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31일 성령강림절
- 목마르거든 마시라.
성령강림절에 주님 앞에 나아온 여러분 모두에게, 쉴만한 물가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목마르지 않은가?
코로나 때문에 긴 피난 길을 걷는 느낌이다. 피난길은 언제나 목마름이다. 이태원에서, 학원강사에서, 이커머셜 업체로, 사그라들 것 같다가 또다시 번지는 것을 보면서, 모든 노력들이 소용없는 것 같고 지쳐가는 게 사실이다. 일선에 있는 방역전문가들은 어떨까, 생각하면서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생각해봤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목마른 이들은 누구든지 주께로 나아와, 주님께 나아온 우리 모두가 목마름을 해결하길 바라신다.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어떤 목마름을 느끼시는가? 제자들은 예수님과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목마른 자들을 발견했다. 세리와 죄인들, 수많은 병자들, 수가성의 여인, 이방인으로서 주님 앞에 나아와 자비를 구했던 수로보니게 여인, 귀신들려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었던 사람, 그의 가족 뿐만 아니라 그의 이웃들까지 고통이었다.
건강 때문에 목마르고, 평온하지 못한 가정 때문에 목말랐다.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 그리고 싸늘한 시선 때문에 목마른 사람도 있었고, 밤새 빈 그물을 걷어올리면서 허탕친 심령 때문에 목마른 사람도 있었다. 형제와 재산을 나누다가 서로의 떡이 더 커 보여서 목마른 사람도 있었고,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는 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 사람들도 목마른 사람들이다.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성전 어귀에서 기도는 외식하는 자들이나, 부자였고 사회적 지위도 얻었지만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 말이다.
다윗처럼 목말랐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한창때는 사울을 피해 도망다녔다. 많은 전쟁을 치러냈다. 중년에도 그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잘 아는대로 압살롬의 반역으로 몸을 피신시켰었다. 노년에는 한 가지 진술이 그의 상태를 잘 말해준다.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할지라.”(왕상1:1)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다가 몹시 목이 말랐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말했다. 베들레헴에는 블레셋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세 명의 용사가 적진을 뚫고 들어가 우물을 길어왔다. 다윗에게 물을 떠다가 고작 갈증을 해갈하게 하려고 목숨까지 내걸었다. 다윗이 어떻게 이 물을 마실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단순히 물이 아니라 그들의 피값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마셔도 됐을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렸다. 이 모습을 연상해보라. 다윗이 그 물을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순간, 다윗 진영에는 감동이 일었다. 대신에 다윗은 더 큰 갈증을 해결했다. 전쟁 중에 자기 목숨을 바쳐 물이라도 떠다 바칠 수 있는 용장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직한 용장들이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서 시원한 물가가 돼주셨다. 그래서 시편1편은 그 경험을 노래하면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고백하고 있다.
유안진 씨의 “내가 가장 아프단다.”라는 제목의 시가 떠올랐다.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파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의사의 진단은 큰 질병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스트레스성 질환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너무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는단다.”라고 말한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 나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 나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 나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 나 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하나님은 다윗의 목마름을 채워주셨고, 시든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셨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여정을 걷노라면 지치고 상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견디고 이길 수 있도록 은혜의 생수를 공급해주신다.
- 와서 마시라.
주님은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와서 마시라’는 뜻은 무엇일까?
주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사모하라.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지만, 성경을 보면 주님을 더 적극적으로 의지함으로 “은혜를 마신 사람들이 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예수시란 말만 듣고 소리질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은혜를 구했다. 혈루병 여인도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옷깃만 만져도 나을 줄 믿고 주님을 붙잡음으로 그 병의 근원이 나았다.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나온 어떤 사람은 주님께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막9:22) 청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지르며 말한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주님께 온다는 것은 믿음으로 주님을 붙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신다. 주님께 더 적극적으로 믿음으로 나아오길 소망할 때, 주님은 큰 믿음을 부어주셔서,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를 보게 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기를 원하신다. 38절에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44:3-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주리니,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5:1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예수님은 “나에게로 와서 마시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 지치고 상한 심령을 부르시고 메마르며 목마른 이들을 부르셔서, 시냇가의 버들 같이 되기를 바라신다.
-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주님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39절은 이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이다.
성령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시인하게 한다. 반대로도 말할 수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시인할 때, 성령의 역사가 임한다. 어떤 역사가 나타났을까? 세 가지만 주목하고 기억하자.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된다. 바울을 곤고한 자였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만 육신으로 죄의 법에 사로잡혀있는 자신의 곤고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자신을 건져낼 수 있을까, 탄식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냄을 깨달았다. 그래서 로마서8:3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계속해서 39절은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 존재의 기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느낄 때, 자신의 인생을 부정할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의 저주와 불행으로 끝날 것 같은 불행에 휩싸인다. 그러나 복 주시고 상주시는 분께서 우리를 위해 사랑하고 계심을 알 때, 주님의 약속을 믿고 끝내 승리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나타나는 고난은 저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과정임을 믿어 승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한다. 로마서8:16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이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 알게 하신다.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았기에, 유대인들의 저주와 박해와 위협을 이겨냈다. 바나바와는 화해를 했으며 마가에 대해서는 용서하고 그 누구보다 그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보다 연약하고 부족한 자를 아끼시고 살피시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았기에 유대의 유력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 에베소서3:16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말렸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성령의 증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에 너무나 많이 흔들리고 상처를 받고, 자신의 유익이나 이로움의 여부에 민감하여 변덕을 부릴 때도 있다. 마음이 녹아내리거나 약해질 때도 있고 쉽게 무너질 때도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힘주시고 능력주시며 지혜와 용기주심을 믿고 담대하게 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3:17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말씀하고 있다. 자유는 힘이다. 사람과 주위 환경이나 상황에 매여있는 사람이 아니라 강건함으로 이겨내고 승리하며 형통의 복을 누리게 된다.
- 성령충만함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 모두가 힘들고 지친다고 말한다. 성령강림절기를 맞아서 주님께서 주시마 약속하신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기를 바란다. 맹신자나 무모한 신앙인이 아니라 살리시고 회복시키며 힘주시고 능력주시는 은혜를 따라 승리하기를 빈다.
어떤 이들 중에는 이런 걱정이 더 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에 걸린 것보다 그로 인해 받게 될 비난과 책망에 대해서 말이다. 혹 교회가 혹 신자들이 그렇게 될까봐 염려되는 것은 사실이다.
실존주의 문학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알버트 까뮈가 쓴 ‘패스트’라는 책은 오랑시에 발생했던 전염병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아직은 선명한 지평선에 첫 저녁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그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그 별들을 바라보고 있다. 곧 어둑해지면 감염자들을 무수히 나타나게 될 것을 예견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재앙을 당하면서도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의사 리유의 독백을 통해서 말한다.
적용해보자면, 자기는 당하지 않거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맹신 때문에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댓글에 누군가가 이태원발, 거짓학원강사발, 교회발 감염을 욕하고 비난하고 나서니까, 그에 대한 댓글에, “당신도 코로나에 걸려서 지금 당신이 대책없이 쏟아내는 비난과 욕을 똑 같이 당할 것이다.”라는 댓글을 달아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짜증이 나고 힘들면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주님께서 마시게 하는 은혜를 마시고 힘을 내시라. 그리고 세상의 빛이 되시라.