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1일 주일예배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물속의 고기를 먹이시고, 산 중의 짐승을 보살피시며, 들의 꽃과 풀을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조금씩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하는 나뭇잎들을 우리는 무엇으로 물들고 있는 지 묻게 되는 때에,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물들어 주님의 모습 닮기를 원하오니, 이 시간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 삶 속에서의 ‘이 모든 일’
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온라인으로 이 영상을 보며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이번 몇몇 소식을 나눔으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한다.
1) 최미자 권사님 차남 가정에 아기가 태어냈다. 간만에 마음이 시원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최권사님의 목소리가 참 반가운 빗소리처럼 들렸다. 아기(사랑이)를 마주하며 부르는, 진범 씨의 경이로움에 물든 목소리도 초록 연못의 평화로운 풍경처럼 들렸다. 우리 교우들 모두 기뻤을 줄로 믿는다. 서로 축하를 건네는 모습도, 종달새들이 날며 우짓는 소리처럼 아름다웠다.
이럴 때 생명 탄생 만한 기쁨의 선물이 있을까? 코로나19는 계속되고, 정치인들은 맨날 싸우고, 언론은 조지 오웰의 작품, 동물농장에 나오는 스퀼러 같고, 답답하고 피곤한 세상사에 단비와 같은 기쁨을 주었다. 산모도 아기도 건강하다고 하니, 참 감사하다.
주권사님의 둘째 따님도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 여러분 모두 순산이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란다. 태중에 있던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보면 울음소리가 중요하다. 숨통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이름을 짓게 될지 아직 모르겠지만, 아기의 쩌렁쩌렁한 울음 소리에, 세상의 숨통도 확 틔였으면 좋겠다. 우리의 답답한 가슴도 뻥 뚤리는 기쁨을 함께 만끽했으면 좋겠다.
“하나님, 이 아기들이 장차,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들의 마음을 동시에 시원케 해줄 수 있는 인물들이 되게 하옵소서.”
축복하며 기도한다.
창원에서 첫 목회를 할 때, 산 중턱에 있는 저수지에서 반딧불이를 본적이 있다. 에덴의 생명나무를 지키실 때 하나님은 화염검을 두셨다. 그때, 반딧불이의 존재를 보면서 생명보호구역의 화염검처럼 신비하게 느껴졌다. 또 우리가 이 기회에 예수의 생명을 받아 그 역할을 다하도록 부름받았음을 깨닫고, 복음과 생명의 반딧불이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
2) 이번 주에는 민선이가 (유튜브로 생중계 되고 있기에 자세한 정보를 다 드릴 수 없지만) 치료를 받는다. 김집사님의 가정을 보면,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자비의 손으로 붙들고 계심을 느끼게 된다. 민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집사님 가정에는 치유의 역사가 참 많다.
작년 이맘때, 우리가 이 자리의 교회를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그때 김집사님이 입원치료 중이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빨리 일으켜주셨는지, 모두가 정말 기쁘고 신나게 일했지만, 특별히 김집사님이 여선교회회장으로서 맡겨진 사명을 다 해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고자 하시니까, 붙잡아주셨다. 신기하고 놀라울 정도였다. 벌써 1년이 됐는데, 작년 일을 생각해보라.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민선이와 함께 하시고 빨리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생명이요, 인생임을 알고,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산다는 의미까지도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3) 추가적인 이야기 하나 더 하자. 우리 집에 사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항상 키가 걱정이다. 클 때 되면 크겠지 했는데, 이제 정말 얼마 걱정할 때다. 키 성장을 위해서 줄넘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이게 습관과 의지가 있어야 하는 문제여서 인지, 하라고 해도 생각만 하고 안했다. 늘 기도하는 제목 중 하나인데,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키가 크도록 도우실까?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지 않는데 말이다.
지금, 줄넘기 2중 뛰기(소위 쌩쌩이) 30초에 60개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게 하라하라 해도 안하더니, 학교에서 줄넘기 관련한 행사가 있어서, 하게 됐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함께 하시는 모습이 보이시는가? 하나님은 때로는 스스로의 의지와 생각만으로는 안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라도 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가끼이 함께 하시는 일 아니고 무엇인가? 때로는 사람을 붙이시기도 하고, 넘어야 할 장애물을 두시기도 하고, 올라야 할 산으로 인도하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저는 앞에서 소개한 이 모든 일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비, 세심한 돌보심, 치유하시고 붙드시는 사랑,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한다.
- 성경의 ‘이 모든 일’
오늘의 말씀은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서(7), 이 사람이 누군가?(9)’ 보고자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란 무엇일까? 예수님의 사역을 말한다.
8장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1), 바다를 잔잔케 하심(22-25), 거라사인의 땅의 광자를 고쳐주심(26-39), 열두 살 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심(40-41, 49-56),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주심(43-48), 제자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시면서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게 하심(9:1-6), 오천 명을 먹이심(10-17) 헤롯의 이야기가 이 사이에 있지만, 누가는 주님의 사역을 증거하면서 잠시 헤롯에 대한 이야기를 사이에 할 뿐이다. 즉 헤롯이 들은 이야기는 예수님의 모든 능력과 기사와 활동들에 관해 들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전하실 때, 단순히 듣기 좋은 이야기, 들으면 마음이 잠시나마 편해지는 말씀을 전한 게 아니다. 인지부조화라는 말이 있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근거없는 낙관적인 말로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도록 사람들을 위로한 차원이 아니다. 오늘날 이런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말씀에 듣는 귀가 열린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일어났다. 아니 소망이다. 긍정적인 힘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열리는 본디부터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늘 말씀드리지만 로마 제국(帝國) 치하(治下) 였다는 상황을 염두에 두라. Pax Romana의 이면은, 사람들의 속을 검은 먹으로 끊임없이 덧칠에 덧칠을 하는 격이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어보라. 길가의 인생의 모습, 돌짝밭과 같은 인생의 모습, 가시떨기 속과 같은 인생의 모습, 어디에도 결실이 없다. 사람들의 현타였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것도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신앙은 안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되는 것 같아 보여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실하는 것이다. 8:15절 주님은 좋은 땅에 대한 비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 말이 우리에게 소망의 열쇠가 아니고 무엇인가? 대박사건에 대한 기대와 때로는 헛된 망상이 희망이 아니라,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 그동안 방점을 100배의 결실에 찍어왔는데, 사실 여기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사역에 대한 의미를 다 말할 수 없다. 예수님 만나서 우리 인생의 풍랑과 바람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절망과 고통, 죽음의 슬픔과 존재에 대한 애처로운 감정들을 이겨내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저 별 어느 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분명한 사건이었다.
누가복음4장에서,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의 칭송이 잇따랐다. 그 때, 성경을 읽으셨는데, 이사야의 글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 회당에 있던 이들이 주님을 주목하며 응시했다. 그때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 하셨다.
‘이 모든 일’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 안에서 복음이 실현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사건이다.
사람마다 다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서 죽었던 요한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했다. 더 나아가 어떤 선지자 중 하나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자들도 이런 말들을 듣고 있었다. 9: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이 모든 일을 접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멀었던 눈이 열리고, 닫혔던 귀가 열리길 주님께서 바라신다.
- 헤롯의 관심
헤롯은 어땠을까? 그는 이 모든 일을 듣고 ‘이 사람이 누군가?’ 물음만 있었을 뿐 믿음에 실패했다. 누가복음23장을 보면, 예수에 대한 관심은 극장 앞에서 영화상영이 취소됐을 때의 마음처럼 꺼져버렸고, 12절에는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은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다. 도둑이 제발 저렸다. 7절을 보자.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누가복음이 다른 복음과 달리, ‘분봉왕’이라고 명토박아 증거하는 의도가 있다. 그의 야망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것도 로마처럼 모방해서 말이다. ‘가이사랴’, ‘디베랴’라는 로마황제의 이름을 딴 신시가지를 만들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야망을 숙고해보라. ‘분봉 왕’이라고 명시한 의도는 그 야망을 가지고 별짓을 다해봤자, 결국에는 분봉왕(이스라엘의 부분적인 왕)에 불과하다는 풍자가 섞여 있는 것이다.
왜 그는 당황했다고 설명하고 있는가? 감추고 싶은 정치적 비밀이 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야망에 비해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유대혈통이라는 정통성에 대한 토대가 부족했다. 그러니 부친 헤롯대왕과 같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이스라엘 전역의 왕이 되려는 욕심 때문에 이복동생 빌립은 암살했다. 유대혈통을 지닌 헤로디아 빌립의 아내와 결혼했다(형사취수제). 막6:18 세례 요한은 이 일이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는 자칫 빌립의 암살이 드러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자기가 저지른 일이 있으니까, 그는 겉으로는 멀쩡한 척해도 영적으로는 짓눌려 있었다. 정신적으로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뜻을 가진 ‘에포레이’(ηπορει, 막6:20)를 가져와 ‘디아포레이’(διαπορει, 심히 당황하다)라는 말을 썼다.
시편32:3에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일로 여겨지는데,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9절,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세간에 예수님에 대해 요한이 살아돌아왔다고 말하니까, 두려움이 일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육체를 입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영이 환생해서 자신을 저주하거나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창3:8을 보면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짓고 나니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만 했을 뿐인데, 무서워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죄를 짓고 나니까 그 부르심도 두렵게 느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옷이 벗겨져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드러났다는 말이다. 시편32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1) 그런데 죄가 드러났다. 그러면 그것을 가리거나 감추기 위해 숨게 된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게 만든다. 심지어 은총까지도 말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도 말씀하신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단순한다. ‘하나님을 향해 낯을 들 용기’가 없고, 스스로 피했던 셈이다.
이 모든 일을 듣고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군신지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상적인 야망과 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욕심 때문이다. 자기 관심사 충족 목적만 가지고는 주님을 바로 믿을 수 없다. 자유함이 있겠는가? 기쁨이 있겠는가? 참생명이 있겠는가? 행복하겠는가?
고린도후서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말씀했다.
주님이 행하신 일들에 복음을 전하는 사이에 오늘의 말씀을 삽입하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을 보고 듣지만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헤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심없이 예수님을 믿으라. 믿음으로 눈을 뜨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한 깨달음과 고백이 있기를 바란다. 그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