서도, 집회서 47:19은 지혜와 지식과 부와 명성이 정말 화려했지만, “여인들에게 몸을 내맡기고 욕적의 노예가 된 적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꽉 채운 사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같았지만, 어쩌면 가장 공허하고 허탈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3) 여러분은 어떤신가?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 누구나 충만함을 누리고 싶고, 누구나 평탄하길 바란다. 그런데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과 의미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1.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라.

참된 힘과 능력을 충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라.”

 

어떤 사람은 이 메시지 자체를 부담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구레네 시몬은 지나가는 길에, 붙들려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가 지셨던 십자가를 엉겁결에 대신 져야 했다. 십자가 앞에 가까이 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이 튀듯 구레네 시몬의 신세가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십자가의 도와 능력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고린도전서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했다.

 

십자가는 무엇일까? 그와 관련된 의미를 살펴보자. ① 십자가의 자리, ② 십자가의 도, ③ 십자가의 능력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1. 십자가의 자리는 기도의 자리이다.

1) 십자가 사건은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사건만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22:42) 기도하셨다. 시한부 인생처럼 고통스럽고 괴로우셨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가진 사람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느끼셨다.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처럼,

십자가의 시간은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말씀하셨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어쩌면 주님이야 말로, 어찌 해야할 바를 모르고, 유혹과 갈등에 휩싸였을 지도 모른다.

 

비교할 수 없는 바지만, 작년 이맘때, 임상권 목사님 증언처럼, 제 얼굴이 노래졌었다. 기도는커녕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수밖에,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어 초라함과 민망함에 괴로워했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2)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사람들은 주님이시까 이렇게 기도로 승리하셨다고, 당연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게는 주님의 이 기도가, 살과 뼈를 뚫고 들어와 십자가에 못이 박히실 때의 비명처럼 들려온다.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내 인생에서 자기 원하는 바대로, 기대대로 되지 않고 큰 고통이 찾아올 때, 그 초라한 운명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3) 누가복음22:44은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눈 앞에 닥친 고통에 대한 피눈물은 아니었을까? 영웅의 의연함처럼 고통과 상관없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영화에서나 그려지는 것이다. 주님의 피맺힌 고통에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낀다면 신성모독이며 불경한 것일까?

 

4) 그런데 누가복음은 십자가의 신비를 우리에게 이렇게 일깨워준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22:43)

 

천사는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성령이라는 교리적 설명도 가능은 하겠지만, 아니다. 누가는 십자가의 신비를 사람의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천사라고 했지만, 사실 누가복음이 증거하고자 하는 의도는, 고통 앞에 놓인 아들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떨리는 손길이며, 허기진 영혼을 채우기 위해 힘 주시는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의 눈물이다.

 

기도의 자리가 곧 십자가의 자리인 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주님은 기도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체험을 하기를 원하신다. 그 자리에서 위로가 생겨나고 평안이 찾아오며,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어떤 충만한 은혜를 채우게 된다.

 

 

  1. 십자가의 도

1) 그렇다면 여러분, 두 번째 십자가의 도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십자가의 도는 믿음에서 생겨난다. 믿음으로만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

 

2)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만류했다. 예언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했다. 결박과 고통이 따른다고 말이다.바울은 괴로웠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3) 결국 예루살렘에서 체포됐다. 감옥에 갇혀있을 때, 주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23:1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로 가는 배편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다.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사공들이 사흘 밤낮을 사투를 벌였지만,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러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좀 처럼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위기와 절망이란 본디 그렇게 보이는 법이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27:20)

 

4) 바울이 일어났다.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입니다.”(행27:22)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27:23)

5) 예루살렘 감옥에서 기도하며 들었던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요, 음성인 줄로 믿었다. 십자가의 도란 우리의 고통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다. 유라굴로를 만난 풍랑사건은 우리 인생의 상징과도 같다. 광풍이 분다고 하더라도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주님 아니신가? 물 위를 걸어오신 주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로 걸어오신다. 십자가 가까이에 있을 때, 십자가에로 더 가까이 나아갈 때 선명해진다.

보여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에 보이는 것이다. 주의 음성을 들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확신하기에 듣는 귀가 열리는 것이다.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꼬 물으실 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십사”라며 지혜를 간구한다.

주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 주께서는 응답하시고 함께 하시는 믿음과 확신을 주신다.

 

 

  1. 십자가의 능력

1) 세 번째, 십자가의 능력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신비이다. 돈, 권력, 명예는 눈에 보이는 능력이다. CBS성서학당에서 어느 패널이 세상을 살다보니 자기 말은 안 들어도, 돈의 말은 듣더라고 해서, 맘몬(물질)이 주인이 되는 현상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미신적인 능력이나 주술적인 능력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신비한 능력이 있다.

 

2) 바울이 늘 자신감과 확신과 능력만 넘쳤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에게 콤플렉스도 있었고, 열등감도 있었고, 상처도 있고, 아픔도 있고, 핸디캡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다. 그에게는 육체의 박힌 가시가 있었다. 어느 학자는 안질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느 학자는 만성 말라리아라고 하기도 한다. 육체의 가시가 재발 되면 의기소침해지기도 했고 사역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아볼로와 자꾸만 비교하면서 험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때, 그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고후12:8에서 이것이 떠나가도록 사라지도록 세 번씩이나 간구했다고 한다.

 

3) 십자가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육체의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됐다. 그리고 ‘주의 은혜가 이미 족하다.’는 음성을 계속 들었다. 바울은 십자가 능력의 신비를 전하면서, 이 계시는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4) 그렇다면 십자가 능력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바울은 도리어 기뻤다고 증거한다. 왜냐하면 주의 은혜란, 십자가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빈 그릇이라야 물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약함이라는 빈그릇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 강함이라.”

 

연약한 나에게, 자기에게, 사람에게 십자가의 강한 능력이 나타난다.

 

5) 지퍼의 원리가 생각났다. 한쪽 지퍼의 톱니 같은 이빨이 다른 쪽 지퍼의 이빨을 만나, 슬라이더가 올라가면 채워진다. 체인(chain)이 된다. 십자가 고통을 당하신 주님과 우리의 연약함이 십자가에서 만나 온전해지는 능력,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다. 인생의 곤고함과 고생과 어려움이 없을 수 없는 모든 인생이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만,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믿음과 능력을 채울 수 있다.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사모하며 나아오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6)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는 너무나 자유분방한 나머지, 누군가의 고통에 별로 신경을 쓰거나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이다.

테레사라는 여자와 함께 살다가 결혼을 했는데, 테레사는 스스로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꿈을 꾸었다. 그 꿈 이야기를 듣는 순간, 토마스는 마치 테레사 손가락의 신경이 자신의 뇌에 직접 연결된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말한다.

 

주님께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이 주님의 신경에 직접 연결된 듯, 느끼지 않으시겠는가?

 

7) 요즘 사람들이 여기저기 깊어가는 가을의 풍경과 단풍을 찍어 SNS에 올린다. 그마만큼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인생인지도 모른다.

속도에 길들여진 채 과속으로 인생을 질주하는 욕망이 앞서서 인생과 영혼의 답을 찾지 못하던 인생이라면, 이 시간 십자가에로 더 가까이 나아가 참된 복된 비결을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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